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가을 안개>

연락처를 주고싶다는 생각과 이대로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사이에서 ...

by 박순영

기영은 달랑 포스터만 보내놓고 이후 말이 없다. 효진은 가야하나 마나 고민하느라 수업도 제대로 안된다.

기영의 애매한 태도에 그만 관계를 정리라도 할라치면 그는 매번 그녀를 붙잡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에게 마음이 아예 없지 않은 그녀로서는 그럼 다시 돌아가고 그러면 그는 한동안 신경 쓰는가 싶으면 며칠 안가 연락을 끊곤 한다. 기영으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운날은 수업도 제대로 안되고 스펠링을 잘못 판서하기까지 한다. 마음을 잡자, 하고 다짐해도 그게 잘 안된다.

기영은 대학때부터 인디영화작업을 해왔고 딱 한번 상업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흥행에 실패하면서 다시 인디감독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직업이 불안정하다는게 전혀 안걸리는게 아니었지만 기간제 교사인 자기와 그나름으로 배합이 나쁘다싶어 효진은 그에게 나름 성의를 보이지만 서로 오고가는 마음의 질량이 다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번 인디영화제만 해도, 포스터만 하나 보내놓고, 오라가란 말이 없다. 영화제는 고속열차로 3시간 넘게 걸리는 남도 어느 섬에서 열린다고 쓰여있다. 기차역에서 내려 선착장까지 이동한 다음 두 번이나 배를 갈아타야 하는 해안이었다.

딱한마디, 역까지 오면 자기가 에스코트하겠다면 가려던 효진은 힘이 빠진다. 남도라면 오래전 차로 잠깐 스치기만 했던 곳이고, 뭍도 아닌 배를 두 번이나 타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망설여지면서도 솔직히 귀찮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 거절하면 왠지 기영과 완전히 단절될거 같은 마음에 효진은 가능하면 가려고 하지만 기영의 반응이 시원찮은 것이다.


망설이던 효진은 일단 기차에 오르기로 결심하고 예매를 한다. 그리고는 기영의 문자를 기다리지만 그에게선 출발당일까지 답이없다. 기영도 그곳에 올테니 일단 내려가서 연락하기로 마음먹고 그녀는 고속열차에 오른다. 넓은 차창 밖의 풍경들은 어느새 여름을 벗어나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철지난 바닷가의 영화제...그 나름의 풍미가 있을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D시기차역에 내린다. 영화제가 열리는 그 해안까지 혹시 택시이동이 가능한가 관광 안내소에 묻지만 돌아온 대답은 포스터에 기재된 그대로 배로 가는 방법밖에 없다. 일단 약국에서 멀미약을 사먹은 뒤 그녀는 기영에게 문자를 넣는다. 지금 D시 기차역이라고. 하지만 문자확인을 안한다. 둘 사이엔 전화를 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그녀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용기를 내서 그에게 전화를 한다. 내가 이 관계에 신경쓰고 책임지려 하는거에 반만 그가 해도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데,그가 전화를 받는다.


“효진씨, 웬일이예요?” 그말에 효진은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다. 웬일이냐니...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스쳐지나간다. 3시간반을 달려와서 혹시 바람맞는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제땜에..”그녀가 언질을 주자, 아, 하는 탄싞소리가 전화너머에서 들려온다. 역시 예감이 맞았구나,싶은 그녀는 곧바로 서울행 기차에 다시 오르고 싶은걸 간신히 참는다. 그는 다른 일이 갑자기 생겨 영화제에 못갈거 같다며, 어쩌죠?라고 한다. 오실줄 몰랐는데,라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은 없다.

효진은 그저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기차표 시간을 확인한다. 한시간만 있음 서울행 기차가 있다. 그러면 저녁은 서울에서 먹을수 있다,고 생각하다, 문득 철지난 바다를 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려면 배를 두 번이나 타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아득하게 만들지만 이참에 기영과의 애매한 관계를 청산하는 의미로 혼자 영화제를 보기로 결심한다.


배에서 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중간에 버스탑승도 끼어있어 여간 불편한 여정이 아니었다. 멀미약이 듣지 않는지 그녀는 두 번째 배에서 먹은걸 다 게워낸다. 그날따라 풍랑이 심했고 작은 배는 종이배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그렇게 온갖 고생을 하고나자 후회가 밀려든다.그냥 올라갔으면 될걸...그러고 있는데 영화제가 열리는 그 바닷가에 그녀는 다다른다. 이젠 돌아갈수도 없다고 체념하고나자 그녀는 조금은 개운해진다. 저만치 영화제를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일군의 사람들이 보인다. 개막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 그녀는 멀미도 가라앉힐겸 산책을 하기로 한다.

