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되겠어? 하면서도 기주는 원고를 마무리해서 사이트에 노출돼있는 이메일로 송고를 한다. 이례적으로 라디오 작가 구인광고가 구직사이트에 떴고 일단은 3개월 계약으로 시작해 연장 가능하다는 것이다. pd이메일을 공개하는 파격적인 구인 광고를 낸걸 보면, 자체내에서 구하기 힘들거나 급해도 많이 급한듯 하다.
6개월 넘게 다니면서 정상적으로 월급을 탄건 두어번. 그것도 기주가 원장에게 이야기해 조금씩 조금씩 타낸 것이다. 원장은 늘 같은 소리였다. 요즘 원생이 자꾸 줄어든다면서 학생 유치를 좀 하면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식.그러면서 늘 떡볶이 파티, 무슨무슨 파티, 하면서 돈을 허투루 쓰는게 기주는 못내 괘씸했다. 그러면서 정작 강사들 임금은 안주는...
“몰랐니? 보습학원들 거의 그래”
하면서 지금은 결혼해 안착한 영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주는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을 받았다. 월세가 밀린지 넉달째라며 더 이상 깔 보증금도 없다는 이야기를 주인으로부터 거의 매일 통보 받아야했다. 직접적으로 나가라,는 이야기는 안하지만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럴때면 희찬이 떠오른다. 아니, 하루 스물 네시간 기주의 머릿속은 온통 희찬의 생각으로 가득하다. 대학 선후배사이로 온라인에서 우연히 기주를 찾아낸 희찬은 학생시절과 많이 달라져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피아니스트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그 후에 딸인가를 낳았다는것까지 들은 기주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지, 이후로 희찬이 이혼남이 된걸 안건 인사동 화랑겸 한정식집에서 처음 만났을때였다.
“몰랐니?”
희찬은 정식을 다 먹고 냅킨으로 야무지게 입가를 닦아내며 물어왔다
“그랬구나....그럼 애기는?”
기주가 묻자, 애 엄마가...하면서, 처음부터 기우는 결혼이었다며 그는 자학을 했다. 기주는 그런 희찬에게 연민을 느꼈고 이후로 희찬은 불쑥불쑥 문자를 보내왔다. 그렇게 둘은 점점 가까워졌고, 최소한 기주는 그리 느꼈고, 어느날 희찬이 기주의 월셋집 앞으로 찾아왔다.
“선배!” 카디건을 걸치며 철문을 열고 튀어 나오는 기주를 보고 희찬은 씩 웃었다. 놀랐나며..근처에서 고등학교 동창회가 있어 술 한잔 했다며, 차한잔 얻어마실까, 하고 왔다고. 그리고 그날밤 둘은 한몸이 되었다. 좀더 말하면, 희찬이 기주의 소파베드를 전부 차지한뒤 허락도 받지 않고 잠들었고 그런 희찬에게 담요를 덮어주는 기주에게 희찬은 짜식, 하며 손을 슬쩍 잡았고 기주는 동침의 시그널로 여겨 그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거 내가 한거 아니다”
헤어지던날 희찬이 기주에게 아무렇지 않게 그날밤 일에 선을 그었다. 지퍼를 내린건 너 아니었냐는 식이다. 기주는 순간 모멸감을 느꼈지만 선배 , 사실을 알고싶어,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희찬은 애매한 웃음만 흘렸다.
희찬과 기주사이에 틈이 생긴건 기주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면서 더 이상 희찬에게 용돈겸 생활비를 지원하지 못하게 됐을때부터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럴 조짐이 보일때부터 희찬은 자주 변덕을 부려,‘우리 둘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라며 기주를 밀어내곤 했다. 그러면 기주는 더욱 몸이 달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의 헤어짐은 말처럼 쉽지않았다. 완전히 헤어질 무렵이면, 그가 슬쩍 기주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런식으로 둘은 또다시 같이 밤을 보내고, 다시 연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어느날, 희찬이 바람좀 쐬고 오겠다며 기주에게 여행경비를 말하면서 기류는 변하기 시작했다. 당연 기주도 동행하는 줄 알았지만 희찬은 혼자좀 갔다오고 싶다고 말했다. 기주는 갸웃하면서도 남은 생활비에서 떼어 여행경비를 주었고, 결과는 참극으로 끝났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영미가 보았다는 희찬과 어느 여자의 동행 이야기를 기주는 입술을 깨물며 들어야 했다. ‘니들 사귀는 사이 아니었니?’ 영미는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기주도 모진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자긴 굶는 한이 있어도 희찬의 끼니는 해결해주려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 주었던 남자에게 이런식으로 뒤통수맞는다는게 하늘이 원망스러웠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일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또한 들었다.
