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한 5년 파묻혀 살자. 혹시 아는가. 이 일대 사람들의 바람대로 지하철이라도 연장돼 집값이 오를지. 그래서 오른다면 최소 두배는 되리라, 윤경은 그 생각을 하며 빙그레 웃는다. 안 오르면 또 어떠랴...
a시에 와서 비록 월세나마 2년동안 호수근처에도 살아봤고 이제 그곳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외곽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세를 끼고 매입한 아파트는 윤경 혼자 살기에 딱 좋은 20평 중반대의, 그래도 호사라면 호사인 욕실이 두 개나 딸린 방 세 개짜리다.
“a시로 이사해”
정훈이 처음 서울외곽 윤경의 분리형 원룸을 찾아왔을 때 내뱉은 말이다. 자기가 사는 인천에서 거의 1시간 반이나 걸린다고 투덜대며 자기가 한때 살았던 a시가 쾌적하다며 이사를 권유했고 윤경은 그말을 거의 청혼으로 받아들였고 한참시간이 흐른뒤 그것은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외곽이지만 행정구역상 a시가 분명한 준공 10년이 조금 넘은 이 아파트 단지에 윤경은 당당히 집을 산것이다.
이제 반년후면 세가 만기라니 그동안 윤경은 오피스텔 단기월세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기존 오피스텔을 6개월만 연장하겠다고 했더니 주인이 딱잘라 거절했다. 오피스텔은 단기도 많고 1년짜리도 많은데 왜 하필 이런 주인을 만났을까, 윤경은 좀 귀찮은 생각이 들었지만 내 집이 아니니 나가라면 나갈도리밖에 없어 여기저기를 알아보다,이번에 매입한 집 세입자를 좀 일찍 내보내자,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계약기간 앞뒤로 6개월정도는 서로 양해해준다는 희경의 이야기도 떠올라 부동산에 문의를 했고 중개업자가 세입자에게 물어본 결과 그쪽은 기한을 채우고 나간다고 고집을 피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직접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고, 중개수수료를 자기가 물어주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자,는 마음으로 윤경은 자기가 들어가 살 그 단지쪽으로 차를 몬다.
윤경이 차를 산것도 a시에 와서 마흔이 다돼서였다. 운전면허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일찌감치 따두었으나 이런저런 핑계와 사정, 무엇보다 운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랜시간을 뚜벅이로 지내오다 2년전 호숫가 오피스텔을 계약하면서 중고를 하나 뽑았다.
그때 대학동창인 희경을 통해 아는 중고차업자에게서 차를 산 윤경은 이럴 때 믿을만한 친구 하나 있다는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고 이 아파트를 매입할때도 함께 발품을 팔아준 희경이었다. 그래서 잔금을 치르던 날, 희경에게 얼마간의 사례를 했다. 희경은 손사래를 쳤지만 , 이래야 내 맘이 편해,라는 윤경의 고집에 끝내는 ,기집애, 하며 희경은 그 돈을 받았다. 이럴때 정훈이 있었더라면 그가 다 해줬을텐데,하고 없는 그가 아쉬웠다.
집을 사기 전 부동산 업자가 집을 볼수 있는 날짜와 시간을 묻자 세입자라는 남자는 지금 자신이 해외출장중이라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려주었고 그렇게해서 중개업자와 윤경은 빈집을 둘러보았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은 부드럽게 열렸고 그렇게 들어선 실내는 남자 혼자 산다기엔 지나치리만큼 깔끔하게 정돈돼있고 소파옆엔 공기 청정기까지 구비돼있어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전체적 취향이 어딘가 낯익은.
차윤경!
정훈은 단지 인근 까페에서 윤경을 마주하곤 큰 충격이라도 받은양 윤경의 이름을 소리쳐 부른다.
정훈이...정훈이 세입자였다니...윤경은 연속극,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현실로 벌어져 순간 어지럼증을 느낀다.
너였어 새주인이?
정훈은 목이 마른지 연거푸 물을 들이킨다.
안정훈.
7년전 그 남자. 무참히 윤경을 버린 그 남자가 지금 윤경이 매입한 집에 세입자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혼자일까,라는 생각이 윤경을 스친다. 윤경 몰래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는 그 사실을 1년 넘게 숨기다 털어놓은 그 남자 정훈을 이런 외진곳에서 만나다니..
