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림자연인>
그때 가진게 너무 없었어...
3년만에 동준으로부터 메일이 와있다. 은수는 동준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온몸이 굳는다. 그는 여전히 따로 제목을 달지않고 이메일을 보냈다. 은수는 메일 열기가 왠지 겁이 나서 그냥 닫는다.
3년전 동준의 신간이 나온걸 은수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걸 동준이 인터넷을 검색하다 발견하고 은수글에 댓글을 달면서 둘의 짧았던 관계는 시작되었다. 은수가 학원에서 영어를 강의할 때 동준은 논술을 가르쳤고 그렇게 둘은 처음 만났다. 알고보니 동준은 은수의 같은 대학 3년 선배였고 그걸 계기로 둘은 친해졌다. . 하지만 그건 연정이나 연애심리와는 다른 단순한 친근함 ,그것이었다. 은수는 선배 선배하면서 동준을 곧잘 따랐다.
그러다 동준이 글만 쓰겠다고 학원을 그만두었고 그렇게 둘은 다시 소원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서 메일이 왔고 그렇게 둘은 다시 이어졌다.
글 분위기가 우울하고 비관적이라 동준은 크게 빛을 보지 못했고 은수역시 간간이 무명지에 단편을 올리는 정도라서 둘다 작가로선 실패했다 할수 있는 상태였다. 동준이 그만둔 뒤 은수도 학원을 나와 전적으로 글에 매달렸지만 큰 성과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둘은 다시 이어진것이다.
어느날 인터넷에서 동준의 신간소식을 접한 은수가 자신의 블로그에책 소개를 한게 계기가 되었고 그걸 본 동준이 댓글을 달아 둘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은수는 자신의 열악한 상황에 자격지심을 느껴 그의 메일에 적잖은 부담을 느꼈다.해서 답메일을 보내지 않았고 그럼에도 동준은 계속해서 메일을 보내왔고 그것은 또다른 부담이 돼서 은수는 답을 하였다.
둘의 메일 내용은 그저 평범하였다. 의례적인 안부인사나 글관련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문제는 어느순간부턴가 은수가 그의 메일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일정 시간에 메일을 보내왔기 때문에 은수는 그 시간이 되면 은근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다 하루라도 그의 메일이 오지 않으면 은수는 안절부절하며 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마도 자신이 동준을 좋아하게 된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리고나자 이제 궁금해진건 동준의 마음이었다.
메일 내용으로 봐서는 동준은 여태 싱글인 것 같았지만 은수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게 아니어서 장담할수도 없었다. 꼭 결혼한게 아니어도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수가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들을 하면 은수의 마음은 어수선해졌다. 그러면 은수쪽에서 답 메일을 안보내게 되고 그러면 이삼일째 되는 날 동준이 다시 메일을 보내온다. 왜 소식이 없냐고.
그럼 은수는 다시 답을 하게 되고 둘은 그렇게 끊어질 듯말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그러다 둘은 어렵게 만날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은수는 왠지 그 약속의 현실성을 의심했다. 둘은 어쩐지 만나질거 같지가 않았다. 아닌게 아니라, 약속 당일 은수는 원인불명의 복통에 시달려 약속을 미루게 되었고 다시 잡힌 약속은 동준의 사정으로 무산되었고 이후로 둘은 다시 약속을 잡지 않았다. 무언의 합의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둘은 만나지 못한 사이로 계속 이메일 관계만 이어나갔다.
그러다 동준이 자신이 예전에 출간했던 소설 하나가 수정을 거쳐 재출간된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그리고는 얼마후 정말로 그책이 신간으로 안내되면서 동준은 조금은 스포트를 받게 되었다. 은수는 애매하게 이어지는 둘의 관계에 어떤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다 생각돼 용기내서 동준에게 만나자는 제안을 다시 했고 그렇게 둘은 만났다. 동준은 학원강사때보다 몸이 좀 더 야위어있었고 그래선가 얼굴이 핼쓱해보였다.
