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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리 Jan 01. 2024

숨 참고 번역하기

제2장 번역가님, 잘 부탁드려요

첫 회사와의 업무 이후로 나는 더 적극적으로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공고의 수는 현저히 적었지만, IT 회사에서 번역가를 구인하는 경우가 있었다. 게임을 수출할 계획으로 현지화 작업에 참여할 번역가를 구하거나, 다국어 번역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현지어 능통자를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눈에 보이는 몇 개 되지 않는 공고들에 부지런히 이력서를 넣었다. 사실상 경력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코이카 활동과 이제 막 시작한 번역 일을 최대한 예쁘고 대단해 보이도록 포장했다. 이력서에 너무 과하게 힘을 주면 나중에 면접에서 다 들통이 날 텐데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30대 무경력자는 열심히 나를 어필할 수밖에 없었다.


몇 군데 이력서를 보내고 며칠이 지났다. 이력서를 열람했다는 알림이 떴지만 나에게 직접 연락이 온 것은 아직 없었다. 그렇게 더 며칠이 흐르고 드디어 이메일 알림 소리가 들렸다. 다국어 번역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던 한 회사에서 나에게 번역 테스트 제안 메일을 보낸 것이었다.



000 번역가님께 

번역가님, 안녕하세요!
저희는 다국어 번역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00000입니다. 번역가님께서 보내주신 이력서를 검토한 후, 인도네시아어 담당자 모집 서류 전형에 통과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다음으로 진행되는 번역 테스트에서도 합격하시면 저희 업무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로 접속하신 후 테스트에 응시해 주시면 됩니다. 제한 시간 내에 모든 문장을 번역 또는 리뷰해 주셔야 하며, ‘확인’ 버튼을 누르면 앞서 작성한 내용으로 다시 돌아가실 수 없으니 주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번역기 사용은 금지됩니다. 테스트 결과는 응시한 날로부터 최대 1주일 내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와~!” 


메일을 읽자마자 입 밖으로 흥분으로 가득 찬 감탄사가 나왔다. 비록 서류 전형 합격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줄줄이 서류 전형부터 탈락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큰 발전이었다. 곧바로 테스트 링크를 누르려다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주변 정리를 했다. 방해될 만한 요소는 모두 눈앞에서 치우고 휴대전화 진동음도 무음으로 바꿨다. 그러고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차분하게 테스트 링크를 눌렀다. 


테스트 문장은 총 100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의료, 법률,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내용들이 페이지마다 한 문장씩 제시되었다. 페이지 윗부분에 인도네시아어 또는 한국어가 있었고, 그 아래에 내가 번역문을 적고 확인을 누르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윗부분에 인도네시아어가 적혀 있다면 나는 한국어로 번역하면 되었고, 반대로 윗부분에 한국어가 적혀 있다면 이번에는 인도네시아어로 번역문을 적으면 되는 식이었다.


앞서 안내 메일에서 확인 버튼을 누를 시 다시 앞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한 문장을 작성한 후 집중해서 내가 번역한 내용의 말투, 용어 등을 점검했다. 특히 부주의로 인한 오탈자는 번역가의 이미지에 심각한 감점 요인이 될 것이므로 틀린 글자가 없는지 반복해서 살폈다.  


초반에 몇 문장을 진행하다 보니 페이지 상단에 조그맣게 떠 있는 시계 모양이 보였다. 번역을 몇 분 안에 끝내는지 시간을 재는 것 같았다. 아뿔싸. 시계를 보자마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모든 문장을 잘 번역했다고 해도 시간이 다른 사람보다 오래 걸리면 탈락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한 문장을 천천히 읽으며 확인했는데, 시계를 확인한 순간부터는 조금 더 빠르게 진행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는 평소에도 불안증이 있어서 외출 전에도 가스 밸브를 2~3번씩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래서 번역 테스트에 응시하는 와중에 이미 내 머릿속 생각의 99%는 ‘완벽해’라고 느꼈어도, ‘1%’의 불안함 때문에 (사실상 별문제도 없는 문장을) 반복해서 확인했다. 


어쨌든 야금야금 시간이 흐르는 게 보이자 과한 꼼꼼함은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부터는 나 자신을 일단 믿기로 하고, 반복해서 문장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번역 후에 두 번 정도 읽어보고 해석상 누락한 단어가 없는지 눈으로 빠르게 훑어본 후 미련 없이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렇지 않으면 세월아 네월아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계속 바라볼 터였다. 


