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이는 1학년 담임일 때 만난 아이다. 수인이의 엄마의 첫 대화는 반 단체 티를 맞추는 데 필요한 수인이 사이즈와 관련되어 있다. 1학년이면 6년 중 가장 부모의 질문과 걱정이 많은 시기인데 딱 그때만 개인적인 통화를 했었다. 수인이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덩치가 크다. 1학년 보통 여자아이는 s크기면 충분하다. 수인이 엄마는 XL와 XXL를 결정하지 못해 전화가 왔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L사이즈를 추천해 주었다. 민원이 난무한다는 학교에서 엄마가 선택한 XL와 XXL 중에 골라야 사이즈가 맞지 않아도 내 귀책사유가 없었을 텐데 나는 더 작은 L사이즈를 추천했다. 이건 무슨 용기였나... 사이즈로 예민한 엄마인데 박스티로 입는 티셔츠인데 굳이 작은 사이즈를 추천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안 그래도 덩치가 큰 수인이는 그것이 콤플렉스였다. 눈치 없는 남자아이들은 수인이에게 장난보다는 진심으로 뱉지 말아야 말들을 하곤 했다.
"선생님, 수인이가 그냥 지나갔는데 넘어졌어요."
"야, 네가 주먹으로 때리면 박살 나겠다."
수인이에게 입학하고 가장 큰 시련이었다. 이 사실을 안 나는 해당 남자아이를 조용히 불렀다.
"민철아, 그런 말을 하면 수인이가 상처받을 수 있어."
이 말은 들은 민철이는 발끈하며 말했다.
"선생님, 진짜예요. 수인이 때문에 제가 넘어졌어요. 진짜 무서워요."
나는 속이 터졌다. 어쩜 저렇게 눈치도 없을까. 나는 신체, 외모에 대한 평가적인 말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수업 시간에 주의시키며 수인이를 보호해 주었다.
나는 항상 교실에 7시면 도착한다. 7시 40분부터 아이들을 맞이한다. 3월 첫날부터 인사를 강조했고 아침에 교실에 들어올 때는 항상 선생님이 계신 곳에 가까이 와서 인사를 하고 들어가는 연습을 했었다. 몇몇 남자아이들은 들어오면서 문 앞에서 인사하고 들어 온다. 하지만 말 잘 듣는 대부분의 1학년은 선생님과 연습한 대로 선생님에게 가까이 다가와 두 발을 붙이고 배꼽 손에 70도 정도로 인사를 하고 들어간다. 나는 가까이 다가온 아이들의 눈빛, 옷매무세, 표정들을 살핀다. 대부분 아이들은 매일 비슷하다. 가끔 특이점이 있으면 물어보기도 하고 하루를 관찰해 보기도 한다. 수인이는 얼굴은 밝지만 목소리는 늘 작았다.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분위기에 늘 마음이 쓰였다.
쉬는 시간 나에게 다가오더니 귀에다 대고 조용히 화장실에 가도 되냐고 허락을 받았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 허락을 받는 아이는 처음이다.
"수인아, 쉬는 시간에는 그냥 화장실 가도 돼."
그 이후로 몇 번 더 묻더니, 하루는 조용히 다가와서 귀에다 대고 이야기했다.
"선생님, 똥 마려워요."
"그래, 물티슈도 가지고 가서 볼일 보고 오렴."
나는 속으로 이제 그만 물어볼 때도 됐는데 생각했지만, 선생님으로서 아이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고 학기 초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상처받은 일이 있었기에 100번을 더 물어도 수인이 만큼은 한결같이 받아 줘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한 보고가 아니었다.
"똥을 못 닦아요."
귀에다 대고 말했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나는 듣자마자 나는 수인이의 똥을 어떻게 닦을지 고민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제자들의 똥을 아주 많이 닦아본 배테랑처럼 말했다.
"아, 그렇구나. 같이 가자. 선생님이 닦아줄게."
수인이가 들어간 화장실 문 밖에서 물티슈를 들고 기다리는 나는 굉장히 좋은 선생님이 된 것 같았다. 수인이가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최대한 신속하게 닦아주고 나왔다. 10년 이상의 경력에서 학교에서 똥 묻은 속옷을 지퍼백에 넣은 적은 있어도 똥을 닦아 본 적은 처음이다. 수인이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수인이는 덩치가 큰 여자아이란 것 말고는 딱히 특별한 점이 없었다. 특별하다는 것은 다른 친구들에게 없는 특기가 있다거나 아주 예쁘다거나 공부를 아주 잘한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칭찬받을 기회도 적다. 그리고 학기 초에 덩치 때문에 상처를 받고, 어떤 일이든 허락을 자주 구하는 수인이는 늘 마음에 걸렸다.
