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린딜라 Oct 22. 2023

동주의 정체성-童柱

정체성 = [이름 + 외모 + 가치관 + 신념 + 특성]

솔직히 "신념"이라는 키워드는 우리 사회에서 논하기 껄끄러운 단어입니다. 그러나 동주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꼭 알아야 하는 것도 '신념'이죠. 왜냐하면 신념은 한 사람의 삶의 방향과 목적, 다시 말해 그 신념이 원대하든 사소하든 매일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주니까요.


YOU4님 좋은 지적 하셨어요. 동주의 친구들이 총. 칼 들고 일제에 항거할 때 그는 총. 칼 대신 펜을 들었어요. 그의 친척이자 절친인 송몽규의 선택과는 확연히 대비되죠. 그래서 그를 비겁하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YOU1: 비겁하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고 용감하지 못하다는 말인데, 동주는 비겁함과는 결이 좀 다르죠. 그가 해온 선택들은 모두 용기가 필요한 행동들이었으니까요.   


YOU3: 뭔가 이 여행이 점점 재밌어집니다. 그냥 동주 시 얘기 좀 하나보다 별생각 없이 길을 건넜는데..


갑자기 제가 왜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됐는지 떠올랐어요. 사실 저는 소위 말하는 신념, 그 많은 신념들이 부딪히며 내는 소음에 지쳐서 동주가 떠올랐던 거예요.   

어떤 신념이 맞다 틀리다를 서둘러 판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것을 동주가 몸소 우리에게 알려주는 게 아닐까요?  


지금의 우리는,
동주를 우리 민족만 사랑하는 시인이 아니라, 한중일, 더 나아가 세계인이 사랑하는 시인으로 높이 평가하니까요.



벌써 6pm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했네요. 윤동주의 대표 시 [서시]가 새겨진 비석입니다. 저 멀리 남산타워도 보입니다.



이 비석 뒤에 또 한 편의 시가 숨겨져 있다는 거 아셨나요?


뒤로 가볼까요?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 9




식민지의 조선인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슬퍼하는 윤동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감히 표현하는 성품의 이 청년은 무력으로 압제하는 일제의 만행을 지켜만보려니 화가 납니다. 절친 송몽규는 독립투사의 길을 가고 있는데 말이죠. 동주는 아픕니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병원(1940. 12)


동주의 병은 뭐였을까요?


원인모를 마음의 병으로 펜을 놓고 힘겹게 보낸 3학년, 그 병을 마음 속에 두고 4학년이 되었기에 더이상의 공백기는 더이상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없었겠죠. 펜을 다시 들어요. [무거운 시간]으로 시작된 연전에서의 마지막 1년, 시의 뉘앙스는 여전히 침울해요.


연전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동주는 41년 5~9월, 서촌 누상동에 위치한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후배 정병욱과 살게 됩니다. 그러나 김송은 일본순사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 인물. 9월의 어느 날, 평온하던 집 안에 감찰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순사들이 집 안에 들어와 물건들을 모두 엉클어놓고 갑니다. 더이상 그의 집에서 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9월의 마지막 날 쓴 시[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 9. 31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린 기분. 지나친 피로감, 통증이 또 찾아옵니다.


기록상 동주는 이 시를 쓴 후, 10월 한 달 동안 시를 한 편도 남기지 않습니다. 4학년 졸업반, 흐름대로라면 10월은 가장 바쁘게 창작을 할 시기였는데, 이 중요한 시기에 그는 또 공백기를 갖습니다.


졸업을 앞 둔 10월 #공백기


그리고 11월 5일 우리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시 [별 헤는 밤]이 탄생합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여행을 시작한 이 10월의 어느 밤 동주는 무언가 깨달은 것 같아요. 내친김에 제가 소설을 살짝 써 볼게요.


10월의 어느 날, 스모그처럼 도성을 꽉 채운 폭력과 증오에 갑자기 숨이 탁 막혀 밥을 넘기지 못합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문 밖을 나섭니다. 상념에 잠겨 조용히 걷고 또 걷다 멈춰보니 자신도 모르게 김송 선생님의 집 앞에 서 있습니다. 친구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고요하기만 합니다. 즐겨 오르던 인왕산 도성길 방향으로 걸음을 돌립니다. 언덕을 오릅니다. 어느새 다다른 언덕, 지친 몸뚱이를 바닥에 앉힙니다. 그 때 한 줄기 산바람이 쏴-하고 불어옵니다.

