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진은 지겹다는 듯 까페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그 시선을 경아도 좇는다. 하늘은 흐리고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퍼부을 것 같다. 너도 좋은 사람 만나, 하고 석진은 일어난다. 경아는 두손에 얼굴을 묻는다. 3년이란 시간이 그녀 안에서 일제히 무너져내린다. 그렇게 석진은 까페를 나가고 경아는 한참을 울다 비오는 거리로 나선다.
3년동안 한번도 헤어지지 않은건 아니었고 석진은 보름을 넘기지 않고 다시 연락을 해왔다ᆞ하지만 이번은 다르다,고 경아는 생각한다. 석진은 단단히 결심을 한 듯하다. 점심시간이 다 돼가도록 회사복귀를 안하자 황 대리가 문자를 보내온다. 빨리 들어오라고.
그날밤, 저녁을 거른채 경아는 좁은 방에 오도카니 앉아있다. 그리곤 저만치 벽에 걸린 원형 시계를 쳐다본다. 석진은 유난히 시곗소리에 민감해 늘 무음이나 저소음 시계를 찾곤 했다. 저건 완전한 무소음이다. 석진이 벽에 못을 치며 “콘크리트 못 아무나 못친다?”라며 해맑게 웃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는 그날밤, 소리없이 흐르는 시간을 경아와 석진은 같이 했다.
저걸 처분해야겠다, 경아는 생각하고 중고장터 L에 사진찍어 내놓는다. 그냥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왠지 그러긴 싫었다. 누군가 절실한 사람에게 넘기고 싶었다.
그리곤 선잠을 빠졌을 때 L알림이 온다. 누군가 구매알림을 보낸 것이다. 상대는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구매의사를 밝힌다. 그러면서 지금 입금할까요?라고 되묻는다. 경아는 거래시 주시면 된다고 답하고 다시 시계를 본다. 시간은 여전히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이제 석진과의 시간을 지울때가 왔다고 경아는 생각한다.
남자는 경아의 원룸 근처 편의점 앞으로 제시간에 정확히 도착한다. 둘다 직장인이라 출근전에 시간을 잡았다. 경아는 멀리서 오는 그를 단박에 알아본다. 경아가 상상한 거의 그대로였다. 조금은 마른 듯 키가 큰 그는 캐주얼하면서도 단정한 차림새였다 . 어딘가 석진과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 가까이 온 그역시 쇼핑백을 들고 있는 경아를 금방 알아본다.
“제가 늦었나요?”하며 남자는 시간을 확인하려고 자신의 휴대전화를 본다. 아뇨 저도 금방 왔어요. 하며 경아는 쇼핑백을 내민다. 봐도 되죠? 하며 남자는 종이백 안의 시계를 확인한다. 그리고는 귀를 가까이 대본다. 맞네요, 하면서 그가 웃는다.
“잔돈이 없는데 계좌이체 가능한가요?”라며 경아에게 묻는다. 그렇게 둘은 거래를 끝내고 헤어지며 다시한번 인사한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며 경아는 이체자 강기현, 이름석자를 되뇌인다.그리고는 방에 들어와 시계없는 텅빈 벽을 바라보다 기현에게 문자를 날린다. 이쁘게 쓰세요. 라고. 그리고는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는데 문자 알림이 들려온다. 고맙습니다. 짧고 단정한 그의 답문에 경아는 그가 댄디하다고 느낀다.
그리고는 다음날, 경아는 거래처를 다녀오다 뒤늦게 점심을 거른걸 깨닫고 회사 근처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선다. 오랜만이라 무인 계산기가 낯설지만 그닥 헤매지 않고 그녀는 세트 메뉴를 주문하고 빈 자리에 앉는다. 그러는데 유리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들어선다... 누구더라, 경아는 기억을 더듬다 전날 자기와 시계를 거래한 기현임을 알아차린다. 아..하고 경아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온다. 이렇게도 만나는구나, 하며 계산기에서 주문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자기 테이블의 진동벨이 울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다. 그렇게 세트메뉴를 받아들고 제자리로 돌아오던 경아는 저만치 창가 테이블에서 대기중인 기현에게로 다가간다.
“안녕하세요”“라고 경아가 용기내어 먼저 말을 건넨다. 그러자 기현이 경아를 쳐다본다. 누구, 하다가 그가 기억해낸다. 아, 어제 그분, 하고 반갑게 아는체를 한다.
그렇게 둘은 합석을 한다. 남자도 회사가 근처라며 이래저래 이웃이라고 웃는다. 그의 웃는 모습이 다시 또 석진을 닮았다고 경아는 생각한다. 그렇게 둘은 30여분을 같이 있다 그곳을 나온다.
