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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리 Jan 08. 2024

하늘이 무너져도 마감일은 지킨다

제3장 밥값 하는 번역가의 생존기

좋은 번역가가 갖춰야 할 최우선의 자질이 무엇일까? 물론 뛰어난 언어 구사력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언어 능력은 최우선의 자질이라기보다 기본 필수 자질이라고 하고 싶다. 어떤 일이든지 다 그렇겠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업무에서는 신뢰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신뢰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은 서로가 합의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번역가와 회사 사이에는 ‘마감일’이라는 약속이 있다. 일이 많을 때는 이 약속을 지키기가 어려울 때도 있지만, 이미 ‘합의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꼭 지켜야 하는 것이 마감일이다. 


대개 회사 담당자(보통 PM)와 프리랜서 번역가는 얼굴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다. 전화 통화를 할 일도 없고, 대부분 이메일이나 메신저로만 업무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딱 한 회사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회사들과는 모두 이메일로만 소통했다. 어쨌든 서로 얼굴 보고 사소한 일상도 공유하며 감정적 교류를 할 기회가 전혀 없다 보니 담당자(PM)는 프리랜서 번역가의 개인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다. 한 팀으로 얼굴 마주 보고 일하던 친한 회사 동료였다면 규정과는 별개로 ‘인간적으로’ 나의 피치 못할 사정을 이해하며 미뤄진 마감일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리랜서 번역가는 절대 담당자(PM)의 너그러운 마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잘못 기대했다가는 그날이 그 담당자와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철저히 계약서로 합의한 기간, 업무 내용 등에 근거해 맡은 일을 하고, 계약서에 명시된 작업료를 받는 데에 충실하면 될 뿐이다. 


그래서 번역 일을 할 때는 시간을 잘 계획해야 한다. 회사에서 일하는 게 아니니 눈치 볼 상사도 없고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다. 자유로워 좋겠지만 아무런 통제 없이 각종 유혹에 노출된 아주 위험한 상황이기도 하다. 번역에 필요한 정보를 좀 찾아보면 어느새 엉뚱하게 친구들 SNS를 돌아다니면서 엉뚱한 짓을 하는 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 


초보 번역가는 일이 많지 않아서 한두 개의 회사와만 일을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유 시간이 있다. 하지만 거래처가 하나둘씩 더 늘어나게 되면 이제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감의 압박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때문이다. 


번역일 초반에는 나도 아주 여유롭게 일했다. 계약한 회사가 많지 않았으니 시간이 남았고, 마감일 한참 전에 미리 일을 다 끝낸 적도 많았다. 하지만 점차 몇 군데 회사와 더 계약을 체결하면서 ‘어? 이거 마감일이 벌써 다 된 거야?’하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는 두 회사의 마감일을 착각해서 번역 원고 마무리를 서두르다가 마감 1분 전에 간신히 발송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휴대전화 캘린더에 마감일을 미리 등록해 놓고 일주일 전, 3일 전, 1일 전 단위로 반복 알람을 맞추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일이 많을 때는 회사 담당자(또는 PM)에게 요청해서 마감일을 사전에 조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닌 이상, 마감을 코앞에 두고 시간 분배를 못 해서 일정을 미루는 모습을 보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시간 약속 하나를 못 지켜서 마감일을 미룬다면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회사 인력풀에는 나보다 더 뛰어난 번역가들이 수두룩하게 등록되어 있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번역 업무와 관련된(원문 자료 파일이 이상한 경우 등) 것도 아닌 일로 바쁜 PM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다시 그 PM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잠시 주춤한 사이 다른 누군가가 내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일이 몰릴 것 같으면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미리 담당자와의 협의를 거쳐 넉넉하게 일정을 조율해야 한다. 본인의 일정을 항상 점검하면서 업무 가능 여부를 충분히 고민한 후에 회사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일단 도장을 찍고 나면 사실상 번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욕이 앞서서 많은 일을 잡았다가 시간에 쫓겨 품질 관리도 제대로 안 된 작업물을 납품하거나, 마감일을 놓치게 된다면 번역가로 인정받을 기회를 날려버리는 셈이다. 이런 실수는 특히 남들보다 늦은 시기에 번역계에 발을 들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주 치명적이다. 


원고 마감 후 앞마당에서 구워 먹는 고기는 꿀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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