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요즘 이상해. 무슨 일 있어?"
경혜는 민혁의 물음에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다.
늦여름이라지만 아직도 더위의 기세는 대단해서 행인들은 온통 지친 모습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뭐가 문젠데? 왜 부모님한테 가자는데 자꿔 미뤄?"
"급한거 아니잖아"
"급...야,결혼하려면 당연히 부모님은 뵈야지. 아무리 돌아가셨어도"
"천천히...천천히 가자. 나 귀국한지 얼마 안됐잖아. 적응좀 하고"
"너 고작 3년 갔다왔어. 누가 들으면 한 30년 살다 온 사람 같다"
민혁은 불퉁하게 내뱉었다.
파리...
그 어렵다는 프랑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경혜는 귀국해서 곧바로 모교 강의를 맡았다.
민혁의 말대로 고작이라면 고작인 3년의 해외체류를 마치고 와서 적응 어쩌고 하는게 우습기도 하였지만 왠지 한국이 먼 타국같기만 하고 그렇다고 다시 파리로 돌아가긴 죽어도 싫었다.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안식처는 없어보였다.
"우리, 겨울에 결혼하자"
그렇게 민혁과 어색하게 헤어지고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간뒤 경혜는 잠을 이루지 못하다 새벽에 문자를 날렸다. 민혁은 곧바로 문자를 확인했고 전화를 걸어왔다.
"뭐야... 여자가 청혼을 하고 그래!"라면서도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너 뜸들여서 니 몸값 올리려는 수작이었구나!"라고 민혁이 허허 웃었다.
겨울이라고 애둘러 얘기했지만 이른 겨울부터 초봄까지 그 시점은 잡기 마련이었다.
그 이후로 민혁은 서둘러 결혼준비를 해갔다.
"남자가 좋아서 하는 결혼이 좋다잖아"
주위에선 그렇게들 이야기했다.
아닌게 아니라, 여자가 매달리는 것보단 그래도 남자쪽이 몸이 달아 하는게 낫다는 생각을 경혜도 하고 있었다.
"오늘 회사 앞으로 와. 예물 맞추러 가자"
민혁은 아예 예물을 맞춤으로써 이 결혼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듯했다. 어차피 할 결혼이라면 경혜도 괜히 빼고 말고 할 이유가 없어 개강 준비를 서둘러 마치고 민혁의 회사가 있는 강남으로 향했다.
택시 기사는 퇴근 시간 강남 가자는 말에 조금은 짜증을 냈지만 생각보다 교통체증은 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민혁의 회사 앞 까페에서 그를 기다리는데 웬 금발에 키가 훌쩍한 한 남자가 저만치서 혼자 커피를 마시는게 눈에 들어왔다. 직감으로는, 그가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파리의 어느 까페를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 남자가 경혜를 향해 손을 살짝 들며 웃어보였다. 경혜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봉쥴"하고 응대했다. 그러고나자 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여긴 파리가 아닌데...
처음 파리생할을 시작할때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도 서로 가볍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 받는걸 보고 경혜는 무척 낯설어하였다. 하지만 3년간의 유학시절, 그녀 역시 그들을 닮아갔다. 그러자 까페 안 저 남자가 어쩌면 프랑스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순간, 그의 적당한 길이의 금발이 눈을 끌었다. 그때 민혁이 경혜의 어깨를 툭 쳤고 그녀는 금발에게서 눈을 돌렸다.
"가자 얼른"
"차라도 마시고 가"
"이따 마시면 되지."
"그래도 들어왔는데 미안하잖아"
그렇게 민혁을 끌어앉혀 함께 차를 나눠 마시면서도 경혜의 시선은 자꾸만 금발에게로 향했다. 이끌림..묘하게 그가 경혜를 끌어당겼다. 그는 연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름후 경혜는 금발의 남자와 불문학과장실에서 재회했다.
학과장 s는 금발을 '미셀'이라고 소개했다. 이번에 교환강사로 왔다고 했다.
그렇게 경혜와 미셸은 악수를 나눴고 지난번 까페에서의 일을 복기했다.
그는 언제 배웠는지 꽤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 그래도 어색한 부분은 경혜가 바로잡아 주었고 그렇게 둘은 연인처럼 가까워졌다. 하지만 왠지 민혁에겐 해서는 안될 얘기같았다. 남자 이야기여서가 아니고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뭘까?
경혜도 학위를 마치면 돌아가서 곧바로 민혁과 결혼을 할 생각이었다. 그 일만 없었어도..가능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경혜는 이따금 깊은 우울감에 빠져 힘들어하곤 했다.
"한국사람들, 죄다 화가 난거 같아. 내가 인사하면 기분 나쁘게 쳐다봐"
어느날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경혜에게 미셸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말에 경혜가 풉,하고 웃었다
"그냥 문화가 다르다고 생각해. 너 싫어서 그러는거 아냐"라고 대답을 해도 미셸은 믿지를 않는 눈치였다.
학과장의 지시에 경혜와 미셸은 함께 커리큘럼을 짜고 강의 내용도 공유하면서 더욱 더 친밀한 사이가 돼갔다.
"나랑 사귀자"고 미셸이 운을 뗀건 가을을 알리는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구내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나오는데 불쑥 미셸이 경혜에게 구애를 한것이다.
