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원>
모든걸 내려놓은듯, 어쩌면 해원한 사람처럼.
명우가 느닷없이 결별통보를 하고 채 일주일도 지나지않아 윤석이 연락을 해왔다. 명우의 오랜 친구 그 윤석이.
7년동안 물론 다툼도 헤어짐도 있었지만 완전히 갈라서는 일은 없다고 믿고 온 지라 명우가 이제 다 끝내자는 말을 했을때도 인애는 이러다 말려니 했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명우는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말한다.
예전에도 이런일이 있었길래 인애는 ,정리해, 하고 담담하게 말한다. 하지만 이미 양가 부모 상견례까지 마친 상태라며 함께 유학을 가기로 했다는 말에, 인애는 심상찮다고 느껴, 정말이야? 되물었고 미안하다 너한텐, 하고 명우는 먼저 까페를 나간다.
우두커니 넋을 잃은 인애가 잠시후 명우를 잡으러 뒤따라 나가지만 그의 차는 이미 멀어지고 있다. 말도 안돼...그녀는 그 말만 되풀이한거 같다. 그리곤 계속 명우에게 연락을 하지만 그는 그때마다 통화거절만 눌러댄다. 진짠가....
그렇게 일주일을 채워갈 때쯤 윤석이 그녀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대학시절, 타대학을 다니던 윤석이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자주 인애와 명우가 다니는 K대학 도서관에 나타났고, 또 왔냐? 라고 명우가 타박이라도 주면 너보러 온거 아니다 ,라며 툴툴댔다. 그럴 정도로 명우와 윤석은 허물없이 뭐든 터놓고 지내는거 같아 인애도 어느순간부터 윤석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가끔은 명우 없이 윤석과 인애 둘이 어울리기도 하였다. 다음날 명우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 잘들한다,라며 싱겁게 웃곤 했다.
명우와 헤어진 뒤 윤석에게서 연락을 받은 인애는 그의 목소리가 구원처럼 들린다. 둘의 결별을 알고 다시 이어주려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와의 약속장소로 달려간다.
“이제, 나 되는건가?” 윤석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흘러나온다. 인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무슨말,이냐는 표정만 짓는다. K대학 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한 게 다 인애 너 때문이라고 그는 고백을 한다. 인애는 도무지 그런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남자여자 7년이면 부부나 다름없이 지냈다는 뜻이고 그걸 모를 윤석도 아니건만, 어떻게 그것도 친구의 옛여자에게 어필하는 건지 그녀는 거부감마저 들었다.
“그런 얘기라면 더 들을 필요가 없네요”깍듯하게 경어를 써가며 인애는 그를 거절하고 거리를 헤맨다. 명우는 진짜 떠난걸까..
그리고 윤석으로부터 며칠후, 명우가 ‘그녀’와 함께 전날 출국했다는 문자를 인애는 받게 된다. 그 문자를 연거푸 읽다가 인애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옆에는 윤석이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다.이따금 명우와 윤석은 인애를 괴롭힌다는 명목으로 술이며 안줏거릴 잔뜩 사들고 와서 윤석도 그녀의방을 잘알고있다.
인애가 정신을 차리자 윤석은 준비해온 약과 물을 내밀며 얼른 먹으라고 한다. 인애는 당장 그를 방에서 내쫓고 싶지만 그럴 기력도 없다. 해서, 그 약을 받아먹고 또다시 깊은 잠에 빠진다. 그리고는 명우의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의 꿈을 꾼다.
인애는 그렇게 몸져눕는다. 중장비 제조회사에 다니는 윤석은 퇴근하면 곧바로 인애를 들여다봤고 어떤날은 근처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서 오기도 하였다. 기운 내라고. 세상에 남자가 명우녀석 하나뿐이냐고...
어느날 문득 인애가 그에게 묻는다. 정말 자길 좋아하냐고. 그러자 윤석은 더 기다릴수도 있으니 일단 마음부터 다스리라고 한다. 왜 하필 친구 여자,냐는 말을 하기라도 할라치면, 이젠 아니면서,라고 짓궂게 말을 잘랐다. 인애는 왠지 명우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거 같단 생각을 한다. 윤석과 사귀어도 되냐는. 어느날 있는 용기를 다 내서 그녀는 명우에게 국제전화를 건다. 웬일이야? 그는 아무일 없었던것처럼 전화를 받는다.그러더니 먼저 윤석을 언급한다. 그놈, 너 옛날부터 좋아했어. 그말을 듣는 순간 인애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두남자 사이에서 나는 뭐란 말인가...
