군인 아들이 아버지와 이별하는 방법

by 사선에서

2024년 6월 4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 글은 군인으로서 아버지의 임종과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느낀 점을 후배 군인들에게 전하고자 적는다.


아버지는 2023년 4월 28일,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극적으로 고비를 넘기신 후 일반 병실로 내려오셨고, 2주간 입원하신 뒤 집으로 퇴원하셨다. 퇴원 당시 아버지의 폐는 약 40% 정도 기능만 남아 있었고, 산소 발생기에 의존한 채 투병 생활을 시작하셨다.


이후 두 차례 더 입원하셨고, 그때마다 나와 형은 교대로 간병인을 쓰지 않고 아버지를 직접 간호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고, 한 달에 한 번씩 대학병원 외래 진료를 통해 각종 영상 및 혈액검사를 받으셨다. 결과는 극적인 호전은 없지만 급속한 악화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 이렇게만이라도 지내시면 좋겠다."


이런 희망을 품고 될 수 있는 한 자주 시간을 내어 맛있는 것을 사들고 아버지를 찾아뵈려 노력했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부모님 댁에 갔다. 회식이나 모임은 가능하면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조정했다. 주말에는 금요일과 토요일은 집에 들렀고, 일요일엔 다시 부모님 댁에 가서 병간호를 하고 밤늦게 합참 독신숙소로 복귀했다.

내가 이렇게 아버지를 자주 찾아뵈려 했던 이유는 하나, ‘후회’ 때문이었다.


작년 4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을 때 나는 무척 당황했고 두려웠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그 순간, 나는 엄청난 후회에 휩싸였다.


"왜 평소에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까?"


군인이란 이유로 집안의 경조사에도 자주 참석하지 못했고, 막상 휴가를 받아도 내 휴식이나 가족들과의 시간을 우선하다 보니 아버지와의 시간에는 소홀했다. 그때 나는 ‘군인’이라는 이유가 마치 모든 것을 정당화해 주는 마법 카드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 마법 카드는 오히려 나를 죄인처럼 만들었다. 죄책감은 날 괴롭혔고, 고통은 곧 후회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퇴원하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기적처럼 아버지는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은 채 퇴원하셨다.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아버지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셨고, 뇌경색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 속에 힘을 내셨다. 내가 집에 가는 날이면 아버지는 어머니께 “언제 오는지 전화해 보라”고 채근하셨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연합연습으로 2주간 뵙지 못했을 땐 무척 아쉬워하셨고, 연습 마지막 날 임무 교대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버지를 뵈러 갔을 때 보여주신 환한 미소에 모든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한 기운을 느낀 것은 2024년 5월부터였다.


아버지의 인지 기능이 눈에 띄게 약해지기 시작하셨다. 아침과 밤을 구분하지 못하시고, 약을 복용하신 뒤 다시 드시려 하셨다. 의자에서 일어나실 때 힘들어하시더니, 화장실에서 넘어져 어머니가 119에 구조요청을 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드디어 마음속으로조차 부정하고 싶었던 ‘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과 나는 그동안 서로가 금기시했던 말을 꺼냈다.


"형, 아버지 병세가 생각보다 빠르게 악화되는 것 같아."


"그래,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어."

"이제 준비해야 할 것 같아."

"그래야지..."


작년 중환자실에 계실 때, 형이 아버지께 ‘시골 선산에 모실지 수도권 인근 납골당에 모실지’ 여쭈었고, 수도권 납골당으로 결정하셨다. 선산은 자주 찾아뵙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형과 나는 경기 북부 지역이 우리 둘 다 자주 갈 수 있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형의 장인어른 장례를 함께했던 장례지도사에게 연락해 도움을 받았다. 시설과 접근성이 좋은 곳을 소개받았고, 형이 장례지도사와 함께 현장을 다녀와 가장 적합한 곳을 결정했다. 나는 그 사진을 보고 "형이 결정한 바에 따르겠다"고 했다.


다음으로는 장례 준비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나와 형 모두 상조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특히 나는 군에는 상조 제도가 없어 평소 부모님 장례에 대한 걱정이 컸다. 그래서 장례지도사에게 상조 가입 여부를 물었는데, 오히려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상조는 정해진 금액을 미리 납부하고 그 범위 내에서 장례 절차가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반면 장례지도사가 제안한 방식은 사전 납부 없이, 장례협회와 필요한 예산을 장례 첫날 협의해 결정하고, 끝난 후 정산하는 방식이었다.


