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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리 Dec 20. 2023

나도 해외로 나갈 수 있을까?

제1장 번역하게 될 줄 몰랐어

친구들이 신화의 Brand New라는 노래에 맞춰 초등학교 학예회 준비를 할 때도, 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Baby one more time을 흥얼거리며 아메리칸드림을 꿈꿨다. 내가 앉아 있는 6학년 1반 교실은 나에게 너무 작은 세상이었다. 틈만 나면 어떻게 공부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갈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아쉽게도 그 답은 6학년 1반 교실과 작별할 때까지도 찾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중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내 노력은 끝난 게 아니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공부 말고 어떻게 하면 외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을지가 내 최대 관심사였다.  


여전히 외국 문화를 경험할 만한 기회를 찾던 어느 날, 복도 게시판에 붙은 교내 일본문화 동아리 포스터를 발견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포스터를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중학생인 내가 외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은 그 포스터에 적힌 일본문화 동아리 활동밖에 없었다. 결국 쉬는 시간에 다시 그 포스터 앞에 서서 ‘그래, 이 정도면 딱히 나쁘지 않은 것 같아’라고 내면과 타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하교하기 전에 담당 선생님께 동아리 부원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아마 영어 관련 동아리가 있었다면 분명 그걸 선택했겠지만, 당시 내 가입할 수 있었던 동아리 중에서는 일본문화 동아리가 유일한 외국 문화 동아리였다. 뜻하지 않게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배워야 했지만, 이웃 나라의 새로운 문화를 배우는 것도 생각 외로 나쁘지는 않았다. 일본 문화 체험이라는 명목으로 방학 때 3박 4일간 일본에 다녀온 것도 즐거웠다. 성인이 되면 TV에 나오는 멋진 커리어 우먼들처럼 나도 마음껏 해외를 누비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품었다.


고등학교에 간 후에는 영어신문편집부에 가입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의미 없는 선후배 서열 문화에 휘둘려 제대로 영어를 익히고 체험해 볼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생활기록부에 한 줄 기재할 내용이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아메리칸드림은커녕 그저 ‘입시’ 하나만을 고민하며 3년의 세월을 보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수능을 치렀고, 실질적인 노력 없이 막연한 꿈만 좇았던 탓일까. 뜻대로 되지 않은 점수를 보고 나는 대학을 포기했다. 재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냥 가만히 멈추고 싶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다시 짚고 목표를 세운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부터는 내가 직접 내 용돈을 벌어야 했기에 시내의 한 카페에서 몇 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면서 어느 유학원의 광고를 보고 미국 대학 입학 설명회에 갔다. 설명회 담당자는 토플 점수가 없어도 조건부 입학으로 미국 대학생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부모님께는 첫 1년만 도와 달라고 말씀드렸다. 1년 후에는 내가 직접 아르바이트하면서 학비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유학원 담당자에게 필요한 서류를 물으며 하나씩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인해 환율이 1,500원을 돌파했고, 당초 예상했던 비용으로는 학비를 낼 수 없었다. 결국 유학을 포기해야 했고, 준비했던 입학 서류 뭉치에 먼지가 뽀얗게 앉을 동안 무기력한 상태로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앞으로 뭘 할지 결정한 것도 없었지만,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수능 접수 마감일 이틀을 앞두고 시험 접수를 했다. 첫 수능 이후로 어떠한 공부도 한 적이 없었기에 내 수능 점수는 불 보듯 뻔할 것이었다. 동네 서점에 가서 EBS 수능 특강 교재를 몇 권 구입해서 집에 돌아왔다. 큰 기대도 없었고, 어떤 학과에 가야 할지도 몰랐다. 솔직히 나를 받아줄 대학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공부에는 딱히 소질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두 번째 수능시험에 응시했다.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없는 성적표를 쥐고 정시 대학 3곳에 지원했다. 당시에는 어떠한 의욕도 없던 상태라, 주변 어른들께서 하시는 ‘여자는 교사가 최고야’라는 말씀만 듣고 사범대에 지원했다. 내 성적에 쓸 수 있는 대학교 후보는 많지 않았다. 서울 수도권은 꿈도 꿀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행운의 여신이 오지 않는 이상 승산이 크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것처럼 가, 나군의 2곳에서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다군도 별로 희망이 없겠다 싶었는데, 방황하는 내가 불쌍했던지 마지막 대학에서는 너그럽게도(?) 합격 소식을 전해 주었다. 목표가 없었던 때라서 ‘합격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합격의 기쁨이 그리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롭게 다시 시작해 보자’라고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려 보니 지방에 있는 모 대학교 국어교육과의 학생증이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노래를 들으며 외국 문화에 심취했던 내가 훈민정음해례본에 밑줄을 치며 읽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대학 생활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고리타분할 줄 알았던 학과 공부는 재미있었고, 특히 풍부한 최신 연구 활동을 토대로 막 임용되신 젊은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며 한 가지 사안을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집안 형편상 유학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이왕 시작한 전공 공부를 게을리할 수도 없었다. 마음속 깊은 미련과 아쉬움이 남았던 탓에 친구들이 임용고시 준비에 열을 올릴 때 나는 교내 국제교류센터를 기웃거리며 내 전공 학점을 인정해 줄 만한 해외 자매 대학 찾기에 열중했다. 기회가 된다면 교환학생으로라도 꼭 외국에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사정으로는 교환학생을 신청할 시, 귀국 후 최소 한 학기 이상을 더 다니며 그동안의 공백 기간을 메꿔야만 졸업할 수 있었다. 자매결연 대학의 수강 과목 중에 국어교육과에서 학점을 인정해 주는 과목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추가로 한 학기 더 다니면 되지 뭐’하면서 가볍게 여기고 과감히 교환학생을 선택했겠지만, 당시 나는 앞을 멀리 내다볼 만한 식견도, 용기도 없었다. 가급적 추가 학점 이수를 할 필요 없는 학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지만,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만날 수 없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내 모교는 카자흐스탄의 모 대학과의 자매결연을 통해 현지 한국어교육과에 갈 교환학생을 모집하기도 했지만, 이미 마지막 학기를 코앞에 둔 시점이라 자격 조건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해외로 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지내던 어느 날, 교내 게시판에 부착된 KOICA 해외 봉사단원 모집 포스터를 발견했다. 게시물을 보자마자 나는 마음으로 쾌재를 불렀다. 외국에 나가고 싶다는 오랜 바람이 조만간 실현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집 공고를 본 후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지원 자격을 보았다. 나는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니, 한국어를 가르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기대를 품고 공고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자격 기준 사항을 마주하던 순간, 더 이상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지 못한 채 멈춰서야 했다. 화면 하단에는 한국어교육 단원으로 지원하려면 국어교육이 아닌 한국어교육 전공자이거나 한국어교육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졸업을 코앞에 둔 시점에 이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목적으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지금이야 한국어교육 자격증 취득을 위한 무료 교육 기관도 많고 비용도 적게 들지만,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아무튼 코이카 공고를 발견한 기쁨도 잠시, 당장은 지원 자격이 안 된다는 사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내가 생각했던 외국은 이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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