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남자의 방>

그집엔 이미 민혁의 방도 마련돼있다고...

by 박순영


윤진은 자기의 눈을 의심한다. 만삭의 여자옆에서 쇼핑 바구니를 들고 있는 남자는 분명 민혁이다. 그녀는 설마설마 하면서도 다시 한번 시선을 모아 그를 바라본다. 틀림없는 그 남자 서민석. 10년전 그녀를 무참히 배반하고 저버린 남자 그 민석이다. 하필이면 왜...라며 그녀는 자신의 지독한 불운을 탓한다.

윤진이 a시의 외곽 40평 아파트까지 흘러들어온 데는 이젠 빚도 다 갚았으니 그만 편하게 살자는 것도 있었고 호수중심으로 형성된 센터를 굳이 피한건 더 이상 사람에 시달리기 싫다는 그녀 나름의 선택이기도 했다. 그래서 포탈 부동산을 뒤지다 이곳까지 와서, 중심이면 20평 초반이나 가능할 돈으로 40평을 얻었다 . 방 넷이면 충분하리라, 이제 차만 사면 된다,고.


그렇게 윤진이 이사오고 딱 일주일만에 같은 단지에서 아내와 , 아내라고 추정되는 여자와 함께 있는 민혁을 본 것이다. 민혁은 윤진을 지나쳐 107동으로 들어간다. 윤진이 105동이니 한동 건너에 그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저 들른거라기엔 배부른 여자나 그녀를 배려하는 민혁의 태도가 십중팔구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고 봐야해서 윤진은 황망하기만 하다.

“갑자기 웬 남도?”

10년전 둘은 나란히 회사를 나와 서울 외곽 원룸에서 동거를 시작했고 둘의 퇴직금으로 동네에 조그만 옷가게를 차렸다. 처음엔 아동복 위주로 했으나 점점 입소문을 타고 란제리, 성인복도 구비해 제법 수익을 내는 터였다.


“나, 내 사업을 하고싶어”라고 민혁이 내뱉은 건, 어느날 가게 셔터를 내릴때였다.

둘은 의류전문 브랜드 K의 마케팅 부서 신입과 대리로 만나 눈이 맞았고 어느날, 민혁이 먼저 동거제안을 해와 안그래도 그와의 결혼이라면 당장이라도 하고싶다는 마음을 먹고 있던 윤진은 그러자고 동의한 것이다. 그리고는 동거 1년만에 둘은 동반 퇴사를 해서 외곽에 자리잡고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제 민혁은 본격적인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돈이 더 들고 리스크도 있는데”라고 윤진이 걱정하자, 우리 적금 얼마나 되지? 하면서 민혁이 둘이 결혼자금으로 붓고 있는 공동명의의 적금을 언급한다. 둘은 매달 일정액을 공동의 통장에 입금하고 그렇게 3년 뒤에 만기가 되면 그걸 꺼내 결혼하기로 한 것이다.

“그돈은 안돼...”


2년 조금 넘게 부었으니 돈은 좀 됐지만 윤진은 그 돈을 필히 결혼에 쓰고 싶어 거절했다.

‘야, 식이 뭐 중요해. 내일이라도 혼인신고하면 되는걸“ 이라며 민혁이 뵤루퉁해했다. 하지만 윤진은 그 돈을 딱히 결혼식에 쓰지 않는다해도 비상금으로라도 남겨두고 싶어서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민혁은 회사를 다닐때도 틈틈이 자기 사업을 하고싶다고 하긴 했다. 윤진 역시 언젠가는 그가 버젓한 자기 사업을 하는걸 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자금 여력이 안된다고 판단해서 10년 뒤라고 못을 박곤 했다. 그랬던 걸 민혁은 앞당기고 싶어했다.


그날 이후로 민혁은 더 이상 사업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가게를 자주 비우고 손님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등 더 이상 가게에 관심을 두지 않는게 역력했다.



그러더니 어느날 불쑥 3박 4일의 남도여행을 언급한 것이다. 남도라면 둘이 사내 커플로 연애당시 주말이면 1박 2일로 두어번 다녀오기도 한곳이다. 동해와는 또다른 잔잔한 바다와 부표가 햇살 아래 너무나도 이쁘다는 느낌을 주는 그곳을 윤진도 좋아했다. 그곳을 언급하는걸 보면 민혁이 꽤나 서울살이에 답답함을 느낀다는 얘기도 되리라, 하고 윤진은 가게문을 며칠 닫기로 한다.


