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라!

by 사선에서

합동참모본부에서 경험이다.

야전에서 대대장과 사단 참모직을 마친 뒤, 나는 많은 중령들이 가고 싶어하는 합동참모본부로 전출을 가게 되었다. 특히 작전 직능(특기 530)을 가진 장교에게 합참 작전본부 근무는 대령 진급을 위한 결정적인 기회다.

비육사 출신 장교가 합참에 보직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이 육사 출신이며, 비육사 출신은 극소수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중에서도 흔히 “진급에 쓸 수 있는 카드를 쥔다”고 표현되는 총괄장교 자리는 대개 육사 출신의 몫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주변 상급자분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합참 작전본부 작전기획부 총괄장교로 보직되었다. 몇 년간 육사 출신이 독점해온 자리였고, 전임자 역시 육사 출신이었다. 인수인계 과정에서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김 중령은 능력이 대단한가 봐요?”

“왜 그러십니까?”

“야전에서 바로 합참 총괄장교로 오다니, 대단하네요.”

그는 육사 출신인 자신도 어렵게 보직되었는데, 학군 출신인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쉽게 왔느냐는 의미였던 것 같다. 나 역시 의아했지만 동시에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그렇게 합참에서의 치열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대대장 시절 병력 관리 중 한마디 실언으로 ‘견책’이라는 경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내 군 생활 중 가장 후회되는 일이었고, 그 사건 이후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실수를 만회해야 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하지만 흠결이 생기면 진급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수자 선발 기준은 '누가 더 잘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실수를 하지 않았느냐'가 기준이 되는 현실에서, 나는 반드시 그것을 뛰어넘는 결정적인 성과를 합참에서 만들어야만 했다.

합참에서는 최대 3년까지 근무할 수 있다. 징계 이력이 있는 나로서는 1차, 2차 진급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3차 진급 시기를 결정적인 시점으로 정하고, 긴 호흡으로 준비하기로 했다. 1~2년 차에는 열심히 근무해 신뢰를 얻고, 3년 차에는 진급에 유리한 핵심 직책에 보직되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매일 오전 6시에 출근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새벽 5시 30분, 전철 안에서 피곤한 얼굴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 하고 위로를 받았다. 일과 중에는 정신없이 치이며 살아도, 한순간도 내 목표를 잊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가 되면 가족 품으로 달려가 위안을 얻었고, 주말에는 일주일치 속옷을 챙겨 다시 근무지로 향했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출근해서 부족한 업무를 보완했다. 때로는 ‘이렇게 사는 게 맞는가’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을 떠올리며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하려 했다.

그렇게 2년간 작전기획부 총괄장교로 임무를 수행했다. 노력의 결과로 부장님과 과장님들께 인정을 받았고, 내가 희망하던 핵심 보직인 작전본부 총괄장교로 영전할 수 있었다. 합참 창설 이후 단 한 명의 비육사 출신만 보직되었던 이 자리에서, 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이제 나는 진급이라는 씨름판에 본격적으로 ‘샅바’를 잡게 된 셈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한마디로 ‘내 모든 것을 갈아 넣었다.’ 자유 시간은 사치였고, 주말의 가족 만남조차 우선순위에서 미뤄야 했다. 오로지 작전본부 총괄장교로서의 임무 완수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며 내 한계에 도달한 그 시점에 마침내 대령 진급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비선’

나는 진급에서 탈락했다. 역시나, 대대장 시절의 징계를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좌절감이 밀려왔다. 지난 3년간 온 힘을 쏟아부었던 내 노력이 허망하게 느껴졌다.누군가가 위로했다.

“너무 아쉽습니다. 하지만 김 중령님이 보여준 열정과 노력은 분명 빛날 겁니다.”

개소리였다.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분노가 치밀었고, 눈물이 흘렀다. 가슴이 무너지는 고통을 느끼며, 혼자 소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며칠간 불안과 혼란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합참을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후속 보직을 위해 인사사령부 중령 보직 담당 장교에게 전화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김 중령님은 서울 지역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에 이제 야전으로 가셔야 합니다.”

“야전이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합참 근무전에 경기 북부에 계셨으니까, 이제는 강원도로 가셔야죠.”

“강원도요?”

온몸이 싸늘해졌다. 대위 시절, 양구에서의 암울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진급도 안 됐는데 나보고 다시 강원도 산골짜기로 가라고?’

나는 억울한 심정에 보직장교에게 항의했다. 전역까지 5년밖에 남지 않은 나에게 왜 또 강원도냐고 따졌다.

“김 중령님만 그러신 게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저희는 규정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보직심의 결과에 따릅니다.”

전화를 끊었다. 창밖의 남산타워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령 진급 비선의 아쉬움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지금 나를 압도한 것은 ‘강원도’로 가야 한다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토록 원했던 진급에서 탈락했을 때는 절망감에 무너졌지만, 막상 ‘강원도’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진급 탈락의 아픔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지금 내가 견디기 힘든 이 순간도 시간이 지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 그토록 힘든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미 이런 경험을 여러 번 겪었다.

사단 전투지휘검열을 며칠 앞두고 지적 받을까 봐 밤잠을 설쳤는데, 다음날 아침에 갑작스러운 불시 보안점검이 나오자 검열에 대한 걱정은 금세 사라졌었다.

육군대학 참모학 과목 요약평가에서 몇 문항 답을 못 쓴 것이 굉장히 아쉬웠지만, 며칠 후 갑작스레 공격전술 시험 범위가 늘어난다는 소식에 요약평가에 대한 아쉬움이 순식간에 잊혀졌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 느끼는 두려움, 분노, 아쉬움은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힐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당신이 힘든 상황에 있다면, 너무 휘둘릴 필요는 없다.

그래서 이런 말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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