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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 Aug 30. 2023

이끼숲_천선란

찬란한 슬픔, 그리고 닫힌 세계

 


 <천 개의 파랑>의 콜리, <랑과 나의 사막>의 고고를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으나 전혀 달랐던 <이끼숲>의 아이들.

 천선란 작가님은 2019년부터 지금까지 대체 몇 권의 책을 내신건지, 아직도 못 읽어본 책들이 많다. 작가님의 머릿속에는 우주가 들어있을까, 로봇이 들어있을까, 숲이 들어있을까? (잠깐만 구경하고 나오면 안 될까요?)

 찬란한 슬픔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면 이끼숲을 찾아가자.







1. 이야기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은 땅 아래에 지어진 지하도시이다. 지하도시에서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을 때에도 자산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몇 명의 아이를 낳을 것인지를 보고해야 하며 규정에 따라 모든 것을 처리한다. 그렇게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는 칩이 내장되어 있다.

 이곳의 아이들은 15살이 되면 가정에서 독립해 지정해 주는 숙소로 떠나고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VA2X'라는 약을 복용해야 하는데, 약을 끊으면 우울, 정신착란과 같은 부작용을 겪을 수 있고 그때는 정신재활원에 강제 입원하게 된다. 이 약은 무료가 아니기에 모두 약을 사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그렇게 지하도시의 노동자가 된다.


 <바다눈> - 마르코(은희)

 지하도시에서 경비일을 시작한 열다섯 살의 소년 마르코의 이야기.

 언제나와 같이 회색의 칙칙한 철문을 지키던 마르코에게 어디선가 익숙한 언어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은희였다.

 마르코는 은희를 통해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장소, 음식, 감정까지도.

 그러던 어느 날, 직장에서는 파업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마르코에게 항상 다정하고 친절했던 키커스 선배 역시 파업에 동참했다. 마르코는 그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빠진 자리를 채우기 위해 추가근무를 하며 지냈으나, 파업이 장기화되자 그로 인해 양가감정을 느끼고 괴로워하며 선택을 유예한다.


 <우주늪> - 의조와 의주(치유키)

 의조가 의주에게 쓰는 편지.

 의조는 숨어 지낸다. 숨어 지내야만 하는 존재이다.  의조는 의주를 원망하고 자신의 상황에 분노하지만, 그 어디에도 의주의 잘못은 없으며 자신의 탓도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러다 치유키가 환풍통로에 숨어있던 의조를 발견하고 글을 가르쳐주게 되면서 의조는 치유키에 대한 여러 비밀을 알게 된다.

살리는 일을 하는 줄 알았던 치유키가 사실은 죽이는 일도 했다는 것을, 치유키의 몸에는 나이테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이끼숲> - 소마와 유오(톨가)

 식물을 사랑하는 유오와 그런 유오를 사랑한 소마. 사고로 인해 유오를 잃고 모든 것이 멈춘 소마는 정신재활원에 강제로 입원하기 직전이다.

그때, 친구들은 곧 폐기되는 유오의 클론(사고를 대비해 인공적으로 교체할 수 있는 복제인간과 같은 것)을 함께 구해내기 위해 소마를 데리러 온다. 아이들은 유오의 클론을 유오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지상세계의 숲을 옮겨두었다는 '돔'으로 데려가기 위해 작전을 짠다.




2. 생각하기

 천선란 작가님의 다정하고도 따뜻한, 너무 순수하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장면보다는 안쓰럽게 투쟁하는 장면들이 주가 된다.

 아이들의 맑고 순수했던 첫 모습은 지하도시의 현실을 알아가면서 생존을 위한 투쟁에 지쳐가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 아이들에게 '생존'이란 전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의조에게 생존이란 '존재'였으며 유오에게는 '식물'이었고 소마에게는 그런 유오가 생존이었겠지.  


  <바다눈>에서 지하도시라는 배경이 처음 드러나고, 인구 정책, 의문의 소리 등의 또 다른 단서들이 등장한다. 그 단서들은 <우주늪>에서, 또 <이끼숲>에서 하나씩 풀려나간다.

 아, 이 책이 연작소설이었구나! 그게 이런 식으로 연결된다는 뜻이었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순간이 짜릿했다.