윤경은 순간, 정훈이 그 어떤 변명을 둘러대도 당장 집에서 내쫓고 말리라,는 다짐을 한다. 아내가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숨기고 윤경을 안았던 저 두손을 당장이라도 잘라버리고 싶다...
윤경은 10여분 말없이 정훈을 쏘아보기만 한다. 정훈도 어지간히 불편했는지 빈 물컵만 만지작거린다.
너였구나...정훈은 이 말만 되풀이한다.
자기 여자를 두고 몰래 결혼한 남자 . 그리고는 그 아내가 둘째를 임신했다고 더 이상 이 관계를 끌수없다고 통보한 그 남자 .
“집 비워줘”
윤경은 거두절미하고 퇴거를 통보한다. 그러자 정훈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런게 어딨어. 아직 6개월이나 남았는데”
“복비, 내가 내면 되잖아”
“복비.. 너 많이 변했다?”
정훈이 이번엔 비열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정훈이 가끔 보이던 그 비열함 . 이별을 통보하자 붙들고 매달리던 윤경을 밀어낼때도 저런 미소를 보였다. 그 여자가 사업자금을 일부 대주었다며, 자긴 현실적으로 도움되는 상대를 택한거 뿐이라고.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선택을 한건데 울고불고 매달리는 니가 유치하다,는 식의 그런 미소.
“결혼은 했구?..아니, 여자 혼자라던데?”
부동산업자가 쓸데없는 소리까지 했구나 싶어 윤경은 은근 부아가 치민다.
정훈과 헤어지고, 그에게서 버림받고 윤경에게 남자가 전혀 없었던건아니지만 그 누구를 만나도 상대에게서 정훈의 흔적만 찾는 자신이 싫어 이별을 고했던 윤경이다. 그러니 남자와 오랜 연이 있을 리가 없었다. 딱히 평생을 혼자 살겠다 다짐한건 아니지만 아마 한동안은 , 아마 늦게까지 남자 생각은 안할거라는 막연한 예감속에 살아온 윤경이었다.
“암튼 집 비워줘 한달내로. 그럼 됐지?”
하고 윤경이 일방적 통보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나 혼자야 ”라고 그가 툭 내뱉는다.
그 잘난 와이프, 당신 사업자금 대준 그 잘난 와이프는 어떡하구? 애들은 어떡하구?라고 윤경은 묻고싶지만 애써 참으며 까페를 나선다. 그리고는 저만치 주차돼있는 자기차로 향한다.
“운전하네?”
윤경이 시동을 거는데 어느새 다가와있던 정훈이 옆에서 내뱉는다.
“초보운전 딱지는 떼고 다녀. 이런거 붙이고 다님 더 당해”라며 정훈은 윤경의 허락도 동의도 없이 ‘초보운전’스티커를 차 뒷유리에서 뗀다.
순간 윤경은 화가 치밀어 차에서 내려 그의 손에서 떼어낸 딱지를 낚아챈다.
“당신이 뭔데! 니가 뭔데!”라고 쏘아붙인다.
그런 윤경의 반응에 정훈이 흠칫한다.
“나쁜 자식...”하고는 윤경은 거칠게 차를 몰아 8차선 도로로 끼어든다.
혼자든말든 니가 왜 신경을 써.
희경인 전화너머로 끌끌 혀를 찬다.
니들 인연도 질기다. 악연이야 악연.
정말 삼류 소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는게 윤경으로선 어이가 없지만,그래도 죽기전에 한번은 보겠지,했던 정훈과 그렇게 재회한게 신기하기도 했다.
지난 7년 내내 한시도 자기의 기억을 떠난적이 없는 그 남자 안정훈.
“한달있다 집 비우라고 했다면서요?”
부동산 남자가 전화를 걸어온건 윤경이 남은 번역을 서둘러 마칠 즈음이었다.
“그 전에라도 비워주면 좋구요”라고 윤경은 아예 쐐기를 박는다.
“그래도 세입자권리라는게 있어서 기한 채우겠다고 하면 어쩔수 없는 일인데..”
“아마 비워줄겁니다. 제가 좀 알아요 그 사람” 하자 업자는 “그래요?”라며 반색하는 눈치다. “사모님이 들어오시는거죠?”쓸데없는 질문을 끝으로 중개업자는 전화를 끊는다.
