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무성한 산 길을 요리조리 걷노라면 나무를 만지고 싶어 진다. 껍질이 매끈한 나무, 비늘이 일어난듯한 나무, 말라비틀어지다 못해 피부가 쩍쩍 갈라진 것 같은 나무. 사람이 인종으로 나뉘고 같은 종(種)이라 해도 그 생김과 지문이 같은 것이 없는 것처럼 나무도 그러할 것이다.
수많은 나무 중 나는 '소나무'를 좋아한다. 우리나라 산에서 가장 흔한 나무 중 하나가 소나무이기도 하겠지만, 산을 오를 때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하늘을 향해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보는 게 좋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산을 내려올 때보다 오를 때 그 산을 제대로 보는 것 같다. 헉헉거리며 올라가면서도 그 산에 터를 잡고 있는 나무와 바위를 눈에 담는다. 가끔은 나무와 바위를 핑계로 한숨 돌리고 올라갈 때도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의 <식물의 은밀한 감정>이라는 책이 있다. 식물을 다룬 책을 처음 읽어보기에 새롭고 신기하고 식물에 대해 무지했음을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식물의 감각과 감정과 생존 능력, 치유 능력 등 우리가 모르던 식물의 진정한 모습이 한층 친밀하게 다가옴을 느낀다.
책 속에서 "... 나무껍질과의 접촉, 나무와의 포옹은 인간과 식물 양쪽에 유익한 진동의 교류를 낳는다."라는 문장을 마주했을 때 심장이 쿵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산이나 숲에서 아름드리나무, 특히 소나무를 마주치면 소나무를 끌어안고, 나무껍질에 얼굴을 살포시 갖다 댄다. 그리고 눈을 감고 가만히 나무에 나를 맡긴다. 껍질의 거친 표면이 얼굴에 와닿는 느낌이 싫지 않다. 두 팔을 힘껏 벌려도 닿지 않는다. 얼마 전 산에서 소나무를 끌어안고 말했다.
"숨 좀 쉬고 갈게요."라고.
나에게 산은, 나무는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 나무껍질과의 접촉, 나무와의 포옹은 인간과 식물 양쪽에 유익한 진동의 교류를 낳는다. 도교 사상과 동양 의학에서 말하는 이 상호 기(氣)의 교류는 이제 서양 학문에서 숲테라피라는 이름으로 연구되고 있다." - 식물의 은밀한 감정(p173)
하늘로 우뚝 솟아 있는 나무를 보면 생각한다. 이 자리에서 얼마나 오랜 세월 이 산을 지키고 변해가는 것을 함께 겪고 있었을까?
산의 주인인 나무들은 꽃 피는 봄과 녹음이 짙어가는 여름에 한껏 풍요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휘몰아치는 태풍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살아내는 게 녹녹지는 않았으리라. 수백 년은 살았을 법한 나무들이 태풍 앞에 맥없이 뿌리째 뽑히고 허리가 부러진 채 내팽개쳐진 것을 볼 때면 자연에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면 나무는 도토리며 밤이며 산짐승들의 먹이를 떨구어준다. 겨울엔 무성하던 나뭇잎은 떨어지고 그나마 남은 잎은 바짝 말라버린다. 그 몸으로 매서운 겨울바람을 품어주느라 산바람 소리가 야수의 울음같이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난 산이 좋다. 산이 좋은 이유는 나무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가 쉼을 하고 가길 바랄지도 모른다. 책에서는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식물을 찾으라고도 한다. 수호천사 나무, '안내자' 식물이라는 이 개념은 미신의 영역을 벗어나 점점 많은 공감을 받고 있다고도 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믿지 못했던 것을 믿고 알던 것이 잘못된 것들이 많은 세상이니 수호천사 나무가 진짜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하지만 나는 그냥 마음이 닿는 나무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나를 맡긴다. 좀 쉬었다 가겠노라 허락을 구한다. 그냥 나무에 나를 맡기는 그 순간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