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의 잔상>

아,숨은사랑이었나 보다

by 박순영

현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온건 2년만이었다. 그와는 단막극을 두편 같이 한 사이였다. 효진이 그이후 6.25특집 10부작에 들어가면서 다소 소원해졌지만 그래도 간간이 연락을 해와 식사정도는 같이 했었다. 그러다 현수가 미니시리즈에 투입되면서부터는 좀처럼 시간을 내지못해 못만난게 2년이었다.

효진은 그러나 특집극 극본을 6부까지 써서 넘겼지만 윗선에서 작가교체를 해버려 고료를 한푼도 받지 못했다.이유는 정서가 약하다는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먼저 계약을 했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제 막 작가로 발을 들인 신입들치곤 계약하고 작품을 하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아무튼 현수와는 어찌어찌 두편을 같이 했고 그러다보니 PD중에선 제일 친분이 있었다. 현수의 미니시리즈는 중박정도의 양호한 점수를 냈고 그래도 아는 PD라고 효진도 가능하면 그 프로를 챙겨봤다. 좀 까탈스럽지만 나름 의리도 있고 효진에게만은 잘 대해주는 현수였던지라 그렇게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일단 방송일이 끊어지자 효진은 막막했다. 나이 30에 일반 회사에 취직하기도 쉽지 않았고 한다해도 조직생활을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구인광고지를 들추다 효진은 집 근처 보습학원에서 영어 강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접한다. 그제야 새삼 자신의 전공이 영어였음이 기억난다. 그래서 효진은 이력서를 제출하기 전에 기초문법책을 먼저 보고 문자로 간단한 이력을 적어 원장 휴대전화로 적힌 번호로 보냈다. 이렇게라도 버티자. 그러다 보면 다시 방송에서 불러주리라 생각하면서. 그리고는 하루가 지나자 학원이라며 원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면접을 보자고 했다.



그렇게 효진은 걸어서 30분 거리 보습학원 영어일을 하기로 약속했다. 원장은 주의점 몇가지를 알려주면서도 “잘하시겠지요”하고 믿는 눈치였다. 효진은 한동안 일을 쉰 터라 약간은 긴장된 상태였지만 마음을 다잡고 돈을 벌기로 작정했다.그러면서 틈틈이 극본을 쓰리라 마음먹었다.요즘은 주로 외주 제작사에 투고한다고 누군가로부터 들어 이미 투고할 외주제작사 명단도 이미 뽑아놨다.


현수의 전화목소리는 다급했다. 원고가 펑크났다며 써둔게 있음 좀 보여달라고 했다. 작가는 물론 연기자, 심지어 연출까지 이미 극에 투입된 후라도 언제든지 교체될수 있었다. 그러나효진은 딱히 보여줄 원고가 없었고 그리 말하자 현수는 “작가님 빨리 쓰니까 내일까지 좀 부탁한다”고 매달렸다.

하필 효진은 다음날부터 학원일을 하기로 돼있어 난감했지만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방송일이라 생각돼 알겠노라 대답학고 원장에게 일을 못한다고 이야기했다. 당연 원장은 붙같이 화를 내며 사람이 그렇게 신의가 없음 안된다,고 꾸짖고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효진은 면접때부터 자신을 믿어준 원장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죄지은 기분이었지만 다시 방송일이 코앞에 걸려있는데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효진은 현수의 말대로 원고쓰기가 빠른 편이었다. 70분 단막 정도는 구상 시간 빼고 서너시간이면 후딱 써대는 나름의 능력이라면 능력이 있었다. 어디 되나보자, 하고 현수가 요구한 도시남녀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컨셉으로 한시간 정도 구상을 마치고 쓰기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새벽 4시, 현수에게 문자를 날린다. 다 썼다고. 그러자 현수는 , 역시 스피드하나 대박!이라며 답문을 보내온다. 그러면서 어서 자기 이메일로 원고 송고를 부탁했다. 그렇게 원고는 효진의 손을 떠나고 남은건 그것이 그림으로 형상화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아침무렵 현수는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좀 보자며. 노트북을 갖고 오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렇게 효진은 2년만에 방송국 로비를 찾는다. 여기저기 TV 에서나 볼수 있는 얼굴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다. 아, 얼마나 ‘재입성’을 원했던 곳인가, 하며 효자은 감개무량하다. 현수는 약속시간에 딱 맞춰 로비로 나온다. 그리고는 예전처럼 자판기에서 커피 두잔을 뽑아 효진에게 온다.