그렇게 떠난 남도 여행을 민혁은 마치 무슨 신혼여행이라도 온 양 들떠서 살뜰히 윤진을 챙겨주었다. 기껏해야 b급 펜션을 잡을줄 알았던 민혁이 별3개짜리 바닷가 호텔을 잡는걸 보면서 , 돈도 없음서,라고 타박을 하긴 했지만 그의 마음이 윤진은 고맙게 여겨졌다.

지금도 환하게 그려지는 남도의 야경. 정박해있는 어선들이 뿜어내는 조명의 열기가 윤진의 뇌리엔 생생하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올라오는길에 민혁은 급기야 그 말을 꺼냈다. 헤어지자고.

윤진은 처음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그러다 곱씹어보니 이번 여행은 민혁이 계획한 일종의 이별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럭셔리하게 돈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왜, 돈때문이야? 그렇게 자기 사업 하고 싶어?“라고 윤진이 운을 떼자 그는 아무대답이 없다. 그리고는 다음날 새벽, 자는 윤진을 내버려두고 민혁은 집을 나갔다. 민혁이 집을 나간걸 알고 나서 윤진은 수습이 안되는 정신으로 통장을 찾아봤다. 통장이 없다...그녀는 폰으로 잔고를 확인한다. 단 0원도 없다... 그렇게 민혁은 둘이 빠듯하게 모아놓은 돈을 모두 털어 내뺀 것이다. 일종의 사기라면 사기가 되는 행위였다.


이후 윤진은 이별은 감수하더라도 자기 몫의 돈은 돌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민혁은 ”갚는다 갚아“라며 윤진과의 모든 루트를 차단했다. 전화 메일 문자, 그 모든걸..

윤진은 아산에 있는 민혁의 본가까지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너희일은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는 대답뿐이었다.


그렇게 졸지에 돈과 남자를 모두 잃은 윤진은 가게라도 열심히 해보자,라는 심정이었지만 그거 역시 민혁이 이미 다 처분해 버린 뒤였다. 그뿐아니라 둘의 원룸 보증금까지 싹 다 빼갔다.

어떻게 살을 섞고, 부부나 다름없이 살았던 사람이 이렇게 나올수 있을까,라며 윤진은 거의 한달을 혼술을 하다 쓰러져 새벽에 응급실에 실려간적도 있다.


그렇게 그 혹독한 10년을 빌딩 청소부터 시작해 그야말로 안해본 일 없이 다 한 윤진은 대학 동창 희선의 권유로 학습지 교사로 취직해 그 일을 줄창했다. 그 이후 남자가 전혀 없었던건 아니지만, 윤진에게 남자는 이제 ’내것을 탐하고 언제라도 나를 떠날 수 있는 존재‘그 외의 다른 의미가 없었다. 둘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헐거워지면 뒤질세라 윤진이 먼저 이별을 고했고 그렇게 그녀는 악착같이 자신의 돈을, 재산을 지켜왔다. 그렇게해서 이곳 a시 대형 평수에, 비록 외곽이지만, 당당히 입성한 것이다.


처음엔 호수근처 a시 심장부를 노려봤지만 재건축 이야기가 돌면서 나왔던 매물이 들어가고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뛰기 시작해 엄두가 안나기도 했고 호재니 , 차익이니 하는 말들이 윤진을 오히려 피곤하게 만들었다. 더이상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작은 평수를 갈수도 있었지만 윤진은 호사라면 호사일수 있는, 어쩌면 지난 10년에 대한 자기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는지 방 네 개짜리를 선택했다. 중심가에 비해 관리비가 삼분의 일이라는 것도 큰 메리트로 작용했다.

윤진은 이사하고 남은 돈이 떨어질 때까진 그냥 쉬기로 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민낯으로 장을 보러 가고 은행을 가고, 터벅터벅 뚜벅이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을 버스 외에는 딱히 교통수단이 없는터라 차는 한 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중고차 한 대를 구입해 일주일간 연수를 받고 슬슬 몰고 동네를 돌아다니던 어느날, 황급히 단지를 빠져나오는 민혁의 차를 목격한다. 그 옆엔 예의 그녀가 타고 있는데 표정이 안좋다. 어딘가 매우 아파 보인다.

그리고는 일주일 후 분리배출을 하러 나온 윤진은 민혁과 맞닥뜨린다. 민혁은 어, 하며 말을 잇지 못하다, 대뜸, 니 돈 갚는다, 하면서 황급히 자리를 뜨려한다. 그런 민혁을 윤진은 붙들고 얘기좀 하자고 한다. 그렇게 둘은 단지 입구의 프랑스 빵집겸 까페에 들어가 우유와 빵 몇 개를 주문해 마주 앉는다.

