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안의 사랑>

그러다 저만치 두번째 버스가 온다. 이번엔 타자.

by 박순영

우영에게선 연락이 없다. 미향이 아는 한 오늘 그는 촬영이 없다. 그럼에도 전화를 해오지 않는다.

“이천 갈 때 내가 운짱해줄게”라고 그는 약속했다.

우영을 처음 만난건 미향이 패션 에디터로 입사하고 1년쯤 지난 때였다. 당시 음료 광고 서브 모델로 막 뜨기 시작한 우영은 화보섭외가 들어가자 매니저대신 자신이 직접 답을 주는 성의를 보였다. 그렇게 해서 둘은 만났고 거의 하루 종일 이어진 화보 촬영이 끝나자 우영은 같은 방향이라며 미향을 자기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미형보단 세 살이나 어렸지만 우영은 어렵게 배우가 된 만큼 진중하고 책임감도 있어보였다. “길거리 캐스팅이라면서요?” 미향이 묻자, “아뇨, 기사만 그렇게...오디션만 100번 이상 본걸요”하며 수줍게 털어놓는 우영이 어딘가 친 동생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둘은 일로 자주 만나게 되고 우영은 연속극 단역을 거쳐 일약 미니시리즈 남주로 발탁되었다. 그즈음 둘은 제법 가까워져 이른바 ‘몰래 데이트’라는 걸 종종했고 조금만 기다려주면 누나 내가 데려갈게,라며 우영은 해맑게 웃곤 했다. 하지만 우영의 스케줄은 점점 더 살인적으로 변해갔고 둘사이가 잠시 소원했던 적도 있다.

미향은 일로 자주 접하는 포토그래퍼 황.과 짧고도 거친 연애를 했고 우영은 새내기 탤런트 윤.과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둘은 다시 만났고 다시 만난 우영은 더 이상 감독눈치나 보는 신인 배우가 아닌 ‘몸값’을 요구할 만큼의 대세배우로 자리잡았다. 우영의 도시적이고 댄디한 인상은 인근 아시아권에서도 인기몰이를 했고 해당 소속사는 한류스타로 우영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자 우영은 자연스레 외부노출을 자제하게 됐고 미향이 그의 집으로 가서 만나게 되는 일이 잦았다.


어느날 미향이 인천호국원에 매장돼있는 조부의 성묘를 못간지 오래 됐다고 하자 “잘됐네, 가서 인사도 드리고”라며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미향은 아직 차가 없다. 워낙 겁이 많은데다 부모가 모두 교통사고로 간 트라우마가 있어 운전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우영과의 관계가 확고해져 결혼이 확정되면 당연히 부모대신 자기를 키워준 조부에게 인사시키겠다 맘먹고 있던 터였고 흔쾌히 우영이 받아들여 둘의 결혼은 암묵적 동의 단계에 들어간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우영이 요즘 와서 미니시리즈에서 함께 연기한 송.과 가십거리에 오르내리고 있다. 미향이 물으면 그냥 친구야,라고 나이브하게 대답할뿐 그의 태도는 점점 모호해졌다. 미향이 문자를 보내면 분명 ‘읽음’표시가 떠도 답이 늦거나 아예 안오는 일이 빈번해졌고 어떤때는 아예 읽지조차 않는 경우도 있었다. 끝난건가, 하고 미향이 결별의사를 밝히면 우영은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그녀를 놓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송.과의 염문은 거의 매일 뉴스 연예란에 떠다녔다.


우영은 한참전에 받은 그의 명함을 서랍 깊숙이에서 찾아낸다.

“제가 싸게 모실게요. 가실 때 연락주세요”라며 웃던 미향 나이 정도의 젊은 기사였다. 언젠가 택시를 탔다 이천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할아버지가 참전군인이셔서 그곳에 안장됐다고 하자 수혁은 자기 외조부도 그곳에 계시다면서, 인연이네요,하며 반가워했다 . 그때 우영은 대중교통으로 가기가 넘 불편하다고 토로했고 그러자 수혁은 그럼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개인택시라 언제든 시간을 낼수 있다며 명함을 준 것이다. 그가 부른 금액은 초라할만큼 적었고 이걸로 되시겠냐고 묻자 흔쾌히 된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미향을 스친다. 미향은 잠시 생각하다 먼저 우영에게 전화를 건다. 이번주 일요일 시간 되냐고. 그러자 우영은 지금 캐스팅 전화를 기다리는 중이라며 나중에 연락하마 하고 끊는다. 여배우 송.과의 문제도 언급하려던 미향은 그것만은 참기로 한다. 놓지도 잡지도 않는 남자.


