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둑맞은 봄날>

봄엔 알러지 때문에 경진이 힘들어한다는 생각만 한다.

by 박순영


명절 뒤끝에 갑자기 찾아온 혹한에 은혜는 여간해서는 안 돌리던 보일러를 아침 저녁 두세번씩이나 돌려야했다. 뭐야. 겨울 다 가고...

명절에 대체 휴일까지 총 5일치 원고를 쓴 뒤 은혜는 몸살로 쓰러지다시피 해 약을 지어먹었지만 별 효과가 없어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아가 수액까지 맞아야했다.

이럴 때 경진이 있었더라면....

육신이 고달플수록 헤어진 남자가 왜 이리도 보고싶은지 .

2인시청으로 결제했던 ott 채널 Y를 은혜는 정말 오랜만에 클릭해본다. 딱히 싫어하는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챙겨볼만큼 영화나 드라마에 관심이 없는 그녀가 이 채널을 유료결제한것도 다 경진 때문이었다.

그날 경진은 뜬금없이 영화 <드래곤>을 언급하면서 그걸 보고 빨리 영화평을 써야 한다며 당장 다운로드 받아 보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딱히 그 외 무료로 볼수 있는 채널이나 유투브 영상이 없는걸 확인하고 은혜는 유료가입을 했고 하는 김에 2인 시청이 가능한 상품을 택했다. 그렇게 하면 경진도 편하게 자기 집에서 볼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리고는 자기 포털 계정 아이디와 비밀번호로 로그인하면 된다고 경진에게 알려주었다. 경진은 재차 그녀의 계정을 물었고 은혜는 아예 메시지에 자기의 아이디와 비번을 적어보냈다.

그리고는 그날밤, 경진의 <드래곤> 리뷰가 영화전문잡지 칼럼에 뜬걸 은혜는 뿌듯해하며 읽었다. 언제 봐도 경진의 문체와 감각은 나이브하고 세련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올 가을쯤으로 잡고 있던 둘의 결혼이 틀어지기 시작한건 지난해 연말 경이었다. 경진은 평소와 다른 무척이나 심각한 얼굴로, 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자고 했다. 은혜는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지만 “언제까지 너한테 빌붙어 살수는 없잖아”라며 그가 냉랭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나한테 빌붙어 살다니..그게 무슨 말이야?”

“니가 내 살림 다 해주고 있잖아.. 쌀에 김치에...하다못해 전기밥솥까지”


경진이 다니던 영화사가 부도가 나면서 경진은 말이 좋아 칼럼니스트지 거의 굶다시피 지내고 있었다. 독립영화 한두편을 감독했던 이력으로 다른 곳을 알아봤지만 영화산업 자체가 불황인데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펜데믹 때문에 돈주고 여분의 사람을 쓸 형편이 안된다는게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실업자가 돼버린 경진은 닥치는대로 영화칼럼이며 리뷰, 그밖의 자잘한 영화와 관련된 글들을 기고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꼴이 되다보니 집에 쌀이 떨어지기 일쑤에 하필이며 얼마 쓰지도 않은 전기밥솥까지 고장났고 밑반찬을 갖다주런 온 경진이 보게 된것이다.

은혜는 그 길로 근처 전자상가에 가서 전기 밥솥을 새로 사서 경진에게 안겨주었다.

“내가 너 때문에 산다”라며 경진은 면목 없어 하면서도 연신 좋아했다.

처음 산 기념으로 그날 경진은 그 밥솥에 밥을 지어 은혜와 점심을 같이 했다...

그러던 그가 이젠 이별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음에도 이젠 더 이상 이 상황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그의 얼굴에 쓰여있었다. 은혜는 한번만 다시 생각해보자며 그의 손을 잡고 읍소했지만 , 이럴수록 너만 힘들어,라며 그는 매정하게 그녀의 손을 물리치고 까페를 먼저 나갔다. 식고 있는 손도 안댄 그의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은혜는 이대로 헤어질수 없다 판단돼 그를 따라 뛰어나갔지만 그의 고물차는 이미 저만치 길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몸살기가 좀 가라앉자 은혜는 모처럼 영화 한편 보고싶다는 생각에 한참 안 들어간 y 채널을 클릭한다. 그리고는 볼만한 영화를 찾다 별뜻없이 시청내역을 클릭하자 요며칠 계속 경진이 들어왔던 흔적들이 남아있다. 게다가 경진은 은혜가 꼭 보라고 했던 영화 < 로마에서 사흘>까지 본걸로 확인되었다. 당시 경진이 내용을 이야기하며 꼭 보라고 할때는 시큰둥하게 반응하던 그가 120분이 넘는 러닝타임의 그 영화를 끝까지 다 보았다는 표시가 돼있다. 경진도....그도 내가 그리운 거야...라며 은혜는 어느새 자신의 눈가가 촉촉해옴을 느낀다.



"너 무슨 고생을 하려고 가난뱅이를 못잊어하니?”

