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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추격전

by 박순영

"못간다고 ? 이제 와서 그럼 어떡해. 난 휴가 냈는데?"

미경은 현철의 전화를 받고 어리둥절하다 못해 화가 났다.

함께 여행을 가기로 약속하고 이러는게 벌써 여러번이다. 그래서 이번엔 여행전 마지막 날까지 회사에 이야기를 하지 않다고 현철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어 ,이번엔 가나보다,하고는 급하게 휴가를 냈고 그덕에 과장에게 온갖 싫은 소리를 다 들어야 했다.

그런데 여행 당일에 현철은 또 일이 생겼다며 못간다는것이다.

미경은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현철은 프리랜서라 얼마든지 일정을 조정할수가 있는데도 이러는건, 아마도 애정이 식거나 미경 자신을 하찮게 본다는 얘길거라는 생각에 아무래도 인연을 정리해야 할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알았으니까 잠깐 봐. 내가 자기 쪽으로 갈테니까"

현철이 극구 오지 말라고 해도 미경은 택시를 잡아타고 부암동 그의 집쪽으로 갔다.

"나랑 해 안해? 결혼 해? 안해?"

그녀는 현철이 자리에 마주 앉자마자 쏘아붙였다.

둘이 함께 한 시간이 5년이 넘어가도록헝혼도 하지 않고 급할땐 돈돈 하면서 끌어다 쓴 미경의 돈도 적지 않다.

미경이 현철을 끊어낼 이유는 열가지, 아니 그보다도 더 많았다.

일단은 불안정한 작가라는 직업, 그에 따른 곤궁함. 그러면서도 미경에게 돈을 타 쓴다는 자의식, 이런것들이 한데 뒤엉키면 그와 관계를 이어간다는 자체가 부조리했다.

그럼에도 미경은 친구나 지인에게 현철을 '약혼자'라 소개했다. 하지만 현철은 미경을 주위에 커밍아웃 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우리 끝내 그만"

미경은 그 뜨거운 레몬티를 후르륵 원샷하고는 혀와 식도를 데고서도 기어코 이별의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고 하잖아. 다음에...다음에 더 근사한 데로 가자. 정말 급히 넘겨야 할 원고가 생겨서 그래"

"급히? 거짓말"

"...간만에 청탁이 들어왔어 지방신문인데"

"돈도 안되는 그런 글만 쓰고...강미경이라는 호구가 있으니 밥걱정은 안한다"이거야?

"야...너, 혀가 빨개"

"내 혀지, 니 혀니?"하고 그녀는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혀를 손수건으로 감쌌다.

"있어봐. 약국이라도 다녀올테니"

하고 현철은 까페를 나가려다 다시 돌아와서

"내가 돈이 없거든?"

"냅둬! 이 그지같은"이라며 미경은 까페를 뛰쳐나왔다.



다시 보나보자, 또 보면 내가 성을 간다,하면서씩씩거리며 빈택시를 잡아탔다. 이대로 양평까지 드라이브라도 갔다올까 하다 그녀는 그냥 사무실로 향했다.

휴가낸 미경이 들이닥치자 그녀를 타박했던 윤과장이 어리둥절해 했지만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업무를 보기시작했다.



그날밤쯤, 현철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지 하고 내심 기다렸지만 미경의 폰은 조용했다.

그래 지도 끝내겠다 이거지? 잘됐어. 내가 너 안 만났으면 얼마든지 번듯하고 잘난 남자 만날수 있었어...

미경은 샤워도 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들었다. 그러고는 한두시간 잤나 싶은데 희미하게 벨소리가 울렸다...

미친 놈....하고 폰을 보자 현철이었다.

"지금이 몇신데 전화질이야?"라고 소리부터 지른 미경이 무안하게도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더니,

"아버님이...시골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그말에 미경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뭐라구...거기 어딘데?"


현철의 부친이 평소 심장이 안좋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그녀는 애써 사인을 묻지 않았다. 그리고 80이 다 돼가는 분이 돌아가셨으니 안할말로 '살만큼 산 셈'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발인까지 미경은 완전히 며느리 노릇을 하며 문상온 친지들에게 학실히 눈도장을 찍었다

"장지는 어디로 정했어?"