그렇게 해서 미향은 수혁에게 전화한다. 자기를 기억하냐고. 하자 수혁은 그럼요,라며 반가워한다. 그 주말, 그렇게 해서 미향은 수혁의 차를 타고 이천으로 향한다. 무슨 일 해요? 내가 보기엔 기자님? 하고 거의 근사치로 수혁은 미향의 직업을 맞춘다. 비슷해요. 패션 에디터...멋있네 듣기만 해도. 수혁이 빙긋이 웃는다.

주말임에도 길은 막히지 않고 수혁은 신나게 페달을 밟아댔다. 남친 있어요? 수혁이 조금은 도발적으로 물어온다. 미향은 이미 유명인이 된 우영이어서 조심스럽다. 해서, 있어요, 근데 좀 어려요 저보다, 라고만 대답한다. 부럽다. 난 없는데...라며 수혁이 조금 침울한 표정이 된다. 그러면서 어느 대학생과의 짧고도 강렬한 연애담을 쏟아놓는다. 역시 승객과 기사로 만나 싹튼 사랑이었고 둘은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까지 생각했었다며.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그녀의 결별통보였다고. 내가 못나서...라며 수혁이 우울해한다. 미향은 뭐라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다.

그렇게 한시간 반을 달려 둘은 이천 호국원에 도착하고 수혁은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잘 뵙고 오라고 당부한다. 그래서 미향은 오랜만에 조부가 안장된 18구역 언덕길을 오르게 된다. 그렇게 20여분 언덕을 올라가 18구역 맨위쪽에 안장된 조부의 납골당을 여는 순간, 미향은 가슴이 뭉클해온다. 부모나 다름없는 조부를 너무 오랜만에 찾았다는 자책이 밀려든다. 조모는 나이 60도 되기전에 암으로 세상을 떴고 조부는 남자 홀몸으로 미향을 거뒀다.

“할아버지 나 왔어....보고 싶었어?” 하자 미향의 두뺨으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린다. 납골당 유리에 한참 이마를 대고 있다 “자주 올게”하며 미향은 이동 사다리에서 내려온다.

수혁은 차 밖에 나와 미향을 기다리고 있다. 잘 뵀어요? 수혁이 미향의 퉁퉁부은 눈을 보며 물어온다. 그말에 미향이 답하지 못하자 ,할아버지가 좋아하셨겠네,라며 조수석 문을 열어준다. 그렇게 둘은 다시 서울로 향하고 수혁은 미향을 진정시키고싶었는지 음악을 켠다. 이거, 그 친구...그 대학생친구가 링크로 보내준건데...하며 볼륨을 높이자 아르보 페르트의 “미러인더미러”가 흘러나온다. 순간 미향은 깜짝 놀란다. 언젠가 우영 역시 문자에 이 음악을 걸어 보내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거의 10여분의 긴 곡이고 첼로의 조금은 구슬픈 음색이 인상적인 음계로 진행되는 음악이었다.

아시나봐요? 수혁이 미향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낸다. 실은 남친이...그러면서 결심한 듯 우영의 이름을 말한다. 텔런트? 하고 수혁은 금방 반응한다. 이 남자한텐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돼 미향은 다 털어놓기로 한다. 지금 애매한 둘의 관계까지...그러자, 양다린가보네, 하며 수혁이 내뱉는다. 그러나 이내 웃음을 거두고, 미안합니다, 하고 사과한다. 그리고는 둘은 10여분을 아무 말없이 달리기만 한다. 아닐수도 있잖아요...배우들, 관심 끌려고 일부러 스캔들 내기도 한다는데...라며 그는 말끝을 흐린다.