 마르코, 치유키, 의주와 의조, 유오, 소마, 톨가. 이야기가 시작할 때 열다섯 살이었던 아이들은 이야기가 모두 끝난 지금 몇 살일까? 이 모든 일이 1년 사이에 일어난 일일까, 아니면 마르코의 키와 덩치가 커진 만큼 시간이 더 흘렀을까?

 아니, 그들의 이야기가 정말 끝이 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부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바다눈>에서 마르코가 한 '유예'라는 선택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싶다. 마르코는 어떤 쪽도 감당할 수 없어서, 도망치고 싶지는 않지만 깔리고 싶지도 않아서 선택을 '유예'했다. 누군가는 이런 마르코에게 비겁하다고, 용기가 없다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유예'역시 하나의 선택일 수 있음을 존중받길 바란다. 사람마다 각자 놓인 상황은 다르고 말로는 서로를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도 많으며 같은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는 수준은 모두 다르다는 것을 부디 받아들여주길.


 예전에는 열린 결말을 매우 싫어했다.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는 상관없이 꽉 닫힌 결말을 좋아했다.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의 기쁨보다는 결과를 알 수 없다는 답답함이 더 컸던 듯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고 나서는 아이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상상해보고 싶어졌다.

 마르코는 다시 별을 보고 있을까? 은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의조는 지금 어디쯤 도착했을까. 치유키는 아직도 몸에 나이테를 그리고 있을까. 하는 것들 말이다.  


 앞서 아이들의 순수함이 투쟁으로 인해 지친 모습으로 변화했다고 표현했다. 그 뒤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환경에 순응하고 묵묵히 생명을 연장하며 살아갔을까?

 그들은 처음의 순수한 열망을, 가치를 지켜내는 선택을 한다. 아이들은 도전했고, 숲을 향해 달렸다. 아이들은 슬퍼했으며 절망하여 멈춰 섰지만, 결국 서로를 그 지하도시에서 구해냈다.  


 마르코의 선배부터 은희, 의조, 유오의 클론까지. 그들은 분명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러나 그 문제를 대비하거나 예방책을 세우기보다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 어떻게 대처하고 넘어갈지만 고민하며 책임은 언제나 개인에게 돌린다. 이런 일들이 지하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터이다.

 작가님은 '구해내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하셨다. 그다음 쓰인 한 문장이 한동안 계속 마음속에 떠다닐 것 같다. '구한다는 건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막는 것인데 나는, 우리는 언제나 일이 일어난 뒤에야 그곳이 위험했음을, 우리가 위태로웠음을, 세상이 엉망이었다는 것을 안다. 항상 먼저 간 이들이 남은 자들을 구한다.'




3. 물음표

존재하지 않는 삶 vs 존재하기에 모든 것이 감시당하는 삶
나에게 '생존'이란 무엇인가?
'클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을까?













'별다른 방법이 있겠어? 마르코, 알다시피 여긴... 닫힌 세계야.'
우리는 우리가 멍청하다는 걸 좀 알아야 해. 우리가 정한 기준과 규칙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죽고 싶다는 마음은 가볍고 산뜻해. 땅에 발이 닿지 않아서 어떠한 무게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날아가고 싶은 거야. 더 드넓은 곳으로. 그러니까 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치유키를 몰아세우거나 다그치지 않았으면 해. 너무 가벼워서 너의 센 입김으로도 날아갈 수가 있거든. 치유키의 몸에는 그래서 흔적이 많아. 날아가고 싶을 때마다 몸에 표시를 해두었거든. 나이테 같은 거.
세계를 지배한 절망보다 나약하게 핀 희망을 사랑했을 테니까.
먹먹한 슬픔을 덮고 있더라도, 언젠가는 이불처럼 잘 포개어 옷장에 넣어둘 수 있을 줄 알았어. 가끔씩 꺼내 덮었다가 언제든 접어 넣을 수 있게. 비록 지금은 그 무게에 눌려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소마, 나는 우리가 이끼였으면 좋겠어. ... 고귀할 필요 없이, 특별하고 우아할 필요 없이 겨우 제 몸만 한 영역만을 쓰면서 지상 어디에서든 살기만 했으면 좋겠어. 햇빛을 많이 보기 위해 그림자를 만들지 않고, 물을 마시지 못해 메마를 일도 없게. 그렇게 가만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거야. 시시하겠지만 조금 시시해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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