절반 정도 번역을 마치자 이번에는 내가 번역하는 것이 아닌 기존에 번역된 내용에서 잘못된 점을 수정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그리고 문제가 될 내용이 없다면 그냥 ‘확인’을 누르고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앞서 번역할 때처럼 타자를 쳐야 하는 수고는 없었지만 대신 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문제였다. 리뷰는 아직 해본 적이 없어서 새롭게 느껴졌다. 해당 형식의 초반 문제는 오탈자 수준의 오류가 있는 문장이라서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오탈자 오류가 아니라, 통사적 구조가 잘못된 문장들이 나왔다. 읽었을 때 대강 내용 전달은 되지만, 주어와 술어가 뒤엉켜서 정돈되지 않은 문장의 형태였다. 


테스트 문장들을 눈으로만 읽고 머릿속으로 파악하려니 자꾸 분심이 들었다. 그래서 한 문장씩 소리를 내며 읽고 이상한 부분을 말로 먼저 고친 후 다시 소리 내어 읽은 후에 글로 정리했다. 이렇게 하니 머릿속으로 내용을 정리했을 때보다 직관적으로 틀린 부분을 찾아내기가 쉬웠다. 물론 앞서 치렀던 번역 테스트보다 리뷰 작업이 더 어려웠다.


마지막 문장까지 리뷰를 마친 후 ‘확인’을 눌렀다. 참았던 한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정해진 시간 동안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를 번갈아 가면서 빠른 속도로 번역을 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눈도 뻑뻑해지고 경직된 자세 때문에 몸은 조금 힘들었지만 오히려 머릿속이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뭔지 모를 뿌듯함에 직전까지 나를 압박하던 긴장감이 말끔하게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열심히 땀 흘리며 등산하고 마지막에 정상에 올라서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느낌이랄까. 번역에 머릿속 모든 에너지를 투입하다가 마지막 단어까지 마무리했을 때의 그 쾌감. 테스트 결과를 떠나서, 내가 그동안 끊임없이 찾아 헤맨 노동의 가치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이런 일이라면 평생을 바칠 수 있을 것 같다는 다소 용감한 생각도 들었다. 


20대 때 했던 회사 생활 중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아무리 야근을 많이 하고, 회사 내 중요한 업무를 맡아서 처리하느라 일에 파묻혀 살았지만, 막상 그 업무가 끝나고 나면 별로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연애 끝에 작별을 고한 후 미련 없이 뒤돌아 자리를 뜨고 싶은 기분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항상 스트레스가 가득했고, 업무가 끝나도 시원한 느낌이 아니라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싶었다. 


힘들 때마다 심호흡을 하며 내가 먼저 맡은 일에 좋은 의미를 부여해 보려고도 해봤다. 그러나 업무를 둘러싼 회사 내부 환경은 나를 더 몰아붙이며 단 한 평의 마음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회사의 무자비한 채찍질에도 나는 과감히 멈춰서서 나를 돌아볼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 하지만 그 채찍에 맞지 않으려 다리가 부러진 줄도 모르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제대로 된 당근 하나를 얻지도 못했는데 나는 왜 그렇게 쫓겨 다녔던 걸까.


 분명 회사 생활을 할 때는 번역 테스트에 응했을 때보다 더 큰 에너지를 쏟으며 일을 했다. 하지만 콧대 높은 윗분들의 싱거운 농담에 내가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지거나, 무엇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지 목적도 없이 그저 불나방처럼 달려들어야 하는 식의 일만 하다 보니 에너지를 많이 쏟을수록 뿌듯함도 없이 골병만 났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에 올랐는데 바람 한 점 없고 오히려 태양이 더 가까이에 있어서 열사병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하면 맞을까.


앞서 첫 번째 회사의 번역 테스트는 그나마 무난한 편이어서 잘 몰랐는데, 두 번째 회사의 번역 테스트는 나에게 적당한 긴장감을 주었다. 그 덕분에 번역 업무에 대한 나의 기대와 만족감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기쁘게도 두 번째 회사에서도 최종 합격 이메일을 받았다. 아무래도 첫 회사와의 업무 경험이 내 지원서에 플러스 요인이 된 것 같았다. 이렇다 할 경력도 없었던 내가 이제는 남들과 겨룰 수 있는 약간의 경쟁력을 갖추게 된 것 같아서 더욱 힘이 났다. 나처럼 낮은 스펙의 지원자도 경쟁력을 갖추고 남들과 겨뤄 합격선 안에 들었다는 점만으로도 내가 조금 더 성장한 듯했다. 


첫 번째 회사는 딱히 호칭을 부르면서 이메일을 보내주지는 않았는데, 두 번째 회사의 이메일은 언제나 ‘000 번역가님, 안녕하세요!’라는 경쾌한 인사로 시작했다. 나를 부르는, 나라는 사람을 정의해주는 번역가라는 호칭이 그저 감사하고 뿌듯했다. 그래서인지 첫 번째 회사보다 두 번째 회사에서 업무 메일이 올 때마다 조금 더 기분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들 땐, 펜을 들고 시간이 멈춘 장소를 찾아 그림으로 남긴다. -나무 젓가락으로 먹물을 찍어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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