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규가 예림 옆으로 자리를 옮겨앉는다
형수가 퇴근해서 꺼낸 첫마디가 보증금이야기였다. 낮에 집주인 전화를 받았다며 요즘 시세도 있고 하니 1억을 올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예림은 몇백, 몇천도 아닌 1억이란 말에 입이 떡 벌어진다.
“뭐라고 할수도 없어.. 요즘 이쪽 시세가 다 그렇더라구”
“어디서 1억을....자기 대출도 꽉 찼잖아”
형수는 넥타이를 풀어 아무렇게나 던진다. 세상 눈먼 돈은 다 어디갔는지, 하면서 욕실로 들어간다.
형수와 예림이 동거를 하면서 외곽 원룸에 자리잡은지도 벌써 2년이 돼간다. 에림은 내심 결혼식을 원했지만 그게 뭐 중요해, 나중에 하면 되지,라는 형수를 더 설득하다간 싸움으로 번질거 같아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혼인신고라도 할까? 예림이 어느날 아침을 먹다가 문득 말하자, 형수는 뭐가 급해서,라며 나중에 식 올리고 정식으로 신고를 하자고 했다. 그렇게 단순 동거기간만 벌써 2년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부동산 가격이 널을 뛰었다는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양가에 손벌릴 형편도 안되었다. 형수네는 동네 과일가게를 하면서 근근이 생활했고 예림네는 모친 혼자서 문구점을 하고 있던터라 딱히 돈 나올 구멍이 없는 것이다.
“어떡하지?” 예림이 저녁을 차리며 한숨을 내쉰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 물기를 털며 형수가 말한다. 복권이라도 살까?
“지금 농담이 나와?” 예림은 눈을 흘긴다.
예림은 다음날 마지막 레슨을 끝내고 원장실을 찾는다. 이 피아노 학원에서만 5년째 일하고 있는터라 부탁하면 들어줄지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가불? 얼마나?” 원장은 마뜩치 않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원장을 대하자 예림은 말문이 턱 막힌다. 그래서, 그냥 1년치만...하자, 그렇게 많이? 라고 한다. 그래봐야 2000이 조금 넘는 돈이지만, 여기저기서 조금씩 융통을 해보자는 심경이었다.
“그건 좀 어렵고 6개월치는 안되나?” 원장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다. “그럼 그거라도 부탁드려요” 하자 원장은 그 자리에서 6개월치 예림의 급여를 이체해준다. 그렇게 1000이 조금 넘는 돈은 마련됐지만 나머지 9000은 어디서 구하나, 하며 학원을 나서는데, 형수의 전화가 걸려온다. 동창회가 잡혀 조금 늦는다고 .
그날, 자정이 다 돼서야 형수는 술이 불콰하게 올라 집에 온다. 뭐야, 잔뜩 먹었잖아,예림이 타박하자, 먼저 자라고 했잖아,라며 그녀를 안으려고 한다. 술냄새, 하며 그녀가 그를 밀쳐내자, 치, 하고는 옷도 다 벗지 않은채로 자려고 한다. 씻구 자, 예림이 형수의 웃옷을 벗기는데 웬 명함이 툭 떨어진다. 명함이네? 하자, 아, 오늘 받은거....하면서 진규의 이야기를 꺼낸다.
둘은 고교 3년동안 내내 같은 반이었고 둘다 농구부였다고. 그 자식 집이 잘살아, 하며 괜히 형수가 으스댄다. 그게 뭐,라고 예림이 뵤루퉁해하자, 대대로 요식업을 해왔다며 궁금해하지도 않는 예림에게 진규의 사진을 보여준다.
모임에서 찍은거 같다. 진규라는 형수의 동창은 이미 머리가 벗겨지고 있다. 늙었다,예림이 흉을 보자, 야, 우리 나이에 나같이 자기관리 하는 사람없어. 행복한줄 알어,라며 그가 예림을 안으려한다. 땀냄새, 술냄새 난단말야,하며 예림은 그를 강제로 욕실로 떠다민다.
“진규한테 얘기좀 해볼까?”
은행에서 퇴짜를 맞고 온날 형수가 불쑥 말을 꺼낸다.