5월부터 우리 반은 스포츠 클럽으로 줄넘기를 하기로 했다. 교실 책상에 40분간 앉아 있어야 하는 1학년에게 줄넘기 시간은 속에 쌓여 있던 활발한 에너지의 본능을 분출할 시간이다. 2교시 끝나고 20분간의 쉬는 시간 종이 울리는 순간 사물함에서 줄넘기를 꺼내 들고 달려 나간다. 운동 신경이 부족한 아이들은 한 발씩 말 그대로 줄을 넘는 수준이고 몸이 빠른 아이들은 20개도 연달아서 뛴다. 그중에,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다.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자세가 일품이었다. 이 상태로 영상을 찍는다면 바로 '줄넘기의 기본자세'라는 주제로 보여줘도 될 정도였다. 처음 줄넘기 하면 대부분의 아이가 팔이 옆으로 벌어지는데 이 아이는 팔을 붙인 상태에서 손목을 가볍게 돌리며 솜털처럼 가볍게 줄을 최소한의 높이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모든 학년 통틀어서 가장 자세가 좋았다. 바로 수인이었다. 수인이는 엄마가 살 빼라고 해서 줄넘기 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특별한 점이 없었던 수인이에게서 아주 특별한 점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지금까지 낮았던 수인이의 자존감을 완벽히 끌어올린 만한 능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수인아, 지금까지 본 아이들 중에 네가 최고로 자세가 좋다! 앞으로 줄넘기 수업할 때는 네가 모델이야."
이날부터 수인이는 줄넘기 시간만 되면 줄넘기 선생님이 되어 친구들을 가르치고 줄넘기하기 무거운 내 몸을 대신하여 바른 자세 모델도 되어 주었다. 평소에도 종종 줄넘기를 주제도 다각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인이가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수인이는 우리 반에서 인기가 가장 좋은 아인이와 친하다. 아인이는 인기가 좋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지 친구 관계에 대해 크게 예민하지 않았다. 아인이는 작고 예쁘고 말랐다. 내 눈에는 수인이도 예쁜데 아이들 눈은 다른가 보다. 아인이가 짧은 치마에 반양말을 신고 오면 모든 여자 아이가가 쳐다보았다. 수인이도 마찬가지이다. 3월 한 달은 서로 조심히 놀면서 아이들은 선생님의 허용 범위와 분위기를 파악한다. 4월이 되어 자신만의 기준으로 파악을 끝내고 쉬는 시간 자신의 행동과 목소리의 톤이 원래대로 조정한다. 이때부터 수인이와 아인이의 놀이 패턴이 만들어졌다. 아인이는 늘 아기나 공주 역할이고 수인이는 엄마나 공주의 말이 되어 주었다. 역할 놀이가 시작되면 수인이는 아인이를 업고 다녔다. 수인이의 얼굴은 재미있어했다. 얼굴이 벌게지면서 힘자랑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이 놀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멀리서 큰소리로 말했다.
"수인아 그렇게 하면 허리 다칠 수 있어."
이후로 둘은 이 놀이를 중단하였다. 나는 이 놀이를 하는 수인이가 약자라서 말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인이가 좋아하는 친구를 사귀는 방법을 찾던 중 친구가 좋아하는 놀이를 함께 했을 뿐이다. 소심해 보였던 수인이가 친구를 사귀기 위한 노력이었다. 큰 덩치로 소심해져 있는 수인이가 자신을 조금씩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표정은 등교할 때도 살피지만 하교할 때도 살핀다. 아이들의 표정으로 하루를 별 탈 없이 잘 지냈는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지 점검한다.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와 다툼이 있었는데 해결하고 가지 않으면 하교 후 집에 가자마자 엄마에게 기분 나쁜 자신의 감정을 토해내면서 엄마는 단편만 보고 오해의 싹을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아이의 세상에서 등교에서부터 하교까지의 시간은 자신의 소중한 일부이다. 찝찝하고 상처받은 마음보다는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뿌듯함이 다음 날의 등교를 가볍게 하기 때문이다. 하교하는 아이들의 표정도 매일 비슷하다. 마지막까지 온 에너지를 끌어모은 활발한 남자아이들은 얼굴이 상기되어 있으며 다음 일정도 몹시 바빠 보인다. 성실한 여자 아이 들는 바닥에 쓰레기를 모두 쓸어 버리고 자신의 짐을 야무지게 챙기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저학년 아이들과 전체 하교 인사 후 교실 뒷문으로 가서 한 명씩 나갈 때 한 번 더 인사를 한다. 나를 먼저 와락 안아버리는 남자아이들도 있고 매일 귀에다 대고 사랑 고백을 하는 여자아이도 있다. 이런 게 1학년 담임의 특권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수인이는 늘 표정이 밝지 않았고 기분 좋게 인사하지 않았다. 처음엔 직접 물어보았다.