“다신 연락하지 말아요”인애는 윤석의 회사 근처에서 만나 따끔하게 이야기한다. 그녀의 어조가 심상찮다고 느낀 윤석은 말없이 가만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러면서 노력은 해보겠다고 한다.
그렇게 그와 헤어지고 오다가 그녀는 갑자기 길을 잃고 만다. 명우와 함께 가끔 윤석을 본다고 오가던 길인데도 그날은 어떻게 된건지 모든게 낯설었다. 빼곡히 늘어선 가로수나 외등, 주위 건물 모두가...
그녀는 행인의 도움을 받아 근처 파출소로 들어가야 했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의사는 인애의 뇌사진을 쳐다보더니 알츠하이머라고 말한다. 알츠,따라하던 인애의 두손이 앉아있던 의자 팔걸이를 꽉 움켜쥔다. 그러면서 의사는 가족력 여부를 확인하려한다. 인애의 부모나 선대 모두 치매로 간 적은 없다고 그녀는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번 검사를 요청하지만 여의사는 대부분의 환자가 이렇게 반응한다며 아직 젊으니 꾸준히 치료하면 진행을 늦출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약을 처방한다. 원인이 뭔가요? 인애가 묻자, 치매는 딱히 무엇이 원인이라고 할수 없다며 의사는 냉정하게 답한다.
인애는 연차를 내고 자기방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낸다.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자신이 치매라는게 믿기지 않는다. 그러고 있는데 윤석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노력했지만 너를 놓을수가 없다고. 순간 인애는 그에게 다 말하리라 다짐한다. 그것만큼 확실한 이별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뒤늦게 퇴근한 윤석이 그녀의 방을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 나 치매래,거의 소리치듯 말한다. 뭐? 윤석이 잘 못 들었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나, 알츠하이머래,라고 그녀는 다시 알려준다. 그리고는 의사가 처방한 한달치 약까지 보여준다. 이제 됐지? 마치 자신의 병이 윤석탓이기라도 한 양 그녀는 쏘아붙인다. 알았음 그만 가라고. 꺼지라고!
그러자 윤석은 황급히 물 한잔을 들이키더니 다음날 다시 오겠다며 일단 방을 나간다. 그가 나간 뒤 짧게나마 그에게 의지해온 자신이 한심하단 생각에 인애는 흐느껴운다.
의사는 약물요법과 상담을 병행하면 진행을 늦출수 있다고 했지만 인애의 상태는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회사에 사직서까지 낸다. 일신상의 이유라고 적고. 그렇게 일자리까지 놓아버린 그녀를 윤석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날밤, 미국에서 명우가 전화를 걸어온다. 너 아프다면서. 윤석이 말한것이리라. 둘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인애가 먼저 전화를 끊는다.
인애는 버틸때까진 버티겠다는 생각으로 매일아침 집 주위를 산책하고 낮잠도 가능하면 1시간 이내로 자기로 한다. 시간맞춰 꼬박꼬박 약을 먹어가며 치매에 좋다는 음식들을 사다가 섭취하면서 나름대로 노력을 해본다. 가끔 윤석이 생각나지만, 어차피 연 자체가 안좋다고 하면서 그를 단념하기로 한다.
그즈음, 윤석이 집앞이라며 올라가도 되냐는 문자를 해온다 .
마치 제집인양 스스럼없이 드라들던 그였기에 인애는 일종의 허락을 구하는 그가 낯설기만 하다.
윤석은 호두 토마토 브로콜리를 잔뜩 사들고 들어온다. 인애는 그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린다. 모두가 치매에 효능이 있다는 식자재들이다. 그걸 보고 인애가 픽 웃자, 지금 웃음이 나와? 윤석이 타박을 한다. 이후로 야근이 없는 날은 윤석은 꼬박꼬박 인애를 찾아와서 저녁을 함께 먹고 밤 산책을 같이 한다. 고양이나 강아지 한 마리 키울래? 하는 그의 말에 이 정신에? 인애가 난처해하면, 그런가? 하면서 그가 머리를 벅벅 긁는다.
나한테 공들이지 말고 더 늙기전에 좋은 사람 만나, 인애가 말하면 그럴까? 하며 서로 농까지 주고받는다. 그리고는 어느 비가 몹시 오던날, 그가 인애를 안는다. 오래 기다려왔다면서. 어차피 오래 못갈 인연이라 인애는 생각한다.
인애의 예감대로 그날이후 그는 연락을 끊는다. 차라리 잘됐다,싶으면서도 인애는 한편 그가 밉고 그립다. 언제부턴가 명우는 마치 오랜 지기처럼 국제전화를 걸어와 인애의 상태를 물어보고 걱정해주고 있다. 지난 7년의 시간이 아깝고 그만큼 소중했지만 불치병앞에서는 모든게 용서됨을 인애는 느낀다.
