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월량대표아적심>

내게로 와요 내 손을 잡아줘요...

by 박순영

뒤늦게 야간 대학원에 입학해 막 적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낮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밤에는 학교다니는 일이 조금은 버거웠어도 어릴때부터 막연하게 꿈꾸던 문학의 언저리에나마 도달했다는 사실은 은채의 마음을 훈훈히 덥혀주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졸업을 해서 주간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리라, 그녀는 마음먹었고 입학 면접때도 그런 자신의 소신을 분명히 밝혔다.


출신학교에 따라 입학 장학금을 주는것이라는 말이 돌때 혹시 했는데 편의점 아침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걸려온 행정실의 전화는 그 혹시나를 역시나로 바꿔주었다. 하기사, 우리안의 고정관념은 쉽게 변하는게 아니어서 a여대, 하면 제법 알아주지않는가. 해서 어찌됐든 은채는 돈을 받고 학교에 다니는 입장이 됐다. 일정기준 이상의 학점을 받으면 5학기 내내 장학금이 지급되는 터라 이를 악물고 공부에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막 학교로 출발 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강경민입니다,라는 소리에 누구? 하고 낯설었지만 이내 신입생 환영회때 유독 친절하게 자신을 대해주던 2년 선배 남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일찌감치 시로 등단한 시인이었고 지금은 모 일간지에 칼럼과 에세이, 시를 주기적으로 올리고 있다는 소리를 누구에게선가 들은적이 있다.



무슨 일이세요 선배? 하고 되묻자, 저쪽에서 쿡,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라는 호칭이 어색한가 보다 하고 은채는 생각했다. 저쪽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혹시 이번 학과 책 만드는데 도와줄래요? 말하자면 보조 편집인데..하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은해는 ,할게요,라고 대답한다. 안그래도 책쓰기, 책만들기에 평소 관심이 많던터라 고민하고 말고 할것도 없었다. 수고비는 내 장학금에서 반 드릴게요,라는 말에, 은채는 돈은 필요없어요,라고 이야기 한다.



그렇게 해서 은채와 경민은 함께 학과책 <문학시대>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기 위해선 학과생들의 원고를 받는 일이 급선무인데 거의가 거절 의사를 밝혔다. 반 이상이 기성 문인인 상황이다보니 혹시나 제출했다가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내지는 다른 사람 글과 자기것이 비교당한다는것에 대한 거부감, 그런것이 작용하는듯 싶었다. 그래도 은채는'선배님 제발요'를 간드러지게 말하면서 수십편의 시와 대략 열편 정도의 소설을 받았다. 은채의 이런 역량에 경민은 감탄을 했다. 원고받기 쉽지 않은데...라며.




이제 학과장 k의 격려사가 필요했다 은채는 그것만은 경민에게 떠넘겼다. 이제 신입생이, 학과장 입장에서는 누군지 기억도 안나는 새내기가 원고 운운한다는게 이치에 맞지 않는것 같아 은채는 그 청탁만은 경민에게 미룬것이다.


"전데요 선생님..격려사..." k에게 전화하는 경민의 음성이 떨렸다. 그래도 ok를 받아냈는지 전화를 끊는 그의 입가엔 미소가 어렸다. 둘은 그렇게 하이파이브를 했고 그게 둘의 첫번째 스킨십이 되었다. 이후 은채와 경민은 늦은 시각까지 편집을 하고 졸업생들에게 전화를 돌려 부족한 원고를 채우고 하면서 밤을 새다시피 몇날 며칠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는 드디어 책이 나오기 전날, 처음으로 둘은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은채씨는 왜 여기 왔어요? 그 좋은 대학을 나와서"라고 경민이 먼저 운을 뗐다. '좋은 대학'을 나오면 '문학'은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싶어 은채는 백수잖아요,라고 했다. 백수...