“누구, 자기 동창?”
“응..”하고 그는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돈 얘기 꺼내면?”
“그치 ?”하고 형수는 포기하는 눈치다.
예림은 며칠 자기가 생각해온걸 이야기한다. 우리 이참에 아예 서울을 벗어나는게 어때,하고. 지금도 너무 외곽이라 서울이라 하기 뭐한 곳이지만 아예 서울을 벗어나는것과는 또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지 형수는 딱잘라 안돼,라고 반대의사를 밝힌다. 힘들어도 어떻게든 서울에 자리잡아야지 한번 나가면 돌아오기 힘들다는게 그의 생각인듯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형수와 나란히 앉은 진규는 이미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형수와 진규는 동창회 이후 자주 만나 술을 마시는것으로 예림은 알고 있다.
“미인이십니다 제수씨” 하며 진규가 조금은 느끼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리고는 셋이 밥을 먹는 내내 틈만 나면 예림에 대해 물어온다. 고향이며 출신대학, 지금 하는 일까지.....
“야, 짜샤. 남의 마누라 얘기 뭐가 그렇게 궁금해?” 형수가 면박을 주자, “나도 제수씨같은 여친 있음 좋을거 같아서”라며 그가 히죽거린다.
예림은 이해가 안간다. 좀 겉늙은 느낌은 있지만 그 배경에 여태 장가를 안갔다는게..나중에 집에 돌아와 형수가 말한다. 1년 살고 헤어졌대. 애없이....아, 그렇구나, 예림은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다. 누구 없어? 하고 형수가 묻는다. 누구? 여자? 글쎄....하던 예림은 진규와 같은 돌싱인 대학 동창 진혜가 떠오른다. 진혜 이야기를 하자 형수는 딱 좋네,한다.
그렇게 해서 일주일 뒤, 예림은 진혜를 진규에게 소개시킨다. 진혜가 은행원이라고 하자 진규는 헤벌쭉 좋아한다. 그 표정을 형수는 유심히 바라본다.
“ 잘 어울리지?”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예림이 형수에게 묻는다. 그러자, “글쎄”하며 형수가 애매하게 대답한다. 잘되면 좋을텐데..라며 그가 덧붙이는게 조금은 어색하다고 예림은 생각한다. 그날밤 진혜로부터 전화가 와서 둘이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예림은 듣게 된다. 잘됐대, 라고 형수에게 말하자, 그래? 하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뭐야 이반응은? 예림이 묻자 형수는 피곤하다며 잠을 청한다.
“근데 우리 남은 9000은 어디서 구하지?” 예림이 형수 옆에 누우며 말하자 “어떻게 되겠지”라고 그가 답한다.그야말로 복권이라도 당첨이 돼야 해결된 사안이라고 그녀는 체념한다.
“둘이 자주 만나?” 보름후 예림은 진혜에게 전화로 묻는다. 그러자, “우리 안만나”라고 그녀가 대답한다. 지난번 에프터 받았다며? 했더니, 그렇게 한번 더 만나고 더 이상은 연락이 없다고 한다. 그렇게 만난날, 진규는 내내 예림의 이야기만 했다고 진혜가 덧붙인다.
내 얘기? 친구 여자란걸 아는데 왜?라고 되묻고 싶어진다. 그러자 진규의 느끼하던 미소가 떠오르며 속이 안좋다. 형수가 옆에 있는데도 빤히 자기를 바라보며 이것저것 캐묻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진혜와 통화를 끝내고 나니 예림은 궁금하다. 형수도 알고 있을까?
그날저녁 퇴근한 형수에게 예림이 언질을 준다. 진규라는 친구 멀리하라고. 그러자, 그가 발끈해서, 왜? 하고 내뱉는다.. 그냥, 느낌이 안좋아,라고만 예림은 답한다. 어떻게 그가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할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형수는 그이후로도 꾸준히 진규를 만나는 눈치다. 그 사이에 집주인은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와 어떻게 할거냐고 닦달한다. 조금만요,하며 예림은 애걸하듯 말미를 달라고한다.