“작가님 하나도 안변했네”하며 한잔을 효진에게 건넨다. 설마요, 하는 효진의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현수는 원고를 뒤적인다. 그러는 현수의 얼굴이 어둡다.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던 지라 효진은 걱정에 싸인다. 현수가 말을 잇는다. 좀 쉬셔서 그런지 이야기의 동력이 떨어지고 그러다보니 매력도 떨어진다고. 예전같음 효진도 자기 주장을 펼쳤겠지만 왠지 그럼 이모든게 수포로 돌아갈거같다는 생각에 온전히 그의 말을 듣기로 한다. 어떻게 다시 하게 된 방송일인가, 게다가 학원일까지 포기하고 잡은 기회였다.


현수는 작가실 귀퉁이에 효진의 자릴 잡아주고 2시간 이내로 수정해달라고 말한다. 효진은 현수가 빨간펜으로 적어놓은 수정사항을 봐가면서 있는대로 속도를 낸다. 죽기살기로 해야한다는 생각만 한다. 그렇게 해서 2시간에 걸쳐 최대한 수정한 원고를 현수에게 전달한다. 그러자 현수는 댁에 가 계심 연락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효진은 방송국을 홀가분하게 나와 택시를 잡는다. 집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음에도 왠지 조금은 자축하는 기분을 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효진이 집에 도착해 기름에 절은 머리부터 감는데 전화가 울린다. 샴푸 거품을 걷어내며 효진은 전화를 받는다.


“미안해요 다음에 하죠” 현수는 착 가라앉은 음색으로 운을 뗀다. 그럼...다음에요. 원고 없다고 하셔서...미안합니다. 하고는 현수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는다. 효진은 그제서야 방송판이란게 무한한 대안을 가진 곳임을 상기한다. 신인작가들은 속된말로 ‘밥’에 지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꿇으라면 꿇어야 하는. 다른 누가 또 쓰고 있었구나, 그제야 자신의 순진함에 통탄한다. 하지만 효진은 화가 복받친다. 지금좀 보자고 말한다. 현수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지금 바쁘다고 답한다. 그래도 좀 보자고...

그렇게 효진은 집근처 까페에서 현수를 만난다. 현수는 있는대로 불쾌한 얼굴로 20분이나 늦는다. 다음에 하자는데 그거좀 못봐줘요? 현수는 귀찮다는 투로 말한다.

“그래도 김PD님이니까 믿고 한거예요”

“그거야 나도 알죠. 하지만 글이 안좋은걸...”하며 그는 물을 들이킨다.



그런 그를 보며 효진은 학원일 언급은 안하기로 맘먹는다. 그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이거 하심 시리즈로 다시 돌아가시는거 아닌가요?” 하자 “그럼 미니 같이 하면 되지”라며 현수는 선심쓰듯 말한다.

효진은 더는 그와 할 말이 없다고 느껴 먼저 일어난다. 그러나 까페를 먼저 나간건 현수였다. 바쁘긴 바쁜가보다, 하며 효진은 멀어져가는 그의 차를 본다. 그렇게 효진은 방송일을 다시 포기한다. 역시 안되는 곳이었다, 생각하면서.

그리고는 다시 강사자릴 알아본다. 그러나 나이 서른은 많다는게 대부분의 대답이었다.딱히 경력도 없으시네,라며 덧붙인다. 효진은 구인지를 치우고 잠을 청한다...