대학동창 진희는 그리 말하면서 혀를 찬다.

“나 그사람 정말 좋아해” 라는 은혜의 말에

“어리다 어려 아직도 사랑타령이나 하구”라며 진희가 어이없다는 듯 웃어댄다.

은혜와 진희는 대학 4년 내내 붙어다닌 사이다. 오죽하면 과선배 하나는 , 니둘 연애 하냐?라며 놀리기까지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진희는 회계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클라이언트와 눈이 맞아 연애 4개월만에 속도위반 결혼을 했다. 그리고는 그해 , 딸 맑음을 낳았다. 누가봐도 진희 자식이라고 할만큼 맑음인 100프로 외탁을 한거라고 은혜는 생각했다. 아이는 조금씩 말을 배울때부터 은혜를 이모이모하며 따랐고 은혜도 친조카나 다름없이 아이를 대했다.


그렇게 진희에게 경진과 헤어진 이야기, 그가 그립다는 이야기를 한 뒤 얼마후 그 까페에서 다시좀 보자는 진희의 전화를 받은 은혜는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며 자리에 나가 한남자를 소개받는다. 남자는 IT회사에 다닌다고 자기를 소개했다. 진희야...은혜가 왜 그랬냐는 애정어린 타박의 눈빛을 보내도 진희는 모른척 할뿐, 두분 얘기하세요, 하고는 소개만 시키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남자는 운을뗐지만, 어젯밤도 y채널에서 경진의 흔적을 확인한 은혜로서는 그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 아니, 그럴 명분이 없었다. 아직도 자신의 마음은 경진으로 가득한데 어떻게...

남자와 차만 마시고 헤어졌다는 말에 전화너머 진희는 나무라는 말 대신 한참 뜸을 들인다.

“듣고 있어? 미안해..어쩔수가 없었어”라고 은혜가 변명하려하자 “그게 아니구”라며 진희가 말을 막는다. 그리고는sns를 뒤지다 여고 동창 하나를 발견했고 그애가 첼리스튼데 곧 결혼한다는 글을 읽었다고 한다. 뜬금없이 왜 그런 얘기를? 하자 진희는 한참 말을 아꼈다 대답한다. 사진을 봤거든...내 기억이 맞는다면 남자가 경진씨야...라고 내뱉는다. 뭐라구? 은혜가 묻자, 바보,라며 진희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한다. 그 애 잘 사는 집 애야. 이쁘구, 공부도 잘했고 그래서 대학도 잘 갔구...경진씨 아무래도 양다리였던거같아...그말에 은혜는 넋을 놓는다. 아니, 내 돈으로 살아가는게 염치 없어서 헤어지자고 했어,라고 하고 싶은데...그 말은 말이 되지 못한다.



그날밤 은혜는 다시 Y채널에 들어가 시청 내역을 살피지만 경진의 흔적은 없었다. 헤어진 지 얼마 됐다고 결혼이란 말인가...진희말대로 그가 동시에 두여자를 사귀면서 저울질 하다 결국은 조건좋은 쪽을 택했다는 건가...그날밤을 뜬눈으로 새운 은혜는 그날 처음 원고를 펑크내기에 이른다. pd는 불같이 화를 내며, 지금 당장 노트북갖고 방송국 작가실로 와서 써내라고 닦달을 한다. 다른 방도가 없는 터라 은혜는 pd말대로 노트북을 챙겨 방송국으로 차를 모는데 운전을 하면서도 자기가 지금 어딜 가는지 왜 가는지조차 의식이 없다. 그야말로 생방 5분전에 원고를 pd와 mc에게 건네고나자 은혜의 온몸은 녹아 내리듯 스르르 가라앉는 느낌이다. 경진이 그동안 두 여자를 만나온게 사실일까...

“이제 와서 그런게 무슨 의미가 있어?” 헤어진 이후 처음 보는 경진은 좀 더 댄디하면서도 평화로워보였다.

“왜 그랬어..왜 나한테...당신한테 내가 어떻게 했는데”

“그게 싫었어. 넌 내 여자였지 엄마가 아니잖아. 근데 왜 내가 너한테 부양을 받아야 돼?”

영문모를 소리만 지껄이던 그는 “우린 정말 끝났어”라고 못을 박고 까페를 나서려 한다 . 그런 그를 은혜가 뒤에서 와락 껴안으면서 매달린다. 가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그는 그런 은혜의 양손을 냉정하게 풀어버리고 유리문을 밀고 나간다.

이젠 다 끝이구나, 하면서 은혜는 세상 모든걸 내려 놓은 여자가 돼간다. 계절은 바뀌어 여기저기 꽃들로 뒤덮여도 은혜의 마음은 지난 명절 뒤끝의 그 혹한기 이상으로 차갑게 얼어있다. 아마 이건 회복이 안되리라, 은혜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고있는데 문득 바나나 쉐이크 생각이 난다. 욕망의 널뛰기란 참.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래서 성욕 식욕은 참을 수 없다는 말이 있나보다, 하면서 냉장고를 여니 우유가 다 떨어졌다. 우유... 이 와중에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게 아이러니로 느껴졌다.


