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적이다 못해 건조합니다
대성당, 그 유명한 레이먼드 카버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인 단편집입니다. 총 12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만 읽으면서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계속 읽게된, 이상한 그런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단편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문장수집'입니다. 보통 인상깊은 문장에는 밑줄도 치고 독서카드에 기록도 하는데 이 책에는 밑줄을 하나도 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손을 떼지 못하고 다 읽었습니다. 하여간 묘한 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실주의의 대가라고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부터 알 수 있습니다. 네, 미사여구 수식어 거의 없는, 단문들로 책 전체가 가득 차 있습니다.
#2 단문들만을 가지고 문학사에 길이 남을 견고한 성을 쌓다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대성당'은 아래와 같이 시작합니다 :
그러니까 맹인이, 아내의 오랜 친구가 하룻밤 묵기 위해 찾아 오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죽었다. 때문에 그는 코네티컷에 사는, 죽은 아내의 친척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일단 형용사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사실 전달을 하는데 꼭 필요한 단어들로만 문장들을 구성하고 무슨 속기사가 아무 생각없이 문장들을 타이핑하듯 무심하게 문장들을 이어가고 스토리를 전개해갑니다. 그래서 대단히 건조하고 심지어 작가가 글을 쓰고는 있지만 스스로 본인의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렇게 객관적이면서 사실적이고 그러면서도 묘한 매력을 뿜어 내다니, 하여간 이상하면서 대단합니다.
이런 글이라면 굉장히 지루해서 책을 덮고 다른 책으로 넘어갈만도 한데 이게 무언가에 홀린듯 계속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한 작품 한 작품 계속 읽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일차원적으로 이 책을 평한다면, '단문들로 쌓아올린 견고한 성'이라고 하겠습니다.
#3 작가들의 작가, 뼈대 문장 쓰기의 교본
단문으로 이어지는 사실적인 표현들을 보면서 '레이먼드 카버는 작가들을 위한 작가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만들어 놓은 뼈대에 살을 잘 붙이고 감정을 실어 넣으면 여기 실린 모든 작품들이 로맨스를 포함한 어떤 장르로도 확장될 수 발전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비유하자면 잘 만들어진 인체 해부도 및 골격 모형이라고나 할까요. 어떤 살을 어떻게 붙이냐에 따라 어떤 장르에든지 응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능력이 되면 한 번 써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레이먼드 카버는 집에서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부부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단편소설 한편을 뚝딱 써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도 해봅니다. (작가적 상상력 하나 없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