하지만 미향은 알고 있다. 가짜 스캔들이 아님을. 그럼에도 우영은 저울질 하는 것이다. 암묵적 결혼에 동의까지 해놓고 우영은 다시 ‘선택’을 하려는 것이다. 수혁은 잠깐 밥좀 먹고 갈까요? 내가 배고파서...라며 씩 웃는다. 그제야 미향은 우영의 생각을 거두고 밖을 본다. 어느새 차는 휴게소에 진입하고 있다. 내가 냅니다, 수혁이 미향을 자리에 앉히고 음식을 주문하러 간다. 왠지 그의 뒷모습이 우영과 닮았다고 미향은 생각한다.하지만 우영의 생각을 끊는다. 그런데 하필 그때 벽걸이 TV에 우영의 모습이 나온다. 대하 드라마에 캐스팅 됐다는 내용이다. 그순간, 미향은 어쩌면 자신이 우영에게 방해가 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빠진다. 내가 배켜줘야 하나...그러고 있는데 2인분의 가락국수세트를 담아 수혁이 자리에 앉는다. 나 우동 좋아해요.하고 수혁이 먼저 먹기 시작한다. 어릴 때 부모님과 수영장에 가서 늘 먹곤 하던거라며 그때 생각하면 행복해진다고. 그러면서 그는 쉴새없이 면발을 흡입한다.


둘은 그렇게 휴게소를 나와 다시 서울로 향한다. 수혁이 다음에 또 불러도 된다,며 웃는다. 수혁이 부르는 값이면 힘들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미향은 그러마,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미향의 집앞에 도착한 수혁은 즐거웠다고, 마치 데이트라도 한 양 좋아한다. 이 남자,해맑다. 미향은 생각한다. 다음에 또 전화드릴게요. 하자 차에 오르던 수혁이 힘들면 언제든 전화하라 , 한다. 그말에 미향이 고개를 갸웃하자, 내가 전화해도 됩니까?라며 수혁이 물어온다.순간 미향은 당황하지만 미소로 답을 대신한다. 만남은 어디서든 어떤 방식 으로든 생길 수 있지않은가.


그날밤 늦게 우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다음주말에 시간이 된다며 조부에게 가자고 그는 말한다. 미향은 송.의 이야기를 묻고 싶지만 애써 참는다. 그러면서 오늘 다녀왔다고 하자 우영은 내가 갔어야 하는데,라며 아쉬워한다. 이렇게 전화를 끊었다가는 또다시 기약없는 이별이 될까봐 미향이 한마디 한다. 우리 여전한거야? 하자 우영이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는 기사에 나는거 다 믿는거 아니지?라며 천진하게 대답한다. 그리고는 다음주말, 둘은 만나기로 약속한다. 미향은 우영의 말을 믿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주가 돼도 우영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다. 미향은 문자를 보낸다. 우리 만나기로 했는데 잊은거야?


하지만 그 문자는 오랜시간 읽히지 않는다. 다음날 퇴근하고 막 회사를 나서는데 웬 택시 한 대가 미향 앞에 와서 멈춘다. 뭐지? 하던 미향은 차 안에서 내리는 수혁을 알아본다. 여기 다닌다고 해서....마침 집에 들어가던 참이라. 수혁은 수줍게 웃으며 다가온다. 다음 이천갈 때 연락하기로 해놓고 그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미향을 보러 온 것이다. 이 남자 날 좋아하는구나, 미향은 알아차린다.

미향은 그의 차에 오른다. 오늘 저녁 사줘요. 나, 썰고 싶은데. 어디가 맛있어요?라며 목적지를 물어온다. 미향은 대학로부근 스테이크집이 떠오른다. 그러고는 혜화동,하다 숨을 고르고 대답한다. 잠시만요..하고는 스케줄을 확인하는 척하다, 미안해요. 일이 남았는데 모르고. 내일, 연락드리면 안될까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수혁의 얼굴이 굳어진다. 내가 택시기사라서...라며 낮게 그가 말하는게 들려온다. 그게 아니고..라고 미향이 말하자, 알겠습니다. 연락 꼭 주세요. 라며 그가 대답한다.


그의 차에서 내려 미향은 다시 회사로 향한다. 막 입구를 들어서는데 수혁이 출발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미향은 다시 몸을 돌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우영에게 전화한다. 하지만 그는 전화받지 않는다.

미향이 타려는 버스가 저만치 온다. 미향은 버스 번호를 유심히 보다, 첫차는 그냥 보내기로 한다. 그렇게 첫차를 보내고 미향은 정류소에 비치된 의자에 앉는다. 급할거 없다고 생각한다. 저마다 계산하고 따지고 저울질 하는 세상에서 자기만 순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수혁의 전화번호를 자기 전화에 저장한다. 그러자 저만치 두 번째 버스가 온다. 이번엔 타자, 하고 미향은 승차권을 꺼내 승차 준비를 한다. 버스는 미향의 바로 앞에 와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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