“선배, 우린 사귄게 아니었나봐”
그말에 희찬은 아무대답도 없다.
“그냥 잠만 자는 사이였어 우리?”라고 기주가 묻자 희찬은“그거 내가 한거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순간 기주는 원형 테이블에 놓인 물잔을 움켜쥔다. 당장이라도 그 물을 희찬의 얼굴에 끼얹고싶은걸 기주는 간신히 참는다...
“왜 변명도 안해?”
“뭘....다 봤다면서...” 라며 희찬은 남은 커피를 홀짝인다.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둘이 정사를 끝낸뒤 기주가 타준 블랙커피를 나눠 마시듯....
언제부터였냐고, 쓸데없는 것까지 묻고싶어지는걸 간신히 참으면서, 기주가 덧붙인다.
"그럼 정산해야지"
그러자 희찬은 피식 웃음을 머금는다. 그럴줄 알았다는식의 비웃음이다.
“그 얘기가 왜 안나오나 싶었다”라며 희찬은 남은 커피를 비운다.
‘야, 내가 언제 너한테 돈 요구한적 있어?“희찬은 빤한 얼굴을 기주에게 들이민다.
어떻게....어떻게 이럴까...물론 희찬이 직접 기주에게 돈을 요구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의 문자는 늘 생활고와 그에 시달리는 자의식 일색이었다. 그것이 돈을 달라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가....
기주가 지금까지 희찬에게 건너간 돈의 반이라도 돌려달라는 문자를 희찬은 계속 씹고 있다. 어떤 날은 아예 문자를 열지도 않는다. 그러다 어느날인가 희찬이 신경질적인 답문을 보내온다. ”공연 다시 재개하면 한꺼번에 갚는다. 갚어“라며 그는 기주의 문자를 막아버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날, 희찬은 불쑥 기주에게 전화를 해 대학로 늘 만나던 그 까페에서 만나자고 한다. 기주는 그 즈음 얼마전 그만 둔 그 보습학원에 막 입사했을때다. 기주는 한밤중에 걸려온 희찬의 전화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걸 느꼈지만 애써 냉정을 가장해 그의 전화를 받았고 둘은 약속을 정했다.
그날은 하필 부슬비가 도로를 촉촉히 적시는 하늘이 어두운 그런 날이었다. 까페문을 열고 들어서는 기주를 저만치 구석진 자리에서 알아본 희찬이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낸다. 기주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들킬세라 심호흡을 한뒤 그에게로 향한다.
”어떻게 지냈어?“ 그가 마치 온라인에서 그녀를 찾아낸 뒤 처음 만난날처럼 물어온다.
그냥 엉망으로, 라고 대답할뻔한 기주는 건조하게 말문을 연다. 돈을 돌려달라고.
그러자 희찬의 얼굴에 짜증이 번진다. 그거 몇푼이라고...안그래도 코로나도 진정세에 접어들어 다시 연극을 올릴수 있을거 같다며 요즘 직접 희곡을 쓰고있다고 했다. 희찬은 연극계에서 제법 알려진 연출자였다. 그런 그가 코로나를 맞아 한동안 일을 쉬며 생활고를 맞게 되었고 그때 기주를 온라인에서 찾아내 그녀의 돈으로 생계를 이었던 것이다.
문득 희찬을 한 대 치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돈도 돈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헌신적인 사랑을 준 자신을 배반할수 있었냐고. 것도 모르고 기주는 희찬이 요구한 여행갈 때 신을 새 로퍼를 사주기까지 하였다. 기주가 사준 그 신발을 신고 희찬은 다른여자를 옆에 태우고 동해를 다녀왔다는게 아직도 기주는 믿기지가 않는다. 그럼 남는건 돈뿐이다...
그러는데 손가락으로 희찬이 담배를 태우는 시늉을 해보인다. 그거 좀 심각한 말을 할때면 짓는 포즈다. ”내가 너 돈 다 줘버림 우리 관계 끝나잖아“ 라며 그가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이건 또 뭐란 말인가, 기주는 어이가 없다..희찬은 그말만 불쑥 내뱉고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희곡이야기로 말을 돌린다. 이 남자, 날 아직 사랑하나보다...기주는 온몸의 힘이 풀려 하마터면 의자밑으로 굴러 떨어질뻔한다.