”기회되면 또 봐요“라며 그가 먼저 헤어지는 인사를 한다. 경아는 목례로 답하고 각자 반대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런 우연이...라며 경아는 생각하며 남은 오후를 내내 기현생각을 하며 보낸다. 그러느라 대차대조표를 잘못봐 황대리에게 혼까지 난다. 그래도 왠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는 퇴근준비를 하던 그녀는 망설이다 기현에게 문자를 보낸다. ”반가웠어요“. 그러자 곧바로 답문이 온다. ”저두요“.
그날 집에 들어서면서 경아는 오후에 단 한번도 석진의 생각을 하지 않은게 떠올랐다. 자신이 이리도 빨리 마음을 정리할줄을 몰랐던 경아는 내심 놀라면서도 기현, 그가 너무나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그가 이제껏 보내온 문자들을 다시 한번 읽는다. 분명 기현이 말했다. 기회되면 또 보자고...
그리고는 경아는 서둘러 석진의 흔적들을 없애간다. 옷장 한켠에 놓여있는 그의 카디건부터 치운다. 그의 서른 두 번째 생일에 경아가 선물했던 그 옷이다. 그리고는 그의 파자마. 흰바탕에 세로줄이 가늘게 나있어 시원해보인다며 노점에서 그가 직접 골랐던. 그렇게 경아는 그런식으로 그에게서 벘어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거울속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니 보다가 결심한듯 미장원에 얘약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는다. 그렇게 그녀의 헤어는 완전히 바뀌고 늘 입던 무채색 옷가지들은 죄다 버린 뒤 컬라풀한 색들로 새로이 옷장을 채워놓는다. 더 이상 석진의 흔적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이후로 경아는 기현과 재회했던 그 패스트푸드점을 매일매일 찾는다. 그리고는 그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던 사흘째 되던 날, 경아가 잠시 한눈 파는 사이를 틈타 주문을 마친 기현이 저쪽 테이블에 가 앉는게 뒤늦게 보인다. 경아는 그를 보는순간 가슴이 걷잡을수 없이 뛰는걸 느긴다. 그리고는 그에게로 다가가, 어머 또 보네요, 라고 웃어보인다. 기현도 이번엔 단박에 경아를 알아보고, 그러네, 하고 말을 놓는다. 그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합석해서 점심을 때우고 헤어진다. 다음엔 기필코 약속을 잡겠다고 경아는 생각한다.
한밤중, 모처럼 깊은잠을 자는 동안 경아의 전화벨이 울린다. 경아는 어듬속을 더듬어 전화를 받는다. 석진의 전화였다. 술이 오른 목소리였다. 미안하다,며 이내 전화를 끊는다. 그러나 경아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이제 석진은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남은 밤, 경아는 단꿈을 꾸며 오랜만의 숙면을 한다.
기현이 다닌다는 그 회사 1층 로비에 그녀는 정확히 12시에 맞춰 나타난다. 그리고는 점심시간을 맞춰 한무더기 사람들을 내뱉는 네 대의 승강기를 돌아가며 유심히 바라본다. 그렇게 10여분 흘렀을 때 안쪽 승강기에서 내리는 기현의 모습이 보인다. 경아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그러자 그녀를 알아본 기현이 멈칫, 굳은 표정이 된다.
”여기 일이 좀 있어서요“하자 기현이 못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럼“하고 그녀를 지나치려한다. 점심 제가 살게요, 라며 경아가 살짝 기현의 옷소매를 잡아끈다. ”아뇨, 약속이 있어서요“라며 기현은 도망치듯 그자릴 벗어난다. 근처 분식집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면서도 경아는 계속 웃음이 나온다. 놀라던 기현의 얼굴이 귀여웠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는 오후 내내 근무중 틈틈이 기현에게 문자를 날린다. 반가웠다. 시계는 잘 쓰고 있냐, 다음에 꼭 밥 사달라고.
그렇게 하루를 온통 기현의 생각속에 보낸 그녀는 퇴근하는데 1층 회전문 근처에서 기현을 발견한다. 그녀를 발견한 기현이 다가와 잠시 얘기좀 하자고 한다. 경아는 올게 왔다는 생각에 그보다 앞장서 회전문을 나간다.
” 왜 그러시죠?“라며 기현이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물어온다. 경아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보인다. 말씀해주시죠,제가 뭐 잘못한거라도? 하고 기현이 되물어온다.
”오늘 저녁 같이 할래요?“ 경아가 부드럽게 물어본다.