학원을 그만두고 근 1년만인데도 은수는 그 시간이 아주 오랜기간으로 와닿았다. 거의 메일 이메일로 만나온 그가 이렇게 어색할수 있는가,은수는 그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그렇게 한시간쯤 흘렀을 때 그제서야 생각난듯 동준은 재출간된 <연민>을 은수에게 내밀었다. 이건 좀 팔렸던거야,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 둘은 책 한권과 커피를 나눠 마신게 다인채로 만남을 마무리하였다. 그리고는 이삼일 동준도 은수도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이 만남은 무언가, 하는 심란한 마음으로 방정리를 하다가 은수는 동준에게서 받은 <연민>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팩을 펴고 읽기 시작하였다. 예전의 동준은 지금만큼 음울하지 않았다. 수정을 한건지 모르지만 가독성도좋고 이야기의 흡인력도 대단하였다. 그렇게 스무장쯤 읽었을 때 은수의 머릴 스쳐간게 있었다. 이걸 각색해보자, 라고 은수는 맘먹었다. 아직 드라마작가로 등단한건 아니었지만 작가교육원을 다니면서 그나름 좋은 평을 들었던 터라 은수는 <연민>에 욕심이 생겼다. 이걸로 애매한 동준과의 관계도 좀더 클리어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자 은수는 없던 용기가 생기는거 같았다.
“선배작품, 원작으로 써도 돼요?”은수는 이메일대신 문자로 동준의 의향을 물었다. 그러자 동준은 무슨 원작? 하고 되물어왔고 은수는 자기가 드라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작품으로 데뷔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동준은 혼쾌히 허락했고 은수는 속성으로 하루만에 <연민>을 다 읽고 드라마 12부로 구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과제물로 단막극만 써본 은수에게 장편소설이나 다름없는 12부는 쉬운일이 아니었다. 은수는 거의 안보던 TV시리즈물들을 눈여겨봤고 극의 흐름이나 심리등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렇게 습득한 지식을 자신의 글에 활용하면서 나름대로 12부 시놉시스를 완성하고 극본쓰기에 들어갔다. 동준은 수시로 글의 진척여부를 물어왔고 저나름의 조언이나 관련된 에피소드 등을 알려주었다. 그렇게되자 둘사이에 흐르던 모호함도 한꺼풀 걷힌 느낌이라 은수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둘은 가까워진다고 은수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2부 극본이 완성되던날, 은수는 대학동창 미영에게 연락해 약속을 잡았다. 미영은 종편 S의 계약직 아나운서였다. 은수가 내미는 <연민>극본과 시놉시스를 받아들고는 자기와 친분있는 드라마 PD한테 전해주겠노라 약속한다. 은수와 미영은 대학시절 같은 방송반이었고 그때 은수는 작가, 미영은 아나운서를 했던 인연이 있다. 그렇게 미영에게 원고를 넘기자 곧바로 동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하철로 귀가하면서 은수는 동준에게 문자를 날린다. 원고를 전해주었다고. 그러자 곧바로 동준에게서 답문이 온다. 수고했다며 너만 믿는다,라며. 그러고나자 왠지 은수는 허탈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동준과는 원고 이야기밖엔 할게 없어졌다는 생각이 그녀를 또다시 애매함속으로 밀어넣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날부턴 둘은 원고 이야기만 나누었다 . 동준은 이미 넘긴 원고임에도 추가로 응용할만한 에피소드들을 알려주었고 은수는 열심히 메모를 하였다. 그러면서 한편, 이 원고가 안되는 날엔 둘의 관계도 끝날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동준에 대한 자신의 마음만 알뿐, 동준의 마음은 모른다는게 또다른 부담으로 작용했다.
