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가 뭐라고.

#임신 #입덧

by 바다엄마

6주가 될 때까지 꾹 참고 참았다가 병원에 갔다.

동그란 난황이 보이면서 임신 사실을 확인받았지만 아직 아기가 작은 건지 심장소리는 듣지 못했다. 신기한 건, 두려워하는 엄마의 마음을 다독이듯이 입덧이 시작되었다는 거다. 입덧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아기가 뱃속에서 잘 자라고 있다고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엄마, 나 여기 있어요. 걱정 마세요."


나의 경우에는 먹덧이라고 해야 하나.

아침에 일어나면 미친 듯이 허기가 몰려오면서 울렁거렸다. 샤워를 하면서 제대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현기증이 났다. 출근길에 운전을 하면서 김밥이든, 라면이든 뭐라도 입안에 욱여넣어야 속이 조금 진정됐다. 입덧 때문에 정말 힘든 날에는 회사에 도착해서 주차를 해놓고 시트를 뒤로 젖혀 한참을 누워있다가 사무실로 들어가곤 했다. 요망한 입덧 덕분에 세상 모든 엄마들의 위대함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도 입덧 중인 엄마들, 정말로 위대하십니다.


입덧은 임신 중기까지 계속되었다. 입덧하는 동안 내가 주로 먹었던 것들은 새콤한 냉면, 멸치육수가 인상적인 잔치국수, 새콤달콤 레몬맛, 돈시몬 자몽주스.

고기종류는 아예 입맛이 당기질 않았고, 특히 돼지고기는 냄새부터 너무 역해서 삼겹살 구워 먹는 게 가장 행복한 남편은 한동안 집에서 고기 굽기가 금지되었다. 자기한테 고기 구워 먹지 말랬다고 아직도 이야기하는 남편이다. 당연한 거 아니니. 너는 하나고 나는 둘이잖아.


입덧과 관련된 에피소드 중 최고 정점은 국수사건이다. 남편은 가끔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국수사건이지만 당사자인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서럽고 짜증스러운 그 사건.

입덧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게 한정적이었는데 그날따라 뜨끈한 잔치국수가 너무 먹고 싶었다. 남편한테 집에 올 때, 근처 국숫집에서 포장을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왜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오질 않았다.

"띠띠띠띠띠띠"

현관문을 열고 남편이 가져온 국수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뜨끈한 국물 한 모금, 야들야들한 면발 한 젓가락이 너무 그리웠다.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본 국수는 여지껏 내가 본 국수 중 최악. 면발은 다 불어 터지고 국물은 다 식어버린 잔치국수. 랍스터, 푸아그라, 캐비어, 스테이크 같은 귀한 음식도 아니고 잔치국수 하나 맛있게 먹고 싶다는데. 하루 종일 입덧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해 배고픈 상황에서 짜증은 올라올 대로 올라온 상태인 데다가 겨우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그 모양이라 참았던 짜증이 폭발해 버렸다.

나의 짜증은 울분으로 이어졌다. 식어빠진 국수를 한 입 먹자마자 눈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나 안 먹을래. 자기 먹어."

하고 방 안에 들어오는데 안절부절못한 남편이 따라 들어왔다.

"왜 그래...?"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 엉엉, 겨우 먹으려고 하는데 상태가 왜 저렇게 거지 같아, 씨 X, 엉엉, 임신 진짜 거지 같아, 나만 힘들어, 나만!!! 엉엉엉, 억울해!!! 억울하다고!!!"

앉은자리에서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나만 힘든 것 같은 억울한 마음과 너는 편한 것 같은 서러움, 이것마저 마음 편하게 맛있게 먹지 못하게 하는 상황이 너무 짜증 났다.


임신 기간 동안 남편한테 이거 먹고 싶어, 저거 먹고 싶어, 이거 사다 줘, 저거 사다 줘.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국수사건으로 한동안 남편은 내 눈치를 보게 되었다. (하긴, 그동안 너무 안 보긴 했지.)

평소였으면 그냥 데워 먹으면서 넘겼을 일인데 그날따라 왜 진정이 안 됐는지. 호르몬 때문이었으려나. 국수가 뭐라고.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고 서러운 일이다. 임신 중에는 말 한마디의 힘이 정말 크게 느껴진다. 특히 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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