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덕 Oct 19. 2021

열 땀 눈물 갱년기를.


홍조 따위는 괜찮다. 하지만.....

찬바람이 훅 는 가을이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을가을하다. 도톰한 재킷이나 카디건을 걸친 사람들 사이에서 난 여름을 연상케 하는 반팔, 그것도 민소매 티를 입고 있다.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고, 심지어 겨땀까지 터지고 있다.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가을 옷차림은 아니기에 신경이 쓰였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빨개졌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까 홍조 따위는 괜찮다.


하지만 땀은 감출 수가 없다. 얼굴에 있는 모든 땀구멍이 다 같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 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갑자기 솟구치는 땀에는 속수무책이 된다.


저녁 장을 보던 중이었다. 이미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식재료들에 휴대용 휴지만 집어서 재빠르게 계산했다. 몇 장을 뽑아 얼굴에 쉼 없이 흐르는 땀부터 제거했다. 마스크는 벗을 수가 없으니 그 안에서 흐르는 땀의 쫍쪼름함을 기어이 맛봤다.


땀을 닦고 밖으로 나오니 후끈거리는 열감은 사라졌다. 여유롭게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고 "헐~~" 소리가 절로 났다. 광활하게 넓은 이마와 오른쪽 눈 주위에 하얗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휴지 쪼가리들! 내 마음도 쪼가리가 났다. 땀을 닦은 게 아니고 휴지를 붙인 꼴이 되었다. 이런 꼬라지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사거리를 건너 집으로 걸어온 거였다.


거울 속 웃픈 내 모습 화도 나고 서럽기도 하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짧은 시간 동안 격하게 겪은 갱년기 증상들이었다. 화끈거리는 열, 땀 그리고 눈물까지.


발산되지 못했던 열이 수십 년간 내 속에 쌓여있다가
드디어 터진 것이다.


착한 딸 콤플렉스가 심했던 나는 사춘기 열을 제대로 분출하지 못했었다. 학교에서도 착한 모범생의 역할에 충실했었다. 남들 시선을 신경 쓰며 조심스럽게 살았었다. 그러다가 갱년기를 맞이한 것이다. 젊은 시절 뜨겁게 살지 못해서 그 뜨거움을 지금 겪고 있는 건가?라는 비합리적인 의심도 든다.


숨겨왔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걸까?


마치 사춘기 아이처럼 모든 게 반항거리고, 시빗거리다. 상대방이 내뱉는 말에 별 뜻이 없음을 알면서도 감정이 폭발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사춘기 때 하던 말인 '개빡친다'는 그 말이 내 입에서 거침없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평생 못 할 것 같았던 욕도 찰지게 한다. 목소리도 커지고 화를 내기도 한다. 그렇게 날카롭게 발톱을 보이다가 금방 기가 죽고 우울해진다.


주변을 배려한다는 핑계로 '좋은 게 좋은 거야' 라며 살아온 지난날이 회가 된다. 나쁘고, 불편하고, 부당하다고 느낀 것들을 솔직하했어야 했다. 참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정작 필요했던 자신을 위한 배려는 없었다.


몸안에 쌓아 놓기만 했던 몇십 년 묵은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느낌이다. 시간이 흘러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 차마 터트리지 못한 그때 그 감정들이 화병이 되어 갱년기 열로 발산되는 것이 아닐까?


머리와 심장에 꽂혀서 삭지도 않고 남아 있는 섭섭함과 분노... 갱년기 땀, 눈물과 함께 그 감정들이 노폐물 같이 분출되길 바란다. 그렇게 양껏 쏟아낸 후 뾰쪽하게 날이 선 마음이 진정되고 이 갱년기가 끝났으면 한다.


사춘기 때는 착한 아이 병에, 성인이 된 후에는 착한 딸, 착한 아내, 착한 엄마, 착한 며느리 병에 걸려서 꽁꽁 숨겨놨던 열을 지금에서야 내보내고 있는 갱년기! 더 이상 감출 수 없어서 뿜어져 나오는 열과 땀을 연료로 쓰면서 열정적인 삶을 살아보기로 한다. 인생 2차 발효인 갱년기를 당당하고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마들렌의 귀여운 똥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