은채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모 기업 인턴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내 조직생활이 어울리지 않는다는걸 알고는 그만두었고 이후는 학과 선배가 알선해준 편집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 동창 희경이 구성작가로 일하는 모 방송국의 보조작가 일을 해봤지만 어릴적부터 꿈꿔온 문학의 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른것을 알고 그것 역시 그만 두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게 된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자 경민은 '사서 고생이네'라면서 술을 들이켰다. '그냥 전공살렸어도 될걸'하며 자기가 다 아쉬워했다. 하지만 경민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바 없는 처지였다. 졸업과 동시에 공무원으로 취직되는 대학에 다녔으면서도 시에 빠져 그 좋은 기회를 놓친것이다. 그리고는 지금 한달에 돈 100정도를 간신히 벌어 그걸로 학비에 생활까지 하고 있다며 투덜댔다. '문학이, 시가 날 망쳤어요'라며 그는 회한에 잠깐 젖는가 싶더니 이내 책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다. 이번에 은채씨 도움이 없었더라면 힘들었을거라며 돈은 학교에서 나오는대로 주겠노라. 은채는 그말에 가타부타 대답 않고 남은 술을 비웠다.



학과 책 <문학시대>의 출판 기념회가 조촐히 학교근처 중화요리집에서 열렸다 . 선배들에 의하면 늘 그집에서 개강,종강연이 열리고 행사가 있을때마다 찾는 단골이라고 했다. 큰 상 서너개를 이어붙인 방안에 학과생 수십명이 둘러앉다보니 그야말로 발 디딜틈도 없이 꽉 차는 느낌에 은채는 조금은 답답했다. 학과장은 술이 불콰하게 오르자 그때까지 구석에서 술만 축내고 있는 경민을 언급하며 '저자식, 겁도 없이 전화질이야'라고 타박을 했다. 그때 호기롭게 자신에게 전화로 원고 청탁을 해댄일을 빗대는 것이리라 ,은채는 생각했다. 술잔이 두세번 돌고 난 뒤부터 교수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고 학생들만 남아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 있는데 은채 옆으로 경민이 다가왔다.


"재미없으면 나가죠"라고 그가 슬쩍 은채의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 모습을 선배 몇이 보고는 "니들 연애하냐?"라며 비아냥댔다. 은채는 대답대신 꾸벅 인사를 하고 앞서 나가는 경민을 따라 중국집을 나섰다. 바깥은 이미 달빛이 요요히 흐르는 밤이 다 돼 있다.

"어디 가서 커피 한잔 할래요?"라는 경민의 말에 은채는 "내가 살게요"라고 했다. 그날 마침 경민으로부터 약속한 돈이 들어왔고 책을 만들면서 이래저래 배운것도 많아 은채는 진심으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해서 둘은 언덕길을 넘어 전철역 인근의 내부가 다소 레트로한 느낌의 까페로 향했다. 가는 동안은 초겨울 바람이 불어와 조금 춥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덜덜 떨릴 정도는 아니었다.

"춥죠?"경민이 주머니에 손을 찌르며 물었다.

"시원하고 좋아요"라고 은채가 대답하자 경민이 걸음을 빨리해 앞장서는 모양새를 취한다.

그렇게 까페에 들어서자 손님은 그 둘 뿐이었다. 손님들이 막 나갔는지 어질러진 테이블을 치우는 주인을 보면서 경민이 "문 닫나요?"라고 묻자"괜찮아요 앉으세요"라며 주인은 자리를 권한다.

"언제, 영화 볼래요?" 은채가 모처럼 용기를 내본다. 그러자 경민은 "안그래도 영화 본 지 오래됐는데"라며 반기는 기색이다. lp판을 틀었는지 지지직거리는 마찰음이 정겹게 곁들여져 올드 팝은 한층 더 레트로하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이 조금 이지러져 있는게 지금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고 은채는 생각한다.