밤을 새워 가까스로 번역을 마치고 출판사에 원고를 송고하고 윤경은 늦은 잠을 청한다.하지만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어 자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지난번 쓰다만 단편을 손보려는데 문득 정훈이 한 말이 떠오른다. 나 혼자야..희경은 신경쓰지 말라지만 윤경은 여간 신경 쓰이는게 아니다. 정훈은 아마도 이혼을 한거같다,라고 윤경은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거칠게 써내려간 단편 초고를 거의 다시쓰다시피 손을 본다. 조건좋고 돈많은 여자를 만나 자기를 그렇게 버리고 갔으면 잘 살아야지 왜...하자, 가슴이 헛헛해진다. 혹시라도 다시 만난다면, 거리에서 지나치는 길에라도 다시 만난다면, 하고 이런저런 재회의 상황들을 수없이 상상했고 그렇다면 ,잘 지내지?라고 쿨하게 물어보려 했는데...
우리생에 과연 쿨한 이별이란게 있을까...
그러다보니 도저히 올거 같지 않던 잠이 쏟아진다. 그리고는 정훈을 만난다. 그와 함께 a시 호숫가를 2인용 자전거로 돌던 7년전 그때를 꿈에서 마주한다. 정훈은 힐끔힐끔 돌아보며 조금은 겁에질려있는 윤경을 놀려댄다. 그러면서 일부러 급브레이크를 밟는가 하면 급정거를 하고 땅에 닿을듯이 눕혀서 커브를 틀고...
초인종이울린건 다 저녁이 돼서였다. 이 시간에 딱히 올사람이라고는 희경뿐인데,라며 문을 연 윤경은 떡하니 서있는 정훈을 보고 하마터면 놀라 소리를 지를뻔한다. 여긴 어떻게....부동산에 부탁좀 했어 니 주소..이런걸 함부로 노출해도 되는건가...
“보름만 더 여유를 줄래? 그럼 비워줄게. 복비도 내건 내가 내고”
정훈은 윤경의 책상 의자에 앉아 윤경이 주는 커피를 받으며 그렇게 말을 꺼낸다.
“왜 혼자야?”
윤경은 참지못하고 묻는다.
“이혼...아니고, 사별”
그말에 윤경은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유방암...애들은 처가에서 키워. 내가 키운다고 했는데”
사별했다는 정훈의 말에 윤경은 더 이상 할말을 찾지 못한다.a시 그 외곽에 세를 든걸 보면 사업도 잘 안된게 분명하니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다.
“어차피 당신도 권한이 있으니까 기한 채우려면 채워”
윤경은 조금씩 앙금이 사그러드는걸 느낀다.
“지금은 아는 선배가 하는 조그만 무역회사 다녀. 그때 집 보러 왔다고 할때는 중국출장중이었고”
정훈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한다.
“아직 6개월 남았으니까 천천히 알아보든가”하고 윤경이 그만 가라는 식으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너는 왜 여태 혼자야?” 라고 그가 묻는다.
“나 일할게 많아”라며 윤경이 현관문을 연다. 정훈은 더 이상 말을 않고 그대로 현관을 나가고 그렇게 문은 닫힌다.
“보증금은 이 계좌로 넣어달라든데”라며 부동산업자가 그로부터 일주일후 윤경을 만나 정훈의 통장계좌를 내민다. 보름만 더 여유를 달라고 하던 그가 어떻게 그리 일찍 집을 비울수 있었는지, 어떤 대안이 있었는지 윤경은 이해가 안갔고 알수도 없다. 지금이라도 그집 초인종을 누르면 정훈이 문을 열어줄것만 같은데.
“어디로 간다고는..”
“그런말은 안했어요...그냥, 그동안 잘살았다고만..”하는데 손님으로 보이는 중년여자 둘이 들어서면서 윤경과 중개인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어진다.
부동산을 나온 윤경은 저만치 보이는 자기 차로 가다 힐끔 자기가 들어가 살 그 단지를 일별한다. 이제 더 이상 저 안에 정훈은 없다. 그와 마주칠 일은 없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다 그녀는 다시 부동산으로 들어간다. 집좀 내놓을게요. 그말에 업자는 영문을 몰라한다. 그냥 시세대로 팔아주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윤경은 부동산을 나와 천천히 자기 차로 향한다. 이제 정훈이 없는 이곳에 들어와 살 필요가 더는 없다.. 어디든...그가 떠난것처럼 나도 떠나자, 차 시동을 걸며 그녀는 혼잣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