“이번 주말 비워둬”라며 출근하던 형수가 말한다. 왜?하고 묻자, 비워둬, 라고만 한다. 중요한 모임이라도 있나보다 싶어 예림은 진혜가 주말에 보자는걸 그 다음 주말로 미룬다
그리고는 그 주 토요일 점심이 되자 형수는 예림을 데리고 여의도로 향한다. 어디 가는데?라고 물어도 형수는 답을 안한다. 뭐야? 어디 가는데? 다시 그녀가 묻자 진규를 만나기로 했다고 대답한다. 나 그 사람 싫어,라고 하지만 진규는 들은체도 않는다.
예림을 본 진규는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 진규의 속내를 알기에 예림은 더더욱 불편하기만 하다. 그렇게 자리잡고 앉자 진규는 자기회사가 새로 프랜차이징한 식당이라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형수와 예림에겐 묻지도 않고 특식세트를 주문한다. 메뉴판을 힐끔 본 예림은 거기 적힌 가격표에 적잖이 놀란다. 그걸 눈치챈 형수가 표정관리하라는 눈치를 준다.
진규는 묻지도 않은 진혜 이야기를 꺼낸다. 괜찮은 사람인데 자기와는 맞지 않는거 같다고. 그러자 형수가 거든다. 사람 인연은 모르는거니 더 만나보라고. 그러자, 됐어, 하며 그가 손사래를 친다. 그러더니 지난번처럼 빤히 예림을 쳐다본다. 야, 내 마누라 닳아,형수가 면박을 주자, 어디 예림씨랑 똑같이 생긴 사람 없어요? 라며 너스레를 떤다. 예림은 빨리 이 자릴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더니 진규는 궁금해하지도 않는 자기 사업 이야기를 줄창 해대다 언제 여행이라도 같이 가자고 한다. 그리고는 예림의 반응을 살핀다. 더이상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참기 어려웠던 예림은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형수도 피곤했는지, 나중에 또 봐,하며 같이 일어난다. 진규는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차장까지 배웅한다. 야, 너 차가 이게 뭐야,하며 형수의 차를 보고 그가 혀를 찬다. 차 바꿔 주랴? 하는 진규의 말에 예림은 먹은게 다 올라올 지경이 된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형수가 새삼 확인한다. 우리 9000 필요한거지? 라고. 다 아는걸 뭘 새삼 묻는가싶어 예림은 대답대신 진규를 다신 보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형수는 그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 눈치다.
그러더니 며칠후, 퇴근 무렵이 다 돼서 형수는 예림에게 회사근처로 나오라는 전화를 한다. 왜? 했더니 저녁먹자구,라고 그가 대답한다. 단둘이하는 외식이 한참만인지라 서둘러 레슨을 끝내고 그녀는 택시를 잡아탄다.그렇게 도착한 회사근처 레스토랑엔 진규와 형수가 먼저 나와있다. 진규를 본 예림이 입구에서 머뭇거리자 형수가 와서 팔을 끈다. 뭐해, 안오고..
그렇게 다시 진규를 본 예림은 마지못해 눈인사를 건넨다. 그날도 주문은 진규가 독단적으로 한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그녀는 다짐한다. 그렇게 주문한 세트메뉴가 나오고 디저트가 나올 무렵, 형수가 잔업이 남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나도 가,하고 예림이 따라 일어나자, 넌 좀 더 있어. 하고 형수는 그녀를 다시 앉힌다. 왜?하고 쳐다보지만 형수는 진규와 악수를 나누더니 바삐 레스토랑을 나간다. 예림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싶다...그러고 있는데 진규가 예림 옆으로 자리를 옮겨앉는다. 예림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다.
그날밤 늦게 예림의 귀가시간에 맞춰 형수에게 돈 1억이 입금된다. 9000 필요한거 아니었어? 예림이 형수를 쏘아보며 내뱉자, 차도 좀 바꿀까 해서,라며 그가 싱글벙글한다. 있는대로 지친 예림은 어서 빨리 잠들고 싶을뿐이다.그리고는 옷도 벗지 않은채 침대에 몸을 던진다. 그러자 형수가 말한다. 씻고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