1주일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 은채와 경민은 시내 모 극장 앞에서 만난다. 경민은 약속보다 30분이나 늦었다. "미안. 칼럼을 늦게 넘기는 바람에"라며 그는 머리를 긁적인다. 난처하거나 쑥스러우면 그가 곧잘 하는 행동이라는걸 은채는 기억해내고 "괜찮아요"라고 대답한다. 둘은 팝콘과 콜라를 사서 상영관안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영화는 줄리아 로버츠와 브래드피트가 나오는 느와르계열 액션 스릴러였다 . 후반에 둘의 애잔한 사랑이 곁들여진 헐리웃 영화 코드에 충실한 그런 영화였다. 한참을 영화에 몰두했다 옆을 보는 순간 은채는 경민이 졸고 있는것을 목격하고 옆구리를 쿡 찌른다. 그러자 경민은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고 그 모습이 우스워 은채는 큭큭 웃는다.


"이럴줄 알았음 청소좀 하는건데"라며 경민은 서둘러 어질러진 자기방을 치우는 시늉을 한다. 그는 학교근처 다가구 옥탑에 살고 있었고 크기는 두평 정도로 협소했다. 그래도 글쓰는 사람답게 책상만은 커다란 걸 놔서 방의 반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둘이 영화를 본 뒤 경민은 '괜찮으면 내 방 구경할래요?'라고 물었고 은채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미 자기 둘다 서른이 넘은 성인들임을 깨닫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설령 같이 자는 일이 벌어진다 해서 이상하거나 지탄받을 일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것이다.




해서 은채는 경민을 따라 그의 옥탑으로 왔고 그가 끓여내온 라면을 같이 먹으며 희희낙락했다. 그러고나자 경민은 상을 물리고나서 곧바로 한팔로 은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 바깥 달은 이젠 만월이 돼있겠지,하고 은채는 생각했다.



그리고 사흘후 '70년대 한국문학' 수업에 은채는 경민이 결석한걸 알게 된다. 웬만해서는 결석이나 지각을 안하는 그가 웬일로 안 나온걸까, 궁금해 은채는 그에게 전화를 걸지만 연결음만 계속되고 그는 받지를 않는다. 지난번 둘이 같이 밤을 보내고 그는 새벽녘 버스가 다니는 시간이 되자 그녀를 정류장까지 바래다주었다. 여전히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고 '춥지?'하면서 그녀의 손을 자기 외투 주머니에 꽂기까지 했다.



왠지 불길한 예감에 은채는 수업이 끝나는대로 그의 옥탑으로 향한다. 혹시나 어디가 아픈건 아닌가 싶어 걱정도 되고 무엇보다 잠자리를 같이 한 다음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해서 그녀는 옥탑 근처 마트에서 맥주와 안줏거릴 조금 사들고 그의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옥탑 벨을 아무리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녀는 전화를 걸어보지만 이번엔 아예 차단을 말리는 기계음이 들려온다. 순간 은채를 스치고 가는게 있다. 여자가 있었어,라던 그의 말이.


그렇게 한시간여를 추위에 문밖에서 떨고 있자니 이것도 못할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은채는 사온 술과 안주를 문앞에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그제야 문이 열리며 '들어와'라는 경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은채는 차가운 밤공기에 얼얼해진 두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그는 은채가 사온 맥주를 꺼내 마시기 시작한다.

"그여자...혹시 지금 학과에 있어?"라고 은채가 직감적으로 물어본다. 그러자 경민은 한참을 말없이 은채를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구나...학과여자였구나..

그렇다면 왜 나를 데려온걸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그녀하고 잘 안된 모양이다, 은채는 그리 생각한다.


경민은 은채보다 한기 위인, 그러면서도 나이는 한참 어린 y를 언급했다. 듣기로는 중문과를 졸업했고 대만에서 유학까지 했다고 한다.