그날 이후로 희찬은 드문드문 다시 문자를 보내온다. 처음 몇 번은 답문을 보내지 않던 기주도 둘의 관계가 다시 이어지는건가, 하는 마음에 가벼운 안부 정도를 묻고 말하는 식으로 답한다. 어느날 희찬은 자신이 쓴 대본으로 드디어 연출을 하게됐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그러면서도 만나자는, 내지는 예전처럼 불쑥 기주의 집앞으로 찾아오는 일은 없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밤새 대본수정을 했더니 온몸에 힘이 없다며, 집에 비타민이 다 떨어졌다는 말을 한다. 그 문자를 읽고 기주는 습관처럼 비타민을 검색하다, 지금 내가 뭘 하는걸까, 하는 자괴감에 빠진다.
희찬은 여전히 둘의 관계에 모호한 입장이었고 돈문제도 질질 끌고만 있다. 마치, 돈문제가 정리되면 둘의 관계가 끝나고 그걸 두려워하기라도 하는것처럼....
하지만 기주의 또다른 이성은 말한다. 이번엔 속지 말라고...
’비타민 왜 안와?” 정확히 이틀후에 희찬은 문자로 물어온다. 당연히 기주가 주문했을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기주는 대답없이 문자창을 닫는다. 그러자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희찬과 자기사이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남은게 전혀 없다는...
기주는 희찬의 문자를 막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에게 받을 돈도 포기한다. 소송?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건 요원한 일이었다. 소송하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고되고 힘든 일이 소송임을 그녀는 잘 안다.... 그렇게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생각없이 인터넷 서핑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때 라디오작가 급구라는 문구를 보게 된 것이다.
자신을 라디오 피디라 소개한 의규는 보내준 데모원고가 맘에 든다며 한번 봤음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대학신문사가 주최한 소설 공모에 덜컥 가작으로 입선한게 다인 기주는 설마 되랴 싶었던 프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음날 2시 H방송 5층 라디오 제작국 복도에서 의규와 만나기로 한 기주는 그날밤을 뜬눈으로 새운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그동안 막았던 희찬의 문자를 열고 그에게 이 소식을 쓰고 있다. 마치 기억상실에라도 걸린것처럼....그러나 마지막 보내기 단계 직전 그녀는 자신을 제어한다. 그리고는 쓰기를 멈춘다.
의규는 창백한 인텔리 아우라를 내뿜는 전형적인 도시남자의 모습이다. 그는 자판기 커피 두잔을 뽑아 저만치 간이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주에게로 온다. 나란히 앉아 말없이 커피를 마시다보니 둘은 왠지 어색해진다.
“글 많이 써보셨나봐요?”
의규가 슬며시 물어온다.
글....가끔 끄적인적은 있어도 자신이 프로작가의 길을 갈 생각은 한번도 한적이 없는 기주는 뭐라 대답할 말이 없다.
다음날부터 곧바로 기주는 막대한 양의 원고를 소화해야 했고 의규는 한자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기주의 원고를 송출했다. 그러면서 기주는 차차 희찬을 잊어간다...
그리고는 어느날밤, 자신의 집앞에 이젠 희찬이 아닌 의규가 서있는걸 보게 된다. 가까운데서 모임이 있어 술좀 마시다 생각나서 들렀다고. 왜 모든건 되풀이 될까? 왜 모든건 이리도 비슷한가...의규가 언젠가 방송국앞 포장마차에서 말했던걸 떠올린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애엄마가 키우고 있다고. 이혼할거 같다고....
기주는 조심스레 자신의 반응을 살피는 의규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한다. 죄송해요. 지금 남친이 와있어서요....
그러자 의규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진다.
희찬도 의규도 , 그 누구도 없는 2평반 원룸에서 그날밤 기주는 자다깨다를 반복한다. 왜 나는 잠들지 못할까.....그리고는 미니 화장대 서랍에서 수면제 두알을 꺼내 물없이 넘긴다. 의규는 새 작가를 또 구하겠지 ,그러고있는데 스르르 잠이든다. 그러나 한시간후 다시깨어난다. 이미 창밖은 뿌옇게 여명이 밝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