그리고는 잠깐 꿈을 꾼것도 같다. 몽롱하게 전화벨이 울린다. 현수였다. 혹시 내 원고로 다시 간다는건가, 하는 기대감에 효진은 상기돼서 전화를 받는다. 그러자 현수는 효진의 이메일로 원고 하나를 보냈는데 손좀 보라고 한다. 효진의 원고를 까내고 받은 그 원고마저 맘에 안든다는 이야기로 효진은 이해한다. 효진은, 미안하다, 며 전화를 끊으려하지만 현수는 끈질기다. 이번 공모작간데 구성 하나 보고 하려고 했는데 연애 심리를 너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그 까페로 오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효진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현수는 30분 뒤 정확히 조금전 그 까페로 들어선다.

“내 얘기좀 해줄게요”라며 그가 자신의 연애담을 털어놓는다.


효진은 묘한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현수는 말을 이어간다. 한여자를 대학때 유럽 배낭여행 갔을 때 만났는데 첫눈에 맘에 들어 나머지 일정을 같이 한 뒤 귀국후 만나기로 했는데 그 이후로 연락이 안된다며 얘기한다. 같이 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안 잊혀진다고. 차라리 잠이라도 같이 잤더라면 덜했을거라고 현수는 고백한다. 그러면서 남은 커피잔을 비운다. 그순간 효진의 마음이 동요한다. 이 남자가 못잊는 여자가 있구나...



그리고는 현수는 자신의 연애담 몇가지를 더 얘기하고 참고해서 수정을 부탁하고 까페를 나간다. 효진은 하루가 정신없다고 느낀다. 2년만의 방송복귀라고 생각했던게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지금은 타인의 원고 수정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도 현수의 연애담을 참고하면서...효진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 원고에 손을 댄다.


왜 저마다 잊히지 않는 한사람씩 품고 사는걸까...효진에게도 그런 한 사람이 있다는걸 새삼 깨닫는다. 잠시 스쳤던 완. 그와는 당일 부산 여행을 다녀온게 다였다. 그러더니 완.은 말했다. 약혼자가 있다고. 그와 함께 올랐던 태종대가 일순간 무너져내리는거 같았다. 그게 벌써 언젠데 효진은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고 후반에 부산 이야기를 넣는다. 그리고는 “ending”을 치고 숨을 고른다. 현수가 미니시리즈를 같이 하자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믿어도 될까... 효진은 현수의 이메일로 수정고를 보낸다. 그렇게 한시간이 되도록 현수는 원고는 ‘읽지않음’으로 표시된다. 급할텐데...하며 현수에게 전화를 걸자, 전원이 꺼져있다는 ARS 가 나온다. 어떻게 된거지? 효진은 궁금하다못해 불안해진다.

그때 조연출 민기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안그래도 효진이 민기의 번호를 검색하던 찰나였다.

“감독님 지금 촬영나갔어요. 작가님한테 전화하라고”

“원고 나한테 있는데?”

“다른 분이 빨리 수정하셔서 그걸로...”




효진은 어이가 없었다. 수정마저 대안이 있었다는게...이정도면 현수와의 악연도 끝난거라 생각하며 오히려 홀가분해서 효진은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는 자다 만 낮잠을 게속 자기로 한다. 그러나 이번엔 잠이 오지 않는다. 여행때 현수가 잠시 같이했다는 ‘그녀’의 모습을 나름대로 상상한다.


그제서야 두 번째 작품을 끝낸 뒤 현수가 목포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자주 낚시하러 간다며. 그러나 그때 효진은 특집에 매달려 전혀 틈이 나질 않아 거절했다. 그때 따라갔더라면....하고 효진은 뒤늦은 후회에 빠진다. 그랬더라면 그와 사랑이란걸 했을까,하는데 가슴이 먹먹해온다. 아, 숨은사랑이었나보다, 현수에게도 그런 시간이 , 그런 구석이 있었어, 하며 효진은 일어나 노트북을 펼친다. 느린 부팅이 끝나자 효진은 <그의 잔상>이란 제목을 친다...소설을 쓰자, 효진은 마음먹고 “그”라는 첫글자를 타이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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