미영에게 원고를 넘긴지 1주일째 되던날, 황 모 PD라며 전화가 걸려왔다. 좀 만났음 한다고. 속으로 은수는 쾌재를 불렀다.그렇게 둘은 만날 약속을 잡고 동준에게 제일 먼저 그 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동준은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다. 짜식, 해낼줄 알았다며. 그리고는 되면 한턱 쏴!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일은 기대처럼 풀리지 않았고 결국<연민>은 드라마로 전파를 탈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동준으로부터 오던 연락은 점점 뜸해지고 은수도 딱히 할말이 없어 머뭇거리는 사이 둘 사이는 끊기고 말았다. 한번은 은수쪽에서 용기내서 문자를 했으나 그는 읽기만 하고 답문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 3년만에 그가 다시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은수는 망설이다 용기내서 그의 이메일을 열어본다.그는 안부조차 묻지 않고, 시집갔냐?라고 묻고 있다. 은수는 어이가 없다. <연민>이 틀어졌다고 소식을 끊어버린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답메일을 안보내고 그대로 삭제처리한다. 그러면서, 3년전 그로부터 버림받은 그 기분을 떠올리며 아파한다.
그리고는 그날밤 은수는 잠결에 전화가 울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동준의 전화였다. 그는 좀 보자고 한다. 신간이 나왔다며. 은수는 그가 진저리가 난다. 그래서 그의 말 도중에 끊어버린다. 그러자 잠시후 문자가 날아온다. 꼭 만날 일이 있다며 그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해온다. 이틀후 ,예전 둘이 만났던 그 까페에서 만나자고. 은수는 그 문자마저 삭제한다. 아예 차단을 할까 고민하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를 만나기로 한다.
그렇게 둘은 3년만의 인사동 한 찻집에서 다시 만난다. 동준은 잠을 설친 조금은 피곤한 얼굴이다. 은수는 눈도 마주치기 싫다고 생각한다. 은수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동안 동준이 커피를 가져온다. 너 라떼 좋아하지? 라며 그가 웃는다. 하지만 은수는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란 생각만 한다. 잘지냈어요? 은수는 감정없이 묻는다. 그렇지 뭐...은수는 그 애기를 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은수의 마음은 양극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그때 동준은 이거, 라며 책 한권을 내민다. <진실>이란 제목을 보며 은수는 이건 또 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화가 나서 책을 집어 던진다. 그러자 동준은 당황한 빛이 역력한 얼굴을 그녀 가까이 들이댄다. 왜?라고 그가 묻고 있다.
은수는 작정하고 말하기로 한다. 선배 때문에 나까지 포기한거라고. 그러자 동준은 영문을 몰라한다. 무슨 말이냐고 그가 되묻는다. <연민>말이예요...하고 은수가 대답한다. 그러자 동준은 더더욱 알수 없다는 표정이 된다. 그거 까인거 아니었어? 하자, 은수가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때 황.은 <연민>은 나중으로 미루고 자기가 기획중인 특집 4부작을 제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은수는 왠지 동준을 배반하는 거같아 거절했다. 하지 그랬어, 라며 동준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순간 은수는 설음이 복받친다. 동준을 위해 자신에게 왔던 기회마저 포기했는데 동준은 매정하게 연락을 끊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은수는 울음을 터뜨린다. 안절부절하던 동준은 그제서야 저만치 내던져진 자신의 책을 집어들고 은수옆에 와서 앉는다. 그리고는 한참을 말없이 있더니 흐느낌으로 들썩이는 은수의 어깨를 가만히 안아온다.
“그때 가진게 너무 없었어.."동준이 어렵게 입을 뗀다.
은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가며 그의 말을 듣는다.
“<연민>이 안되면 더는 너를 붙들 명분이 없었어. 그거라도 돼서 너랑 연결되길 바랐는데...다른건 내가 줄게 없었거든 그때”
그제야 은수는 그의 마음을 알고 당황한다. 동준은 은수에게 바보라고 말한다. 자기야 어찌됐든 그 기회를 잡았어야 한다고. 은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한다.
동준은 테이블위에 놓인 책을 은수 손에 쥐어준다.
“우리 얘기야. 널 잊을수 없어서”
아아, 이 사람 뭔가...하는 생각이 은수를 스친다. 그리고는 첫장을 넘기자 “하은수에게 이책을 바칩니다”라는 헌정사가 쓰여있다. 3년전 안타깝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자기들 이야기라며 말하는 동준의 목소리가 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