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때 만나 여전히 돈독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다. 집에 초대하면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구르기 전까지 식사를 대접하고, 따뜻한 오지랖이 있는 그런 친구다. 몇 년 전인가, 첫 남자친구를 사귀더니 작년에 결혼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결혼이 정해진 후에 간간이 만나면서 농담 반 진담 반처럼 나에게 축가를 해달라며 떼를 썼다. 정말 떼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나는 거절하고 그 친구는 포기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됐다. 삼고초려라는 사자성어를 실천하려는듯 계속되는 그 애원에 두손두발 다 들었고, 결국 축가 제의를 받아들였다. (결혼식 망치고 싶냐며 협박까지 했는데도 먹히지 않았다.)
우선, 나는 결코 노래를 잘 부르지 않는다. 그냥 내 삘에 취해 느끼하게 노래를 부르는 편이며, 단지 성량만 클 뿐이다. 이 친구는 이미 축가까지 지정했는데, 바로 극악의 고음곡인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였다. 혼자 코노에 가서 연습삼아 불렀는데, 이대로라면 친구 뿐만 아니라 나까지 망신 망신 개망신 예약이라, 바로 집근처 실용음악학원에 등록했다.
선생님과 수업도 하고 나혼자서도 연습에 매진했다. 문제는 결혼식 전날까지도 너무 무리하게 연습했더니 당일에 목이 좋지 않았다는 점. 누가 보면 어디 콘서트에 노래부르러 가는줄 알았을 거다. 당일 오전에 커피를 너무 마시고 싶었으나 목이 건조해질까 꿀물로 대체하고, 친구 결혼식 보다도 내 가수 무대 데뷔에 집중했달까.(^^;)
주객이 전도되어 친구를 위한 축하도 축하인데 잘 부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전날 유튜브에서 '축가 리허설 이렇게 하세요!' 관련 영상만 몇 십개 봤는데 중요한 건 막상 당일이 되니 긴장되서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어버버, 네네.하며 허겁지겁 리허설이 끝나고, 친구 본식을 제대로 만끽하지도 못한 채, 축가 생각 뿐이었다.
신랑 형의 축사 다음이 축가였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축사는 눈물 바다의 시간이다. 그러나 나는 모로 가도 웃으면 장땡이라는 신조의 사람인지라, 이런 분위기는 안된다며 축가 전 30초의 멘트를 날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신부 OOO양의 고등학교 친구 민짱이입니다.
먼저 뜻깊은 날을 맞은 신랑신부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고요.
축가 무대에 저를 강제로 세운 우리 신부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제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경험이 없어서,
분명 높은 확률로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텐데요.
그럴때는 제가 아니라 저를 이 자리에 세운 신부에게 그 화살을 돌리시면 됩니다. 그래도 결혼을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최선을 다할테니
많은 응원과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이 축하멘트(?) 덕분에 분위기가 좀 풀어져서 노래부르기가 훨씬 수월했다. 멘트를 하며 나도 그 자리에 좀 익숙해져서 한결 긴장된 마음이 가라앉았다. 무사히 노래를 완창하고(물론 고음은 가성으로 아름답게 처리했다.) 많은 하객들의 박수와 함께 몇개월의 은은한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축가'라는 게 결혼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정성만 다하면 된다고 하지만 막상 잘부르고 싶은 게 무릇 사람 마음 아니겠나. 축가 3분을 위해 보컬학원에 등록하고 연습에 매진한 게 돌이켜보면 웃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름 성공적인 축가로 마무리되어 기쁜 마음이다.
왠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 축가 알바를 뛰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 추가로, 친구 청첩장 문구도 작성해주었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해서 내가 더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게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