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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리 Dec 20. 2023

도비의 탈출 결심

제1장 번역하게 될 줄 몰랐어


졸업 전에 그토록 외국으로 나가고 싶어 했던 대학생 풋내기는 결국 새로 만든 여권을 꺼내 보지도 못한 채 한국 탈출(?)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외국 갈 기회를 얻지 못한 나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고 새로운 미래를 계획했고, 영어와는 정반대되는 국어학을 전공하고자 대학원에 진학했다.


영어학도 아닌 국어학이라니. 한편으로는 영어와 해외 생활에 큰 로망을 갖고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너무 무모한 결정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국어학에도 관심이 많았고, 특히 문법 관련 과목에서는 꽤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멀리 떨어져 생각해 보면, 나는 전반적으로 언어 자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떤 언어를 배우든지 그 언어에 깃든 문화적 요소를 접하게 되는데, 인간의 삶과 문화가 녹아 있는 언어의 흔적을 발견하는 과정을 좋아했다. 


국어학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박사과정에 진학할 계획도 있었다. 빨리 어떻게든 해외로 나가고 싶다는 욕망을 잠재울 만큼 대학원에서 배운 공부 방법과 연구 과정은 나를 또 다른 측면에서 성장하게 했다. 하지만 석사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시점에 정부에서 추진하던 연구비 지원 정책이 갑자기 중단되면서 나는 또 한 번 진로를 변경할 기로에 놓였다. 연구비 지원으로 간신히 석사과정을 공부했는데, 그 지원마저 없으면 학자금 대출로 공부를 이어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지만, 그렇게까지 큰 부담을 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근근이 먹고 살더라도 내 몸은 내가 건사할 수 있는 안정적인 상황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시작하고 싶었다. 결국 박사과정에 입학할 계획은 잠시 뒤로 미뤘다.


이상보다는 현실을 택하기로 한 후, 본격적으로 밥값을 벌기 위한 생계 활동에 돌입했다. 전공을 살려 일할 방법을 찾으며 취업 준비를 한 끝에,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언어 데이터를 만드는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에 탑재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거나 사용자를 대신하여 인공지능이 전화를 걸고 문자를 써 주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이 주목받았다. 어떤 휴대전화 제조사의 인공지능이 더 똑똑한지 대결하는 유튜브 영상도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처럼 당시 인공지능이 탑재된 휴대전화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간혹 사용자의 말을 못 알아듣고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 때는 포털 사이트를 도배할 만큼 엄청난 항의와 악플이 빗발쳤다. 


직접 그 데이터를 생성하는 입장에서 남들에게 잘 알려진 일을 한다는 뿌듯함에 어깨가 으쓱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상사의 긴급 호출이 떨어질 때면 잔뜩 긴장한 채로 팀원 전체가 불려 가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를 숙이고 모든 감정적 발언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회의실에서 나올 때마다 심장이 너덜너덜해지는 듯했고 ‘나는 어디?, 여긴 누구?’를 되뇌었다. 분명 모두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하는 일인데, 책임을 회피하고 결과만 빨리 얻으려는 이기적인 사람들 틈에서 소수의 인원만이 그 모든 부담을 지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는 20대 중반을 지나던 때였다. 지금이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실감하지만, 당시에는 20대가 내 인생의 황금기라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직 젊을 때’ 하나라도 더 경험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다. 만약 무모하게 무슨 일을 저질러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믿었다. (30대가 된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지만, 회사 내에서는 일을 잘한다, 꼼꼼하다, 성실하다는 얘기를 들으며 내 능력을 인정받는 아이러니한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잘못도 아닌 꼬여버린 업무 시스템 때문에 벌어진 일에 습관처럼 ‘죄송합니다’를 뱉어 버린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충성스러운 도비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퇴사한 나를 보던 가족들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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