"가봐 너는 인제"

"뭐?"

"고생했다.."하고 현철은 그녀를 장지에 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미경은 또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은 일대로 시켜먹고 마지막 절차에서는 자기를 쏙 빼는 그의 속마음은, 다름아닌, 자신을 그저 부려먹는 여자,정도로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 택시를 잡아준다는 현철을 뿌리치고 혼자 장례동을 나와 한참을 걸어 빈택시를 잡아탔다.

이자식, 내가 다시는 연락하나 봐라....

그렇게 씩씩대자, 룸미러로 기사가 훔쳐보기도 하였다.

그래도 한가지 여지는 남겨두고 있었는데 그것은 삼우제였다.

그때는 부르겠지,하고 그녀는 애써 자신을 추스리며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삼우제 당일까지도 현철로부터는 아무 연락이 없었고, 이젠 정말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그 다음날, 현철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나 좀 힘들다 지금"

현철은 노골적으로 귀찮아 하였지만 지금 상대의 기분을 봐주고 말고 할 여력이 없는 미경은 누워있는 현쳘을 일으켜 앉혔다.

"내 돈 내놔. 그리고 다 끝내"

"너 또 왜 그러냐?"

"니가 인간이니? 장레 내내 수발 든게 난데..."

"그래서 장지는 오지 말라고 한거잖아. 좀 쉬라고"

"삼우제엔 불렀어야지. 최소한 내가 니 여자면"

그말에 현철이 빙긋이 웃었다.

"우쭈쭈...그래서 화났쪄?"하고 그녀를 안으려는 현철을 미경은 힘껏 뿌리쳤고 그때문에 현철은 머리를 벽에 쿵하고 부딪혔다.

"나쁜 자식.. 다신 연락하지 마. 그리노 내돈 매달 조금씩이라도 갚아"하고 그녀는 일어섰다. 그런데도 현철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 이거야. 마음조차 없는 거야....나 혼자 설레발을 친거야...


그렇게 미경이 부암동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어서 빈택시라도 잡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잡히질 않아 할수 없이 콜을 해야 했다.

그리고는 5분쯤 후에 그녀가 택시 뒷문을 열고 막 타려는 순간, 안쪽으로 들어가, 라는 현철의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현철이 집에서 입는 옷 그대로 서 있었다. 급히 뒤쫓아온 모양새였다.

그렇게 뒷자리에 나란히 타고 나자 현철은 '기사님 양평요' 라고 말했다.

"당신 돈 있어? 양평이 얼만데"

라고 하자 기사가 "넵"하고는 신나게 페달을 밟아댔다.



"치...그런다고 내가 뭐 바꿀줄 알아? 너랑은 끝났어 인제" 하는데 현철이 슬그거니 미경의 손을 잡아왔다.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못났으면서도 미경은 가만히 있었다...

"너, 돈 있지?"

그말에 미경이 매섭게 현철을 쏘아보았다.

"차비....양평까지 좀 나올텐데"

라는 그말에 미경은 택시를 세우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양평....

둘이 연애 초기에 몇번 왔던..

그것이 둘의 여행의 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들은 퇴근하고 널널한 마음으로 다녀오기도 한다는 양평을 둘은 '지지고 볶은'다음에나 온 것이다.

"나, 소개 받기로 했어. 편의점 하는 남잔데"

"어유, 그러셔? 내가 봐줄까? 남자는 남자가 아는데?"

"이걸 콱 그냥!"

미경도 알고 있었다. 이 정도의 거짓말에 현철이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내 여자'라 하지 않아도 이미 미경은 '그의 여자'가 다 돼있기 때문이다.


"인제 고아네? 아버님도 가시고"

흐르는 강을 마주한 덕분인지 미경이 분이 풀려 애틋하게 말했다.

"다 고아되는 거지. 아버님 생전에 너 인사시켰어야 하는데"

그말에 미경은 멈칫했다...그리고는 어둠이 내리는 수면위로 만들어지는 나무 그림자를 응시했다.

"좋다 여기..."

그러자 현철이 그녀의 어깨에 한팔을 둘렀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갈까?"