”왜 내가 당신..아니, 이경아씨랑 저녁을 먹어야 합니까?“ 기현은 테이블 한쪽의 냅킨을 집어 땀을 닦는다.
”전 그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라며 경아는 환하게 웃는따. 얼마전 3년 사귄 남자에게 새여자가 생겨 헤어지곤 죽을 생각까지 하던차에 당신을 만났다고. 그말을 듣는 기현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진다.
”우리 이제 솔직해져요“” 하며 경아가 기현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난 도통...”
"당신도 맘있잖아 나한테"
기현은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기현은 서둘러 그곳을 나온다. 뒤따라온 경아가 그의 손을 잡는다. 붐비는 거리로 나온 둘은 남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실랑이를 벌인다. 이 여자가 미쳤나, 하며 기현이 경아를 밀쳐내자, 그녀는 나직이 물어온다.
“우리 언제 자요?”
그말에 기현은 넋이 나간다. 그러자 쳐다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혀를 차며 가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자기 둘이 어떻게 비췄을지 아는 기현은 어서 이자릴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난다. 그리고는, 계속 미소를 던지는 경아를 놔두고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다음날 기현이 출근하자 옆자리 김.이 턱으로 무언가를 가리킨다. 그제서야 기현은 자기 책상 위의 꽃바구니를 발견한다. 기현은 퍼뜩 경아의 얼굴을 떠올리고 설마 하면서 꽃다발 속에서 작은 카드를 꺼낸다. 역시 경아가 보낸것이었다. 연애해? 하고 김.이 툭 치고 지나간다. 기현이 털썩 자리에 앉는데, 경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언제 자냐던.기현은 믿을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는다. 그리고는 결심을 하게 된다.
경아는 퇴근 무렵 기현에게서 좀 보자는 전화를 받게 된다. 마침 그날 새로 주문한 더블침대가 집에 들어오는 날이라 잘됐다는 생각이 든다. 기현에게 보여주면 된다,는 생각에 그녀는서둘러 약속장소로 나간다.
경아가 들어서자 기현은 저만치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경아는 , 저 왔어요,하곤 익히 아는 사이처럼 인사하며 앉는다. 기현은, 왜 우리가 자야 되죠?라고 되묻는다. 그러자 경아는 부끄러워하지 말라,며 기현의 한손을 잡아온다. 움찔한 기현이 그 손을 빼내자, 경아는 나지막히 이야기한다. 오늘 침대 들어온다고. 기현은 욕지기가 올라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해댄다. 경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나요. 여자 있어요” 라고 간신히 구역질을 참으며 기현이 내뱉는다. 그러나 경아는 개의치 않는 눈치다.그러나 기현은 이 말하러 왔다면서 다신 자길 찾지 말라며 마지막 경고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경아는 다시 침대를 언급하고 그말은 결국 화근이 되었다. 기현은 홱 돌아서더니 경아의 뺨을 후려친다. 까페안 사람들 시선이 둘에게 집중된다. 저만치 빈테이블을 정리하던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온다. 이러심 안됩니다. 나가주세요.
그러자 경아가 참견말라며 쏘아붙인다. 아르바이트생은 기현부터 끌어낸다. 그러자 기현이 소리지른다. 저 여자 미친 여자야! 그말에 경아는 넋이 나가 그의 돌변을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현을 따라 까페 밖으로 나온다.그리고는 기현의 한팔을 잡는다. 가자고. 집에 가면 새침대가 있다고. 기현은 더는 못참겠다는 듯 어딘가 전화를 건다 .
“당신 미쳤어요? 나야 나”하면서 경아가 자길 알아봐 달라는 시늉을 한다. 그러는사이 이 진풍경을 보러 사람들이 모여든다. 누군가 말한다. 야, 단물 다 빼먹고 버리면 그꼴 난다. 그말에 화가 난 기현이 주먹을 불끈 쥔다. 경아는 계속 ,가자며 기현을 잡아끈다. 그때 어디선가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여온다.
기현이 신고한것이라고 생각한 경아는 심한 모욕이라도 당한 표정을 지으며 차도를 향해 내달린다. 불길한 생각이 스친 기현이 그녀를 뒤따르지만, 그녀는 이미 공중에 붕 떠있다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달려오던 SUV에 부딪친 것이다. 기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는다.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경찰도 다가온다.
죽은 그녀 얼굴이 흰 시트에 덮이는걸 보면서 석진은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는 창백하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트바깥으로 내놓인 경아의 손을 잡는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음 자기도 못알아봤냐고. 대체 강기현이 누구냐며 경아의 시신을 끌어안고 흐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