그렇게 망연히 걷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혼자 오셨나 봐요,라고. 이 흔한 멘트를 그것도 바닷가에서 받은 그녀는 쿡 웃음이 나온다. 소리나는 쪽으로 돌아보자,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저만치 서있는게 보인다.영화제 보러 왔다고 하자, 저도요,하며 남자가 웃는다. 서울말투로 보아 남자도 자기처럼 고속열차에 두 번씩 배를 갈아타고 이곳까지 온거 같다. 그래선지 남자얼굴도 핼쓱하다. 뭍사람들이 작은배의 흔들림이 주는 고통을 어찌 헤아릴것인가.


제가 점심을 아직 안해서요,라고 남자가 말한다. 그리고는 괜찮으심,한다. 뭐 어떠랴 싶다. 썸도 연애도 아닌 애매한 관계의 남자에게 차이고 나니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 돼서 그녀는 그와 동행하기로 한다. 그렇게 근처 작은 식당에 들어간 둘은 파전을 주문한다. 예상대로 남자도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어쩌면 같은 기차를 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왜 혼자 왔냐고 묻고싶지만 딱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 효진은 파전만 뒤적인다. 해산물이 듬뿍 들어가 있어 고소하면서 달달했다. 맛있네,하며 그가 먹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아참, 저 정선규라고 합니다, 라며 자기이름을 밝힌다. 상대가 그리 나온 이상 효진도 가만 있을수가 없어,우효진이예요 라고 한다.

그렇게 선규와 효진은 같이 이른 저녁을 먹고 꽌객이 반도 안되는 인디영화제를 보기 시작한다. 단편 영화 몇 작품이 상영되더니 마지막은 90분짜리로 마무리한다. 일반 상업영화와 별반 다를게 없다고 생각한 효진은 딱이 인디영화라고 이름붙인 그 이유를 알수가 없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생태페미니즘 정도? 중간에 일어서고싶은걸 간신히 참은 효진은 마지막 영화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갈곳이 없다. 처음 바닷가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찾은게 숙소였지만 그럴듯한 호텔은 눈씻고 찾아도 없었고 민박 아니면 허름한 모텔이 몇 개 있는게 다였다. 기영과 왔으면 잠자리 문제는 어찌됐을까, 문득 그 생각이 든다. 데면데면한 기영과의 관계개선에 이번 여행이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을 전혀 안한게 아닌터라 그녀는 조금은 씁쓸하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자 선규는 어디 묵을 곳이라도?하며 물어온다. 지금 찾는 중이라고 하자,자기도 마찬가지라며 둘은 같이 묵을 곳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모텔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방 두 개를 나란히 잡는다.

말이 모텔이지, 욕실이나 화장실은 공용으로 돼있어 여인숙과 다를바없다. 효진은 일단 짐을 푼 뒤 세수라도 하려고 방을 나온다. 그러는데 저만치 목에 수건을 두르고 양치를 하는 선규가 눈에 들어온다. 효진을 본 선규는 , 불편하죠? 라며 싱긋 웃어보인다 마치 자신의 잘못인양. 그렇게 씻기를 마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선규가 맥주 한잔 어때요?라며 물어온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어차피 잠이 올거 같지 않은 밤이어서 효진은 그에 응한다. 그렇게 둘은 다시 밖으로 나와 근처 가게 평상에 앉아 맥주를 나눠마신다.

같이 오기로 한 여자친구가 일이 생겨 혼자 왔노라고 선규는 말한다. 대학 영화 동아리에서 만났고 오래 사귄 사이라고 효진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한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둘사이엔 적막이 흐른다. 효진은 그 상황이 어색하기만 하다. 그러자 선규는 좀 걸을래요? 하며 평상에서 일어난다. 효진도 뒤따라 일어나고 물이 빠져나간 바닷가를 둘은 걷기 시작한다. 50년만의 폭염이었다는 지난여름의 열기는 간데없고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요란하다. 지난여름 넘 더웠죠? 그가 조개를 주우며 말한다. 그의 반쯤 접은 바짓단 아래의 다리가 달빛을 받아 유난히 희다고 효진은 느낀다. 이제 여름이면 남극에 가있어야겠다고 그가 농을 한다. 그러는 선규에게 효진은 친밀함을 느낀다. 그처럼 효진도 두손가득 조개를 줍는다. 씻어야겠네, 하면서 선규가 진흙이 잔뜩 묻은 효진을 놀려댄다. 그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효진은 전화를 방에 두고 나온터라 선규에게 그쪽 전화라고 말한다. 전화올데가? 하고 그는 발신인을 보고, 여친요,하며 씩 웃는다. 통화를 엿듣는 거 같아 효진은 자리를 비켜준다. 선규가 통화를 하는 사이 효진은 바다를 벗어난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온 효진은 잠을 청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그래도 명색이 기영과 끝낸 날이 아닌가, 비록 그 무어라 딱 규정할수 없는 관계였지만 그렇다해도 연애감정을 갖게 해준 상대 아니었든가,그런 생각을 하자 효진은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친다. 왜 하필 그런 상대를 만나서, 라는 신세한탄까지 더해진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훌쩍거린다. 그러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자, 별봐요,라며 선규가 웃으며 서있다.


