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혼하면 행복할까>리뷰
작가 양영제의 홀몸이야기
OECD회원국 상위에 랭크돼있는 한국의 이혼율은 다분히 가치관의 변화에 기인한다 볼수 있다. 과거엔 무조건 참고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통념이 강했다면 이젠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패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평균 300쌍이 이혼한다는 우리의 현실은 이런 홀몸자들을 위한 어떤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냐고 묻는다면 ’없다‘가 답이다. 비단 우리만의 이야기라고는 할수 없겠으나 아무튼, 있다고 해봐야 인터넷 재혼클럽이나 커플 매니저가 속해있는 결혼정보회사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작가 양영제는 영화 <타이타닉>을 인용하며 홀몸의 뼈저림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가장 외롭게 죽는 사람은 주인공 남녀가 널빤지를 잡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을 홀로 목격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이라고. 그만큼 홀몸됨의 외로움과 소외감이 크다는 뜻이리라.
그런가하면 특히 홀몸 남성의 성적 낭패감을 ”홀몸남들의 성적 욕구는 처절하리만큼 비참하다“라고 쓰고 있다. 이혼이든 사별이든 홀몸됨은 유지돼오던 성적 접촉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러 사례를 예로 들면서 홀몸들의 불안한 연애과정, 어렵게 한 재혼, 그러나 재 이혼, 사별,그밖의 재혼의 여러 조건,등을 다루고 있다.
당장의 성적 갈급함을 달래기 위해 섹스를 위주로 한 만남은 끝내는 이별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나는 당신이 준비된 남자인 줄알았어요‘라는 ’그녀‘의 말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가 원하는 남자란 단순히 여자를 사랑하느냐 아니냐가 아니고 물적, 즉 경제조건이 충족돼있나를 묻는 것이다.
이런 여자의 마음을 모른채 남자는 여자를 ’그러게 내 집으로 가자고 했잖아‘라고 응대하고 여자는 ’내가 잠만 자는 여자‘냐며 뺨을 후려치고 둘은 파국을 맞는다.
초혼도 물론 ’물적‘조건을 무시할순 없지만 재혼만큼 절대적이진 않다. 초혼은 그나마 둘이 함께 이뤄간다는 개념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은 아닐까. 마음만으로, 성적 이끌림 만으로는 성사되기 어려운게 재혼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양영제 <재혼하면 행복할까>다밋,2012
사별자에 관한 이야기도 그려지는데 그들안엔 두 개방의 방이 존재한다고 한다. 하나는 전 배우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찬 방, 그리고 또 하나는 새사람을 위한 방. 그렇기에 전자를 무시하고 전배우자에 대한 미련이 새배우자인 나에게 오롯이 전이 될거라고 믿고 재혼을 한다한들 결과는 ’아니올시다‘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사별녀의 자식에 대한 애착은 거의 병적에 가까움도 지적하고 있다. 사별자에게서 보여지는 ’기억의편집‘ ’선택적 기억‘이란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는 원만한 재혼생활이 불가하다고 쓰고 있다.
흔히들 ’여자나이 50 넘으면 다 똑같다‘라고들 한다. 정말 그런가,는 개개인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작가 양영제는 이책에서 나이 38세 , 명문여대 출신 이혼녀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그녀 스스로는 자신의 높은 학력이 재혼시장에서 메리트로 작용할거라고 생각하지만, 학력이 높다는건 생각이 많고 비판력이 강해 남자를 피곤하게 만든다고 대부분의 홀몸남들은 생각한다. 그보다 더 치명적인건 시원찮은 그녀의 돈벌이다. 제아무리 명문대를 나와도 현재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않으면 ’간택‘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남자가 경제력을 도맡아야 한다는 통설이 뒤집힌 요즘 와서 더더욱 확연해진 현상이다.
그런데 재혼가정의 가장 큰 걸림돌은 전 배우자들의 자녀가 아닐까? 대부분의 홀몸남녀들은 새 배우자에게 자기 자식들의 친부모역할을 기대하는데 그것은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노력한다고 되는게 아닌게 ’천륜‘이 아니든가, 노력하는걸 가상히 여겨야지, 그 자체가 되지 못한다고 타박하고 서운해 하면 그 결합은 파경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남자들은 ’아이를 양육하지 않는 여자‘에 대한 묘한 편견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여자를 ’모성애‘라는 틀속에 가두려는 구태가 아닐수 없다.
충격적인 통계지만, 재혼 2년 내에 재혼커플의 80%가 재이혼을 한다고 한다. 특히 60넘어 하는 황혼재혼의 경우 90%가 파경을 맞는다고 한다. 그 이유야 저마다 다를수 있겠지만, 연령을 뛰어넘어 자기와 주변정리를 덜한 데서 오는 결과는 아닐까?
그리고 재혼을 굳이 ’같은 공간‘에 사는것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쓰고 있다. 서로에게 딸린 자녀와 그 외 가족들이 서로 적응해가는 시간을 벌어주는 일종의 ’거리두기‘식 결합도 나쁘지 않다는 것. 요약하면 ’따로 또 같이‘식 결합형태를 제시하면서 상속등의 문제가 포함된 ’재혼합의서‘도 제안하고 있다.
그래선지 두 번의 실패를 겪은 삼혼의 결혼 유지율은 비교적 높다고 쓰고 있다. 그것은 분명 앞선 두 번의 실패가 안겨준 뼈아픈 교훈에 기인할 것이다.
사별은 논외라 해도 이혼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어 뭐라 단언키 어려운 부분이있다. 다신 결혼같은건 안한다는 홀몸들이 있는가 가면 전배우자들과의 재결합을 꿈꾸는 사례도 있을테고 새로운 사람과의 새로운 결혼을 꿈꾸는 이들도 적지않다. 그런가하면 결혼이라는 ’제도‘를 꼭 필요로 하냐는 데 의문을 갖는 이도 많아진게 사실이다. 제도가 주는 안정감을 선호한다면 결혼을 할테고 그런것에서 자유롭길 원한다면 동거를 할것이고 그마저도 속박이라 느낀다면 따로 살면서 이따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 무엇을 택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지, 사회가 그걸 재단하고 평가할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형태든 그것은 삶에 대해 궁극적으로 ’희망‘을 갖는다는걸 뜻할테고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리라.
일단은 사랑하고 그 다음은 섭리에 맡기는것도 나쁘지않다. 설사 그 결합이 파경을 맞는다해도 사랑의 기억은 이혼의 아픔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우린 이혼하고 또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는, 재혼시장의 미아가 기꺼이 되는 것이다. 이제 이혼은 흠이 아닌 세상이 왔고 한집건너,두집건너 하나가 홀몸인 세상이다. 더 이상 홀몸됨을 숨기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회도 이제 홀몸들을 위한 오픈되고 효율적인 제도를 마련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