그리고는 오래 안들어가던 u 쇼핑 사이트를 클릭한다. 늘 대놓고 먹던 집이 편해, 라며 그녀가 그 우유판매상을 찾아 우유 24개를 장바구니에 담으려는데 웬 유기농 빵이 종류별로 잔뜩 장바구니에 담겨있는게 눈에 띈다. 이게 뭐지? 하고 담겨있는 빵들을 하나하나 눈여겨 보다, 경진이 그랬음을 알게 된다. 아...그랬어. 없이 살아도 먹는것만큼은 귀족으로 먹고싶다,고 그는 곧잘 농반 진담반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유기농이니 비건빵들을 한번 시켜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은혜는 u쇼핑 역시 Y 채널과 같은 계정을 쓰고 있었고 그 이야기를 경진에게 했던 기억도 있다. 경진도 자기 계정이 있을텐데 왜...하다가 은혜는 경진이 숨막히게 그립다. 비록 현실적 여건으로 다른 사람을 택하긴 했어도 마음은 네게 있어,라고 그가 속삭이는것같다. 은혜는 눈물이 핑돈다..자기가 경진에게 사주었던 그빵을 이젠 경진이 자기에게 보내려고 하는 것이다. 은혜는 그 정도의 마음이 남아있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건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에게 전화를 걸려 하지만 도통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일말의 재결합 가능성은 있다는 생각에 은혜는 희망을 품기로 한다. 그가 돌아온다면, 그는 돌아올 것이다, 틀림없다 그렇게...



그리고는 사흘후, 그녀는 U쇼핑의 결제 문자를 폰으로 받는다. 경진이 드디어 결제를 한 것이다. U 쇼핑은 한번 결제카드를 입력해놓으면 클릭과 동시에 자동결제 되는 방식이라 경진은 어렵지 않게 주문을 했으리라...그리고는 그녀가 구매 내역을 확인하는 순간 배송지가 바뀌어 있는게 눈에 들어온다. 그건 경진의, 자기의 주소도 아닌 낯선 주소였다. 어디지? 하던 그녀의 뇌리를 진희의 여고동창이라는 그녀가, 그 첼리스트가 스쳐간다. 그렇다면 , 그럼...주소는 강남 어딘가로 돼있다 설마 설마...하면서 경진에게 용기내서 전화를 건다. 그러나 전화는 연결음만 계속될뿐 응답이 없다. 그녀가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응, 하는 경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떻게....어떻게 된거야,라고 하자, 내가 돈이 없잖아. 그래서 니 신세좀 졌다, 그친구 아무거나 안 먹거든. 입이 고급이라서..라고 경진이 말한다.

내 카드로 그 여자 먹을 빵을 결제했단 말야? 라는 문장이 쏜살같이 나오려는걸 은혜는 간신히 참는다...누가 먼저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모르게 전화는 이미 뚜뚜 소리를 내고 있다. 그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 은혜는 실신하듯 그 자리에 쓰러진다...


그러고 있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경진이려니, 하고 안받지만 전화는 울렸다 끊겼다를 반복한다...마지못해 , 응, 하고 받자 경진이 아닌 진희였다. 기집애 뭐하느라구 전화를 이렇게 늦게 받아,라며 그녀가 타박을 한다. 진희야...하는데 그제야 비로소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린다. 나 계정 막아야 할거 같아,라고 하자 ,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라고 진희가 물어온다. 더 이상 경진의 이야기를 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아 은혜는 ,나중에 통화해,하고 끊으려는데, 잠깐, 하고 진희가 붙든다. 무슨 일인데...하자, 너 지금 집 잡히면 얼마나 대출나와?라고 묻는다. 무슨 얘긴가 싶어 은혜는 대답대신 침묵한다. 맑음이도 커가고 이제 좀 집을 넓혀야 할거 같아. 니 생각도 그렇지? 진희는 당연하단 듯이 은혜의 동의를 구해온다. 그래서 내가 니 집 하라고 이 집을 담보 잡혀? 이거, 엄마 유산이야. 너도 알잖아. 내 재산 전부라고. 하면서 되레 은혜는 경진에게 매달리는 꼴이 된다. 요즘 오피스텔 좋아. 싸고 편리하고 빌트인 다 돼있고. 그 집 반값이면 외곽에 큰 데 살수 있어...라는 진희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하게 비현실적으로 들려온다... 은혜는 화장대 서랍을 연다. 가끔 불면증을 앓을 때 먹는 손가락 크기의 약통이 눈에 띈다.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듯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봄꽃이 흩날린다. 경진, 꽃가루 알러지 있는데...하면서 그녀는 수면제를 입안 가득 털어넣는다...봄엔 알러지 때문에 경진이 힘들어한다는 생각만 한다. 그렇게 그녀는 잠이 든다. 깊은잠,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잠.

keyword
이전 04화소설 <그남자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