코 끝이 선선해지는 이 온도


분노에 뜨겁게 달궈진 동주의 가슴과 머리가 차츰 식어갑니다. 눈앞에 펼쳐진 밤하늘, 혼자서 바라보는 별들, 캄캄한 하늘에 선명히 빛나는 별들을 한참 바라봅니다. 아름다움이 고팠던 동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리운 이름들도 하나둘 떠오릅니다. 어느새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동주. 그는 눈앞에 보이는 나뭇가지를 주어 자신의 이름자를 흙 위에 적어봅니다. 동. 주. 그 이름을 한참 바라보다가 흙으로 덮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문득 단어 하나가 떠오릅니다. #아름답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어떻게 사는 게 아름다운가?


또 생각에 빠집니다.

프란시스 잠Francis Jammes의 시 한구절이 떠오릅니다. #추위를 타는 별들의 반짝임

어느새 어둠에 눈이 익어 인왕산의 가을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높고 푸른 밤하늘, 소나무, 노란 단풍, 코스모스, 풀벌레 소리. 역설적이게도 지금 눈앞의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라이너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시도 떠오릅니다.

마음 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라이너마리아 릴케 [젊은시인에게 주는 충고]


보이지 않던 길이 차츰 보이기 시작합니다. 끈질기게 괴롭히던 통증도 차츰 사그라듭니다.

그렇게 [별 헤는 밤]이 탄생합니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1941. 11. 5.



그리고 돌아와, 서랍에서 자신의 시집을 꺼내 봅니다. 표지 위에 쓰인 두 글자 "병원".

그는 이제 지우개로 지웁니다.

그 위에 새로운 제목을 다시 적습니다.


<하늘과바람과별과詩   -  童柱  ->


그리고 정갈하게 자신의 이름을 씁니다. 童柱(아이 동, 기둥 주).


YOU1: 멋진 대요!


동주는 자신의 필명을 왜 童柱로 했을까요?


섬세하고 신중한 그의 성격상 즉흥적으로 만든 이름은 분명히 아닐 거예요. 그래서 더 궁금해졌습니다. 관련 자료를 찾기 어려웠는데 중국건축정보 사이트에서 童柱동주에 대한 설명을 발견했습니다.


좌측의 빨간색, 우측 노란색 화살표 수직기둥이 동주 童柱

동주 童柱 - 상부층의 하중을 받쳐주는 작은 수직기둥이며, 수평의 들보들을 잡아주어 안정감과 균형을 맞혀 주는 역할을 합니다. 대들보에 비해 존재감이 덜해 보이지만, 동주가 없으면 대들보도 지붕이 내려앉겠죠.


동주가 찾은 역할이 이거였을까요?  

#세상의 무게에 힘들어하는 이들의
작은 버팀목


이제 동주는 담대히 자신의 시집<하늘과바람과별과詩 - 童柱->의 서문을 써내려 갑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민족, 국경이라는 경계를 넘어 "원수도 사랑하라" 배워왔던 동주, 동시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아라" 교육받았던 동주는 이 두 목소리 사이에서 교집합을 찾고 싶었을거에요. 그러나 현실에서 그 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몹시 괴로웠던게 아닐까요! 그러나 이제 담대히 우리 민족이라는 작은 범위를 넘어, “인류” 더 확대해서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하기로 결정합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하늘 좀 보세요!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어요.

이제 우리도 동주처럼 한양도성 산책을 좀 해야 해요. 제가 서울 최고의 선셋포인트로 안내할께요.


짜잔!


현재 시간 6:40 pm


어느덧 야경모드로 접어들었어요. 


YOU4: 도성길에 안내등이 다 되어 있네요. 역시 서울!


그래서, 여기 백악구간 인왕산구간은 야간 산행이 가능해요.  


YOU3: 서울 한양도성은 저녁산책 최고맛집이네요~


이제 이 여행의 마지막코스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청운문학도서관으로 갑니다~







1941년에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펴내려던 19편의 시  


서시

자화상

소년

눈 오는 지도

돌아와 보는 밤

병원

새로운 길

간판 없는 거리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십자가

바람이 불어

슬픈 족속

눈감고 간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이전 07화 high-minded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