"나 결혼할 사람 있어"라는 경혜의 말에 미셸은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겨울에 해. 아마 방학하면 곧바로 할거 같아"라는 말에 미셸은 마음을 다잡는 기색이었다.
둘은 도서관 로비에서 자판기 커피를 나눠 마시며 파리 이야기로 넘어갔다.
미셸도 결혼할 여자가 있었는데 한국에 오기 직전 헤어졌다고.그래서 마음이 아직도 시리고 아프다고.
서양인 특유의 개방적인 태도와 매너는 고지하고 보수적인 민혁과 뚜렷이 구별되는 부분이었다. 경혜는 가끔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민혁과의 결혼을 무를수만 있다면... 하지만 민혁은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청첩장을 박았고 일부는 모바일로 보내버린 뒤였다.
"내가 어디 도망가?"
"응. 도망갈거 같아서 소문낸다 왜"
그러면서 민혁은 경혜를 안았다. 익숙한 그의 몸이었지만 파리에 다녀온 후 경혜는 그의 몸이 낯설고 무섭기까지 했다...
"경혜. 결혼선물로 뭐 해줘?"
어느날 미셸이 텅빈 운동장을 바라보며 옆의 경혜에게 물었다. 그날따라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그의 금발이 더더욱 아름답고 눈이 부셨다.
"그냥 와. 미셸 오는게 선물"이라고 하자 미셸은 "한번 안아봐도 돼?"라고 수줍게 말했다.
그말에 경혜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셸은 살포시 경혜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렀다. 이남자와 살수 있다면....그 기억을 모조리 지울수 있을텐데,라는 회한이 경혜를 서글프게 했다.
미셸이라면, 그 모든 허물과 아픔을 보듬어 줄수 있을텐데...
"약혼? 난데 없이?"
어떻게든 민혁과의 결혼을 미루고 싶어진 경혜는 어느날 불쑥 약혼을 언급했다.
"야, 요즘 세상에 무슨...꼭 하고 싶어?"
그말에 경혜가 애원하는 눈길을 보냈다.
"그럼 결혼이 늦어지잖아. 아니다. 약혼 다음날 결혼하면 된다"라고 민혁이 농을 했다.
"겨울에 약혼하고 초봄에 결혼하자. 아님 5월 장미 필때 하든가"
"너, 나랑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해?"
그말에 경혜는 얼른 대답을 해서 민혁을 안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미셸, 인사해.. 내 피앙세"
그말에 미셸은 민혁을 보며 마지못해 미소를 지었다.
본능적 라이벌 의식에 젖어 민혁도 마지못해 웃어보였지만 어디까지나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갑자기 미셸은 민혁이 있는데도 스스럼 없이 경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풀어진 자세를 취했다.
"파리에선 친구 사이에 이래 그냥"
경혜가 미셸을 두둔하자 민혁이 벌컥 화를 냈다.
"여기가 파리야 여기가 유럽이야?"
그말에 미셸이 움찔하며 경혜에게서 팔을 거두었다.
"데졸레"
미셸이 사과를 했다.
"저새끼 뭐라는거야?"
민혁이 사납게 미셸을 쏘아보았다.
"미안하대. 민혁씨 그냥 넘어가자. 문화차이 때문인데..."
"너 파리에서 이러구 지낸거야? 아무놈이나 껴안고 볼키스하고 팔짱끼구...잠은 안잤냐?"
"민혁씨!"
민혁은 화가 잔뜩 나 레스토랑을 나가버렸다. 당황한 미셸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속 '데졸레'를 연발했다. 순간, 그동안 길어진 그의 금발이 경혜의 눈을 끌었다.
그때도 그랬다. 데졸레라고...
늦은 시각, 학교도서관을 나와 경혜가 자신의 원룸으로 향하던 날이었다. 갑자기 떨어진 기온에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으슥한 좁은 골목을 지나고 있었다...그때 저만치 담뱃불이 보였고 이어서 금발의 한 남자를 보았다. 옆모습이었지만 경혜는 왠지 두려운 마음에 최대한 그와 거리를 두고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그가 경혜의 팔을 잡았고 "농!"이라고 애원하는 그녀를 담벼락에 밀어부쳤다. 그리고는 그녀를 범했다. 그리고 한 말, 흐느끼는 경혜에게 했던 말이 '데졸레'였다...
"너지?"
경혜가 두눈을 부릅뜨고 부들부들 떨면서 그를 몰아세웠지만 미셸은 영문을 몰라했다.
"니가 날....그날 니가 날..."
그러고는 경혜는 미셸의 뺨을 휘갈겼다.
"바따르"
그말에 미셸이 얼얼한 자기 뺨을 문지르며, "빠르동?"하고 되물었지만 경혜는 그를 놔두고 레스토랑을 나가버렸다.
잊으려 해도 도무지 잊혀지지 않던 그날의 기억이 낱낱이 떠올라 경혜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다음날 새벽, 민혁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 경혜는 이미 손목을 그은 뒤였다.
응급실에 실려가는 앰불런스 안 경혜의 귀에 파리의 그 노래가 들려왔다. 밀렌 파르메르의 "후회"가....
Mylène Farmer, Jean-Louis Murat - Regr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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