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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리 Jan 03. 2024

글자 하나에 쌀 한 톨

제2장 번역가님, 잘 부탁드려요

처음 같이 일했던 두 회사의 계약 조건은 전혀 달랐다. 업무 기간도 달랐고 번역 금액과 번역료 산정 방식도 완전히 달랐다. 정리해 보자면, 


첫 번째 회사 / 프로젝트 1건당
번역료 : 총 70만원
작업 기간 : 2주 내 납품
두 번째 회사 / 프로젝트 1건당
번역료 : 단어당 200원
작업 기간 : 3일 내 납품


대략 이러한 금액이었다. 첫 번째 회사는 글자나 단어로 번역료를 책정하지 않았고, 기간 내 해당 업무를 완수하는 조건으로 총번역료를 책정해 주었다. 업무가 끝날 때마다 내가 납품했던 단어 수를 확인해 보니 약 1,000자 내외였다. 단어당 금액을 따지면 약 600원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첫 회사의 계약 조건이 너무 좋았던 탓에, 다른 회사들의 계약 조건이 상대적으로 안 좋게 느껴졌다. 하지만 첫 번째 회사는 번역 전문 회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통상 단어나 글자 개수로 번역료를 산정하는 번역 업계와는 다른 기준에서 작업료를 책정했다. 이것이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라는 점은 나중에 여러 회사와 일을 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더 많은 회사와 일을 해본 결과, 대부분 두 번째 회사처럼 단어당 얼마라는 식으로 계약했고, 가끔 글자 당 얼마라는 방식을 택하는 곳도 있었다. 단어를 기준으로 했을 때, 회사마다 책정한 번역료는 정말 천차만별이었다. ‘단어가 아니라 글자당 책정 가격을 잘못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박하디박한 번역료를 주는 곳도 있었다. 


가장 낮게 제안받은 금액은 단어당 20원이었다. 게다가 번역해야 하는 내용도 전문 번역에 해당하는 의학용 문서였다. 다행히(?) 집안일로 잠시 지방을 오가느라 바빴던 시기여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 회사에서는 번역료를 올려주겠다면서 추가 제안을 했다. 상향된 번역료는 2원 오른 단어당 22원. 


분명 나한테만 이렇게 제안한 건 아닐 것 같았지만, 그냥 좀 씁쓸했다. 

내 노동력의 가치가 고작 22원에 불과한 것 같아서. 


보통 사람들은 번역일이 상당히 쉽다고 생각한다. 

키보드만 두드리면 되고, 자유롭게 내 시간을 조율하며 일할 수도 있으니 정말 편하겠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일부는 맞는 말이지만, 엄연히 번역도 노동이다. 한 단어를 선택하기까지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둥둥 떠다니며 결합과 해체를 반복한다. 이 단어가 맞을까 저 단어가 맞을까, 이런 문장을 써볼까 저런 문장을 써볼까 하면서 눈동자도 이리저리 굴리며 궁리해야 한다. 손가락만 까딱까딱 움직이는 것이 번역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서운하다. 고강도의 노동을 해야 하는 일인데 단어당 22원은 정말 너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더 씁쓸했던 건 당시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나는 그 일을 수락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점이다. 

그때는 나를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초보 번역가였으니 말이다.


밥값은커녕 껌 값 벌기도 힘들었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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