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없이 빈 벽을 선택한 이유

우리 집의 정체성

by 페이퍼


드디어 침대를 비웠다. 프레임을 해체해서 내다 놓으니 수거비 18,000원이 나왔다. 다음 날 현금으로 관리실에 갖다 드렸다. 집이라면 응당 침대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치우고 나니 홀가분하기만 하다. 고장이 나서 버린 건 아니다. 이사 오면서 구입했고 3년 넘게 사용했다. 좋아하는 회색이었다. 쓸 만큼 썼고 이제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빈 벽이 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 벽.


침대가 있던 풍경


침대를 비운 현재


수납장은 반대편으로


보일러를 넣기 때문에 방바닥은 따뜻하다. 그래서 이불을 하나는 깔고 하나는 덮고 잔다. 첫날은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졌다. 책상과 의자는 작은 방에서 가져왔다. 책을 보고 글을 적는데 요긴하게 쓰인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낸다. 집에 등을 대고 앉을 곳은 반드시 필요하다.


언젠가는 꼭 침대를 비우고 싶었다. 바닥 생활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에겐 오직 빈 벽이 필요했다. 침대를 비우자 내 목소리가 벽을 치고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소리가 울리자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작고 신중하게 말하게 되었다.



이삿날이 아니면 볼 수 없을 것 같던 빈 벽이 생기자 왠지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빈 공간을 바라보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차분해진다. 공간이 주는 충만함이 휑한 기분을 압도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자주 등을 돌려 빈 벽을 바라본다. 언젠가 이 집을 떠날 때 이 벽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잘 지내게 해 줘서 고맙고 보금자리가 되어줘서 좋았다고. 덕분에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하지만 그러려면 아직 5년이나 남았다.)



우리 집은 15평의 작은 아파트이다. 나는 여기서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하루를 정리한다. 또 싱크대에서 쌀을 씻고 밥솥에 안쳐 밥을 해 먹는다. 햇반을 돌려먹을 때와 밥솥에 밥을 앉혀 해먹을 때 느낌은 다르다. 밥솥을 열고 따뜻한 밥을 퍼낼 때 그 구수한 냄새, 온기와 기분이 다르다. 그래서 나는 꼭 밥솥으로 밥을 해 먹는다. 언제나 따뜻하게 밥을 해 먹고 따뜻하게 잔다. 종종 사는 게 별 건가 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외로움, 지겨움, 인생에 가끔 드는 환멸, 스스로 작아지는 초라함이 몰려올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뜨거운 물에 나를 삶다시피 씻고, 뜨거운 밥을 뱃속에 든든히 채운다. 그러면 조금 낫다. 아예 없어지진 않지만 조금은 나아진다.


내 공간에 머물면서도 힘든 순간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나는 여기서 슬프게도 울었고 몇 번이나 119에 실려가기도 했다. 집도 나를 보호해주지 못하는구나.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했을 때 필요한 건 어쩌면 침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묻어온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복잡할 때는 도화지처럼 아무것도 없는 초기화가 필요했다. 작은 집은 고개를 돌려도 거기서 거기인지라 나에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는 빈 벽, 빈 공간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 벽은 나에게 분명한 위로를 주고 있다. 얼마든지 가구나 물건을 들일 수 있지만 그러지 않은 유일한 공간. 우리 집의 정체성. 불필요한 것은 없애고 텅 빈 채 살아가겠다는 마음. 더 늘리지 않겠다는 다짐. 물질적 욕망을 제거한 무소유의 공간.


집이 집답게 느껴지려면 물건이 아니라 공간 그 자체가 나에게 의미 있어야 한다. 내 의지대로 내 욕심대로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은 빈 벽. 그 하나가 나에게 충만한 만족감과 분명한 위로를 주듯이. 오랜 시간 이 빈 벽을 보며 내가 많은 위로를 얻게 되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뜨거워지고 또 다시 차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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