"수인아,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무슨 일 있니?"
"아니요."
이 대답도 정말 기분이 안 좋게 느껴졌다. 하교 후 수인이와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에게 따로 물어보았지만, 별일 없다는 대답이었다. 하교 때 수인이의 안 좋은 표정이 마음에 걸려 수인이 엄마에게 전화했다.
"어머님, 수인이가 집에 갈 때 표정이 안 좋아서요. 물어보면 특별한 일도 없었고요. 왜 그런지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집에 와서 별말 안 하던데요."
다음날부터 나는 수인이의 기분 좋지 않은 인사를 무덤덤하게 받아 드렸다. 몇 달 후 줄넘기로 인정을 받고 내가 똥을 닦아 준 후쯤에 수인이에게서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학교에 더 있고 싶어서요."
수인이는 집보다 학교가 너무 좋았던 것이다.
쉬는 시간에 수인이와 친구들과 내가 앉아 있던 교사 책상 앞으로 몰려왔다. 동시에 색깔만 다른 하트 종이접기를 내 앞에 내밀었다. 이 중에서 가장 활달한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주려고 우리가 만들었어요."
"뒤에 편지도 있어요."
수인이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틈타 한마디 거들었다. 수인이는 이 말을 하자마자 얼굴이 빨개졌다. 이런 아이들의 선물을 많이 받아봐서 감동의 쓰나미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여러 개의 하트 종이 편지 중에 수인이의 편지는 특별했다. 선생님에 대한 애정 표현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보통일로 느껴졌지만 수인이의 편지는 진심이 느껴졌다. 이 편지 하나로 나는 수인이의 마음을 얻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단체티를 수인이가 나의 추천으로 L사이즈를 하기로 결정하고 학교로 배달된 단체티를 입는 전날 문자 하나가 달랑 왔다.
'아이들 티셔츠는 입혀는 보셨나요?'
나는 인사도 없는 이 문자에 얼굴이 벌게진 정도로 당황했다. 머리에 오만가지의 생각이 다 들었다. 입혀봐도 바꾸기 어려운 단체티 인 데다가 다짜고짜 '입혀는 봤냐'는 말이 담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질책으로 느껴졌다. 내가 이 정도까지 해야 하냐는 생각에 열이 받았다. 문자에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숨도 돌리지 않고 바로 전화를 했다.
"어머님, 입혀보지는 못 했습니다. 내일 도착하면 바로 입을 예정이라서요."
나는 그 문자에 당황하고 화는 났지만, 수인이 엄마가 왜 그렇게 문자를 보냈는지 이해했다. 수인이가 내일 티셔츠를 입었을 때 안 맞아 상처입을 상황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수인이 엄마는 학부모 상담을 할 때도 무뚝뚝하고 내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하며, 말 수도 적었다. 수인이 엄마는 딸을 걱정하는 마음에 내게 용기를 낸 것이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잘 맞을 겁니다. 제가 알아서 잘할게요."
다음날 수인이의 L사이즈 티셔츠는 너무나 잘 맞았다.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교실로 들어올 때의 수인이의 표정을 잊을 수 있다. 안도감, 편안한 미소, 만족감이 느껴졌다.
내가 굳이 L사이즈를 추천한 이유는 수인이를 위해서였다. 아이들 사이즈는 어떻게든 공개될 수 있는 내용이다. 티셔츠를 나누어 줄 때나 개수를 맞춰 볼 수도 있다. 우리 반에서 L사이즈가 가장 크고 남자아이 2명이 더 있었다. 우리 반 친구들의 범위 안에서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갑자기 XL라면 또 남자아이들이 수인이 티셔츠가 제일 크다며 생각 없이 말할 수도 있었다. 우리 반에 L사이즈를 신청한 남자아이와 비교했을 때 수인이도 잘 맞을 거란 예상을 했었다. 나는 수인이가 더 이상 덩치 큰 여자아이로 주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작은 아이들이 좀 많은 거지 그리 크지도 않은데 말이다. L사이즈를 추천한 나를 스스로 대견해하며 굳이 걸지 않아도 되는 도박에 마음을 던졌던 것이다.
학기 말쯤 수인이는 뚱뚱하고 덩치 큰 여자 아이가 아닌 줄넘기를 잘하며 여자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1학년이 되었다. 수인이의 1학년은 어린이 인생에 큰 시련을 겪었지만 어른인 나에게 용기 있게 손을 내밀었고 생각 없는 남자아이에게 복수하지 않았으며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와도 우리 수인이는 또 한 번 용기를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