2018년 장인어른 장례 당시 상조 방식과 비교해보아도 오히려 더 합리적이고 실속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장례는 장례지도사와 함께 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매일 아버지의 상태를 장례지도사와 공유하며 준비를 이어갔다.


이후 나는 가능한 한 매일 아버지를 찾아갔다. 갈 때마다 병세가 악화됨을 느꼈고, 그럴수록 더욱 정성을 다해 모시려 애썼다. 어느 날에는 과장님께 양해를 구해 오후 시간을 내어,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셨던 한강 자전거 도로로 모시고 나갔다. (참고로 아버지는 국토종주 그랜드 슬램 메달을 수상하신 자전거 마니아셨고, 중환자실에 입원하시기 1주일 전까지도 하루 60km씩 주 3회 자전거를 타셨다.)


아버지는 자전거 대신 휠체어 타고서 한강 자전거길을 함께 걸었다.


"아버지, 기분 좋으세요?"


"좋다. 아주 시원하구나!"


"아버지, 저기 어디인지 기억나세요?"


"그럼. 용비교 휴식터잖아. 엄마랑 자전거 타면서 자주 쉬던 곳이지..."


아버지와 함께 과거를 회상하며 한강길을 걸을 때 나는 ‘이런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커피 한 잔을 사서 성수대교 휴식터까지 갔고, 햇살과 바람, 파란 강물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나와 함께 있는 사진이 아닌, 오롯이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2주 뒤, 아버지는 새벽에 119 구급차를 통해 한양대학교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셨다. 형이 동행했고, 의사는 건강 상태가 매우 위중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연명치료를 원치 않으셨기에 중환자실이 아닌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나는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직감적으로, 그날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병실에 도착해 아버지께 인사드렸다. 내가 누구냐고 묻자, 내 이름을 정확히 말씀하셨다. 가래가 심하게 생겨 간병인을 불러 석션을 진행했고, 그 사이 어머니를 찾아뵙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한두 시간이 지났을까.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지금 어디야? 아버지 지금 위독하시대. 어머니 모시고 병원 빨리 와! 나도 지금 가는 중이야.”


형의 위급한 전화에 나는 피가 마르는 듯한 긴장감과 전신에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았다. 곧장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고 계셨고, 의사와 간호사가 옆에서 응급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2인 병실의 다른 한쪽 침대에 있던 환자는 이미 다른 병실로 옮겨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이유를 간병인이 조용히 설명해 주었다.


“가족들이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병원에서 배려해드린 조치입니다.”


의사는 형과 나를 별도로 불러 말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해주세요...”


나는 아버지 손을 잡고 말씀드렸다.


"아버지, 제 말 들리시면 눈을 깜빡여 주세요."


아버지는 입을 벌리셨지만 말씀은 못하시고 눈을 깜빡이셨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 아들로 태어나 정말 행복했습니다. 항상 아버지를 존경했고 사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 잘 모시고 우리 가족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흐느꼈다. 늦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어 행복했다.


다음날 아침, 2024년 6월 4일 06시 50분. 아버지의 심박 측정기에서 긴 경고음이 울렸다.


“삐——————”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는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 더 이상 숨이 차 고통받지 않으셔도 된다는 생각에 슬픔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장례지도사는 바로 병원 장례식장과 연락해 자리를 확보해주었다. 발인이 예정된 빈틈을 간신히 맞춰 가능한 일이었다. 부대에 보고하고 동료들에게 부고를 알렸다. 모셨던 상급자들께는 근조화환을 부탁드렸고, 모두 흔쾌히 응해주셨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모습이 그려졌다.


멀리 전남 장성과 강원도 인제에서 군복을 입고 밤늦게 도착한 전우들이 있었다. 감동했고, 감사했다. 나도 언젠가 꼭 그들의 슬픔을 함께하리라 마음먹었다.


미리 준비했던 덕분에 장례는 순조로웠다. 상조가입 없이도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고, 오로지 손님 맞이와 아버지께 집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부족하지만 깊은 시간을 나눴고, 임종을 가족 모두가 함께할 수 있었다. 슬픔보다는 감사와 사랑으로 마무리된 이별이었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뵙고 더 잘 모시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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