그렇게 보름정도 시간이 흐른뒤 윤석이 잠깐 밖으로 나올수 있냐고 연락을 해온다. 무슨 일인가싶어 그녀가 집앞으로 나가자, 눈에 익은 윤석의 짚차가 서있고 그는 갈 데가 있다며 인애에게 타라고 한다. 지난 보름동안 전화한통 문자 한번 없던 그였기에 인애는 선선히 그의 차에 오른다는게 내키지 않지만 윤석은 그녀를 밀어넣다시피 차에 태운다. 어딜 가냐고 물어도 윤석은 가보면 안다,고만 한다. 그렇게 차는 외곽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저만치 작은 철물점 앞에 멈춘다. 인애가 계속 궁금해하는 얼굴을 보이자, 우리 형이 하는 데야,라고 그가 대답한다.
“좀 아프다구요?” 그의 형이 수정과를 들이키며 인애의 대답을 기다린다.
“치맵니다” 그녀가 짤막하게 대답하자 그의 형이 옆에 앉은 아내의 손을 꼭 쥐는게 보인다.
지금 약 잘 먹고 있어,라고 윤석이 끼어들자, 그의 형은 , 너 좋음 뭐...라며 말끝을 흐린다. 그러고 있는데 청테잎을 찾는 손님이 가게에 들어오며 대화는 끊긴다.
“부모님 일찍 돌아가시고 형이 아버지 노릇 다 했어”라며 돌아오는 길에 윤석이 말한다. 형의 허락을 받기 위해 보름간 연락 못했다며. 그말에 인애는 자신이 몹쓸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그만 두자, 인애가 말하지만, 이미 집까지 다 계약했다고 그가 말한다. 너좀 편히 살라고 작은 주택으로 했다며 보증금까지 치뤘다는 말을 한다. 마당에 꽃밭도 있다며. 그말에 인애는 왜, 내가 뭔데,라며 화를 내지만 그런 인애를 그는 가만히 안아준다. 맘편히 살아. 내가 원하는건 니가 편한거뿐이야,라고 한다.
둘의 결혼식은 조졸하게 치러지고 명우도 ‘그녀’와 함께 하객으로 참석한다. 근래들어 부쩍 상태가 나빠진 인애는 가끔 윤석조차 알아보질 못한다. 그렇게 상태가 안좋을땐 윤석은 그녀를 채근하거나 닦달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준다.
하객으로 참석한 명우를 인애는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자 명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오랜친구’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그러자 그녀는 고래를 끄덕인다. 그걸 본 명우의 ‘그녀’가 뒤돌아서 눈물을 훔친다.
인애는 밤이면 ‘나쁜놈들’이 현관문밖에 와있다며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약물치료를 하면서 추이를 지켜보자던 의사가, 악성입니다,한다. 악성은 조현병과 거의 같은 상태를 보인다면서 힘들면 시설에...라고 한다. 결혼한 지 석달만에 인애의 상태는 그정도로 악화된다.
윤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인애의 마지막은 자기가 지키겠노라 다짐한다. 그리고는 낮에 자기가 없는 동안 그녀를 케어할 요양사를 부르기로 한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의 포악함에 요양사들은 손사래를 치며 떠나가곤 했다.
그리고 어느날밤 인애는 침대시트에 오줌을 지린다. 세탁기 돌리면 돼,하고 윤석이 시트를 말아 바깥 발코니 구석 세탁기로 간 사이, 그녀는 결심한다.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고. 그러는 그녀의 눈에 저녁에 사과를 깎았던 과도가 눈에 들어온다.
인애의 시선은 초점이 없다. 하루종일 요양병원 천장만 바라보고 그녀는 모든걸 잊은채 그녀는 그렇게 지낸다.모든걸 내려놓은듯, 어쩌면 해원한 사람처럼.
시설도 악성환자는 받지 않으려 해서 간신히 찾아낸 곳이 이곳이다. 지난번 과도로 자해한 흔적이 그녀의 왼쪽팔뚝에 아직도 선명하다. 괜찮아 괜찮아, 하며 윤석은 피가 뚝뚝 흐르는 그녀의 팔을 수건으로 꽁꽁 동여맨뒤 119를 불렀다.
두 번째 폐렴을 이기지 못하고 인애는 갔다. 한달을 혼수상태로 있다 그렇게 그녀는 갔다. 친구 여자여서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던 시간까지 하면 거의 10년을 자기 마음속에 자리잡았던 그 여자를 , 이제 한줌 재가 된 그녀를 윤석은 자기 품에 꼭 안았다 신혼집 뒤 낮은 산에 뿌려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새들이 날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