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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리 Jan 01. 2024

첫 번역, 설렘의 시작

제2장 번역가님, 잘 부탁드려요


<구인 공고>
자격 조건 : 인도네시아어 능통자(나이 무관, 경력자 우대)
담당 업무 : 인도네시아어 번역
계약 조건 : 프리랜서 
급여 조건 : 회사 내규


자격 조건에 인도네시아어 능통자라고 적혀 있어서 망설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정성껏 지원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며칠 후 회사로부터 서류 전형에 합격했으니 2차 번역 테스트에 응시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메일로 받은 인도네시아어 문서를 시간 내에 (번역기를 사용하지 않고) 번역 후 회신해 달라고 했다.


문서의 내용은 마케팅 내용이었는데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이런 종류의 테스트가 처음이라 내가 잘한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말투가 너무 딱딱하지 않은지 걱정되기도 했지만 시간 내에 보내야 해서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남은 시간을 체크한 후에 번역 작업물을 회신하고서야 숨을 돌렸다. 


며칠 후 회사로부터 최종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사실 번역 테스트에 응시할 때까지만 해도 해당 회사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 알아볼 틈도 없이 일단 연락을 받았다는 것에 흥분해서 테스트를 잘 치러내는 데에만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최종 합격을 한 후에 회사 담당자로부터 회사에 대한 정보와 업무 내용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들었다. 해당 회사는 서울에 있는 외국계 회사였는데, 현지 시장 조사차 인도네시아어 담당자를 구한다고 했다. 계약 기간은 약 2주이고, 그동안에 회사 담당자들이 요청하는 인도네시아어 시장 정보를 번역해 주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외국계 회사라서 영어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내 작업물도 영어로 작성 후 납품해 줘야 한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어만 통과하면 될 줄 알았는데, 영어로 한 번 더 바꿔야 한다고 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담당자가 업무를 소개한 후에 참여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토익 점수와는 별개로 평소에 영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내 영작 실력을 알 길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었다. 토익으로 검증된 실력이란 오로지 듣고 읽는 것에만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중에 문제가 될까 싶어서 담당자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영어로 업무를 해본 적이 없어서 영작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지만, 열심히 해보겠다고. 다행히 담당자는 괜찮다고 해주었고, 번거롭겠지만 영작 후에 한국어로 핵심 사항을 따로 메모해 주면 혹시 부족한 부분을 자기가 보완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천사 같은 담당자의 배려 덕분에 나는 첫 번역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첫 회사와의 계약 이후 내 인생 최초로 시도하는 (밥값을 위한) 번역 업무는 순조로웠다. 국내 기업들이 인도네시아로 수출해서 판매하는 제품들에 대한 인도네시아 내 소비자 반응과 언론 동향을 모니터링한 결과를 번역했다. 내가 이미 써 보기도 했고, 잘 아는 제품들을 다룰 때도 있다 보니 먼 나라에 있는 얼굴 모르는 소비자들과 소통하는 기분도 들어서 재밌었다. 예를 들면, ‘예전에 우리 집에서 이 냉장고 쓸 때 소음이 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인도네시아 소비자들도 똑같이 느끼는구나!’라든가, ‘맞아. 그 제품은 예쁘긴 한데 기능 대비 너무 비싸지.’라면서 온라인상의 적나라한 인도네시아 소비자들의 반응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았다.


그렇게 신나게 몇 시간씩 모니터링을 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납품용 번역 작업은 뒷전이 되기도 했다. 아차- 싶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 회사에서 원하는 정보가 담긴 소비자들의 반응 및 언론 기사 등을 먼저 모았다. 취합한 내용을 정리하여 한국어로 번역한 후에, 회사에서 요청한 대로 다시 영작했다. 영작을 할 때면 정말, 토익 점수는 그저 세 자리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스펙용으로 철마다 당연하게 응시했던 토익. 나름 어디 가서 부끄럽지 않을 점수를 가졌다고 자신했지만, 정작 영어로 머릿속 생각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나를 보자 그동안 헛공부를 한 것 같아 씁쓸했다. 


말과 글로 내 생각을 분명히 표현하지 못한다면 결코 언어를 잘하는 게 아니라는 반성과 함께. 그런 의미에서 인도네시아어는 영어처럼 빛 좋은 개살구가 되지 않도록 유창한 실력을 갖추고 싶었다. (물론 가진 꿈에 비해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 나의 게으름을 잘 알았지만) 순발력 있게 말로 표현하는 것이 서투르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글로 표현하는 것이라도 잘 해내자고 다짐했다. 


자카르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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