그말에 미경은 본능적으로 물었다.

"돈 있어?"



그렇게 숙박비를 미경이 내고 그날밤 둘은 강이 내다보이는 펜션에서 1박을 하기로 하였다.

펜션은 세평 남짓했지만 더블 베드에 주방과 욕실이 딸린 그런대로 구색을 갖춘 알뜰한 공간이었다.

인근 마트에서 간단한 장을 봐서 미경은 직접 저녁을 준비했고 침대에선 현철이 비스듬히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호박을 썰어 된장찌개에 넣던 미경이 뒤를 힐끔 돌아보고는, '결혼의 풍경'이란게 아마도 이러지 싶었다...

그렇게 단출하나마 그런대로 먹을만한 저녁을 함께 하고 샤워를 하고, 그렇게 둘은 한 침대에 들었다. 그러고보니 둘이 잠자리를 같이 한 게 한참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미경은 심술이 났다. 그런 미경이 투정을 부리기도 전에 현철의 코골이가 시작되었다. 미쳐 내가...여기까지 따라온 내가 미친년이다...하고 미경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그렇게 펜션의 창밖이 훤히 밝아올 즈음, 현철은 잠에서 깼고 미경을 찾았다. 그러나 주방에도 욕실에도 펜션 밖에도 미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데 문자 알람이 들려왔다. 미경이겠지,하고 폰을 확인한 그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조심해서 올라오구, 택시비는 당신 베개 밑에 넣어뒀어. 잘 살아"

미경은 이별의 말을 남기고 간 것이다. 그것도 택시비를 남기고...




한달후 미경은 윤과장의 소개로 동창이라는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s를 호텔 커피샵에서 소개 받게 되었다.

남자는 편의점을 운영한다고 하였다. 그말에 미경은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자신이 현철에게 둘러댔던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철에게로 생각이 가 닿자 그에 대한 그리움이 복받쳐 올랐다.

양평에서 그렇게 올라온날 현철은 하루에도 수십통씩 전화와 문자, 심지어는 집까지 찾아왔지만 미경은 매몰차게 그를 거절했다.

현철과 사는게 팔자라면 팔자를 바꾸겠다는 그녀의 굳은 결심을 아무도 말리지 못한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명함을 내밀며 언제든 놀러오라고 하였다. 그말인즉슨, 에둘러 에프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 미경은 이 모습을 현철이 보기라도 한다면, 하는 상상을 하며 으쓱해졌다. 그리고는 그 명함을 받아 가방속에 넣는데 "어? 너 밥 안하구 여기서 뭐하고 있어?"라는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아는. 징글징글한 현철이 또 출몰한 것이다.

그렇게 소개팅은 파투가 났다.


"다신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지?"

"그래서 나도 오늘 소개팅하러 온거야"

그말에 미경은 살짝 질투가 끓어올랐다.

"어딨어. 여자 어딨어!"하고 미경이 두리번거리자

"내 앞에 있잖아..."

"너,이젠 나 미행까지 하니? 대박이다"

그순간 현철이 주머니에서 싸구려 반지를 꺼냈다.

"결혼하자 우리 .싸우는데 지치면 결혼한다고 하잖아"

미경은 그말이 끝나자마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좋아?"

"좋아서가 아냐. 이 나쁜놈..."하고 그녀는 커피샵을 뛰쳐나갔고 그뒤를 현철이 뒤따랐다.


밖엔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경은 한손을 내밀어 내리는 비를 맞았다.

"대답해야지. 내가 청혼했는데"

"미쳤니? 내가 너랑 결혼을 왜 하니?"

하고 그녀는 줄지어 서있는 택시 정류장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더니 "따라오기만 해봐!"라고 엄포를 놓았다.

현철은 물끄러미 택시에 타는 미경을 쳐다봐야만 했다.

미경을 태운 택시는 보란듯이 현철을 지나쳐 호텔 출구를 빠져나갔다.

곰곰 생각에 잠겼던 현철이 결심을 굳혔는지 재빨리 다음 택시에 올라탔다.



그렇게 비오는 도심에선 영화에나 나올법한 두대의 택시가 추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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