”일주일 전에 봤어 . 와이프한테 무슨 일 있어?“윤진이 묻자, 와이프? 하던 민혁이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애 나올 때 된거 같던데...라고 윤진이 말하는데 민혁의 전화벨이 울린다. 잠깐만, 하고는 민혁은 전화를 받고, 윤진은 전화너머로 작게 '오빠'라고 민혁을 호칭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하긴 남편을 '오빠'로 부르는일도 흔하니까....윤진이 그러고 있는데, 여동생이 임신한채 이혼해서 당분간 자기가 데리고 있는거라며 민혁은 무겁게 말문을 연다. 그날은 조산기가 있어 병원에 가던 길이었다고..


아 그랬구나...아직 혼자구나 이남자...윤진은 자기 앞에 놓인 빵을 한조각 입에 베어 무는데 왠지 목이 메어온다.

넌? 결혼, 했지? 세월이 얼만데..하며 민혁이 자조의 웃음을 짓는다.

응...윤진은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한다. 그말에 민혁은 , 그렇지..하고는 믿는 눈치다. 남편은 뭐해? 하고 민혁은 다시 묻다가, 아냐. 됐어,라며 머쓱해한다.

”107동이면 25평?“ 윤진이 빵조각을 우유로 넘기며 그에게 묻는다.

”응...넌...몇동이야?“



윤진은 대답대신, 그렇게 도둑질 해 간 자기 돈을 어떻게 썼고 지금은 그가 뭘 하는지가 더 궁금하다...그런 윤진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민혁은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해보인다. 답답할 때 그가 곧잘 하던 제스처다.

사업이 자리잡히면 너한테 돌아가겠노라, 다짐했다고 그가 운을 뗀다. 널 영영 떠난게 아니고 잠깐만 그렇게 떨어져있겠다, 한것이라고. 그리고 윤진 몫의 돈은 수십, 수백배의 이윤을 내 돌려주려 했다고 . 그렇게 의류사업을 자그맣게 시작해 처음엔 잘 되는가 싶었고 직원도 하나 둘 늘어갔다고. 이대로라면 너한테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믿었던 회계 담당이 횡령을 하면서 회사가 기울기 시작하고 여기저기 대출로 간신히 버텨갈 무렵 펜데믹이 터져 개점 폐업 상태가 돼서 그야말로 헐값에 넘겨버리고 지금은 백수로 지낸다고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들려준다. 널 완전히 떠난건 아니었어... 거듭 그가 말한다.



그리고는 한달후, 윤진은 아침일찍 조깅을 나오다 107동 앞에 이사 트럭이 서있는걸 보게 된다. 사다리차는 8층에 걸려있고 한눈에도 단출한 살림살이들이 빠르게 내려지고 있다. 그렇게 구경하다 돌아서는데, 나 이사간다, 하는 민혁의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 윤진은 뒤를 돌아보지만 소리가 난 쪽은 그녀 뒤가 아니라 바로 앞이다.

사다리차에 눈이 팔려 바로 앞에 와있는 민혁을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왜? 왜 가는데?

윤진의 물음에, 우리가 어떻게 한 단지에 사니...라며 그가 인접한 b시에 작은 평형을 하나 계약했다고 대답한다. 사업을 모두 넘길 정도였으면 집을 사서 가는건 아니리라 추측하던 윤진은 순간, 바보,라고 내뱉는다.


뭐? 뭐라구했어?

당신, 바보라구...

윤진은 울먹이며 그 자릴 떠나 저만치 근린 공원쪽으로 달려간다.

민혁에게 말해야 했다. 언젠가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그를 들이기 위해 일부러 방네개짜리 큰 평형을 택했다는 걸. 그리고 그집엔 이미 민혁의 방도 마련돼있다고...하루의 피로를 풀어줄 그만의 서재겸 방이...

그러나 그말을 차마 하지 못한채 윤진은 계속 울먹거리기만 한다. 그렇게 공원 구석 벤치에 쪼그려 앉아 있는데 햇살이 그녀의 뺨을 간지럽힌다.. 날은 왜 이렇게 좋아... 날이 좋아 그녀는 더욱 서럽다.


바보,

그 소리에 이번엔 윤진이 뭐? 하고 되물으며 고개를 든다. 그녀를 따라온 민혁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젖은 볼을 닦아준다. 아직 혼자면...그럴리 없지만....혹시 혼자면 나랑 살래? 니 돈은 나중에 꼭 갚을게..계약한 집은 일단 동생이 살면 되는거고...그렇게 말하는 민혁의 품에 윤진은 고개를 묻는다. 지난 10년 그리도 그려온 그의 품에.



(21) Foreigner - I Want To Know What Love Is (Official Music Video)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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