그렇게 다시 밖으로 나온 효진은 마치 연인사이처럼 선규와 나란히 서서 밤하늘 별들을 감상한다. 바다위에 떨어지는 별빛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다. 저런걸 윤슬이라고 했든가...그러고 있는데 선규가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아온다. 효진이 흠칫 놀라 손을 빼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입술을 덮쳐온다. 효진은 아득해진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으면서도 그런 그를 받아들인다.

그날밤 효진은 그의 아기새가 돼서 그의 품에 안긴다. 선규의 손길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기영을 놓고 너무나 많이 상상하고 원했던 그림이다. 그 생각을 하자 효진은 착잡하지만 당장 자기 앞의 선규를 내칠 자신이 없다. 그러고 나면, 죽을 정도로 외로워질거라는 생각에.


그러고나서 선규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 효진은 금방 후회에 빠진다. 어차피 같은 배를 타고 나가야할텐데 서로의 얼굴을 보는게 고역이라 생각하면서 . 그렇게 짐을 꾸려 숙소를 나오는데 기다렸다는 듯 해무가 밀려든다. 가을안개, 이 네글자가 가슴을 파고듣다. 잘못하면 길을 잃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게 한치 앞이 안보이는 바닷길을 안개를 헤치며 그녀는 무작정 걷기로 한다. 그러고 있는데 저만치 작은 빨간불이 보인다. 뭐지?하고 다가간 그녀는 그것이 선규의 담뱃불이라는걸 알게 된다. 잘잤어요?그가 담배를 눌러 끄며 물어온다. 그렇게 물어오는 걸 보면 선규도 여간 어색했나보다,싶다. 여긴 택시도 안들어온다네...하면서 그가 머리를 긁적인다. 그럼 어제처럼 하루에 단 두 번있는 버스로 선착장까지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 버스시간까지 한시간 정도 남아있다. 어디가서 아침이나 하죠, 선규가 앞장 선다. 조금은 주저하면서도 효진은 그를 따라간다.

그렇게 둘은 어제 같이 파전을 먹은 그 식당에 들어선다. 찌개정식 2인분을 시키고 효진이 테이블 측면 서랍에서 수저를 꺼내 세팅하는데 그 손을 선규가 가만히 잡아온다. 그렇게 서로의 손은 맞잡힌채로 한동안 있는다. 그러다 그가 효진의 연락처를 물어온다. 효진은 대답대신 바깥 가을안개를 응시한다. 그러자, 안되겠죠 ?하고 선규가 포기한다. 효진은 둘이 단순히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섞었다고 생각한다.우리 좀 걸어요,라며 그녀가 먼저 수저를 놓으며 말한다.

그렇게 둘은 다시 해변, 안갯속으로 나온다. 관계란 본질적으로 이렇게 모호한걸지 모른다는 생각을 그녀는 한다. 그리 생각하니 기영을 조금은 이해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퍼뜩 버스시간이 떠오른다.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서둘러요, 하자 선규가 이거 한 대만 태우고, 하며 담배에 불을 당긴다. 그렇게라도 함께 있는 시간을 벌고싶은 그의 심정을 그녀는 충분히 안다. 나도 한 대 줄래요? 그녀의 말에 그가, 아, 하더니 한 개비를 더 꺼내 불을 붙여준다.

그렇게 둘은 남도 바닷가 가을안갯 속에서 맞담배를 태운다. 그러고 있는데 저만치 버스 전조등이 가까워오는게 보인다. 왔네,하며 그가 먼저 담배를 눌러 끈다. 그때 효진의 문자 알람이 울린다. 뭐지?하며 그녀가 문자를 열면 기영이 보낸거다. 지금 내려오고 있다고. 선규가 눈치챈 듯, 다음버스 탈거죠? 하며 혼자 버스에 오른다. 효진은 그에게 연락처를 주고싶다는 생각과 이대로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고 있는데 기사가 짜증섞인 소리를 낸다. 안타요? 효진은 다시 한번 기영의 문자를 본다. 지금 오고 있다고....그러고 차안의 선규를 보자, 그는 이미 체념한 얼굴이다. 그러면서 차문이 닫히고 버스는 서서히 움직인다. 가만 손을 흔드는 선규를 본듯하다. 그렇게 버스는 선규를 태운채 안갯속으로 사라져간다.

keyword
이전 05화소설 <경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