그녀는 마르고 적당한 키에 유난히 얼굴이 하얀, 치열이 고른 , 누가봐도 있는 집 자식임이 드러나는 그런 외모였다. 그런 그와 경민이 두어번 동침을 했다는 이야기를 은채는 듣고 있다. 언젠가 신입생 환영회 때 y가 노래방에서 부른 "월량대표아적심"이 떠올랐다. 결코 잘 부르는건 아니었지만 나름 성의있게 부르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게 그녀의 단골 곡이었던듯, 다른 학생들이 "그거 있잖아. 그거 불러"라고 일제히 요구했고 그녀는 그에 부응하듯 그 노래를 불렀다...

언제 들어도 아련하고 스산하면서 음울한 매력이 있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은채는 y에게 묘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아마도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을거라는 생각도 했던거 같다.



그런 y와 경민이 동침을 했다는것이다. 그것도 두번씩이나. 그러나 그러고나서 y는 무참하게 경민을 차버렸다고 한다. 경민이 결혼이야기를 꺼내자 y는 단박에 거절하면서 "난 글쟁이는 싫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가난은 싫다는 뜻이리라...해서 경민은 은채를 보는게 괴로워 이번 학기를 아예 휴학할 생각까지 했건만 학과책을 만들라는 학과장의 명 때문에 할수없이 등록을 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왜 나를...나한테..." 은채가 울먹거리자 "실수였어"라고 그가 말한다. 은채는 화가 나서 그의 뺨이라도 갈기고 싶지만 애써 참는다. 은채는 남은 맥주를 따서 물을 마시듯 벌컥 벌컥 들이킨다. 그러다 어느샌가바닥에 쓰러진다. 꿈결인듯 경민이 자기의 바지 지퍼를 내리는게 느껴진다. 그리고는 며칠전 그 밤처럼 자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그를 느끼며 그녀는 완전히 잠에 빠진다.



그리고는 새벽녘 취기가 가져온 지독한 두통에 잠을 깼을때 저만치 거리를 두고 잠들어있는 경민을 발견한다. y의 이야기를 해놓고 자기를 안은 그 남자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은채는 싱크대로 가서 라면을 끓이기 시작한다. 어느정도 라면이 다 됐을때 경민이 눈을 뜬다. "안갔어?"라며 그가 조금 퉁명하게 내뱉는다.

그말에 은채는당황스럽다. "난 뭐야. 당신한테 난 뭐야?"라며 그녀는 다 차린 밥상을 놔두고 그의 옆으로 바싹 다가 앉는다 . 그러자 경민은 벽을 보고 돌아누우며 "가 그만"하고 매정하게 내뱉는다. 나쁜 자식...은채는 그를 거칠게 돌아눕힌다 그러자 "에이 씨"하고 그는 다시 모로 돌아눕는다. "얘기좀 해.."라고 하자 그가 벌떨 일어나 앉더니 발로 은채를 밀어낸다. '가. 그만좀 가!"

그런 경민의 행동에 은채는 할말을 잃는다. 취해서 잠든 자기를 범해놓고 이제는 그만 떨어져 나가라는 그가 너무 야비하기만 하다. 그러나 은채의 노여움은 울먹거림으로 대체되고 만다. 그런 은채의 모습에 잠시 놀라는가 싶던 경민은 다시 홱 눕고 만다. 물론 등은 은채에게 돌린채 ."가라고 그만".


은채가 방문을 여는데 "잠깐"하고 그가 불러세운다. 그말에 은채는 마지막 희망을 걸어본다. 하지만 그는,보일러좀 올려. 추워죽겠어,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은채는 벽 귀퉁이에 달려있는 보일러 버튼을 눌러준다. 그리고는 힘없이 방을 나간다.



은채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이른 아침, 어디선가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이 흘러나온다.

" 내 눈물이 말해주네요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내게로 와요. 내손을 잡아주세요.."


https://m.youtube.com/watch?v=9Wp3a2Dnk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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