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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생강 Sep 27. 2022

나리꽃을 꺾어주던 머스마

옛날에 말이야, 이 꽃을 꺾어다 주고 꺾어다 주고 하던 머스마가 있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꽃은 신라시대 ‘수로부인’의 꽃처럼 늘 가파르고 메마른 산비탈에 피었어.

그 머스마는 참으로 날랬어.

나더러 가만히 기다리라 하고 잽싸게 비탈로 올라가서는 다람쥐처럼 이 꽃을 꺾어다 주곤 했어.

그땐 어려서 꽃 이름도 잘 모르고 그냥 초여름 장마철  즈음에 피는 예쁜 꽃이구나 했었지.


그 머스마도 국민학교 2학년, 나도 2학년.

키가 얼추 비슷한 우리는 학교가 멀어서 같이 걸어서 등. 하교하는 날이 많았어.

그 머스마는 산에 들에 지천으로 피는 꽃들을, 이른 봄 진달래부터 가을의 국화, 코스모스에 이르기까지 참 많이도 꺾어다 주곤 했어.

아마도, 그 머스마가 나를 좋아했는가 봐.

4학년이 되도록 꺾어주고 꺾어주고 했지? 아마.


그러다 차가운 가을 서리가 내리고 곧이어 들판의 싱싱하고 푸른 초목이 희미하게 빛깔을 잃는 겨울이 왔어.

빨간 털옷에 빨간 장화를 신던 작은 지지배였던 나는 빨간 벙어리장갑에 손을 넣고 추워서 빨개진 코를 하고학교를 가려고 집을 나섰지.

그 머스마는 언제나처럼 논길 어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얼굴 보고 씨익 웃으면 서로 인사하는 거야.

그래서 함께 동네를 가로질러 밭을 지나가는데 머스마가 뒤로 주춤하더니 몸을 숙였다 일어서는 거야.

그러더니,

"이거 묵어 봐라" 하면서 손에 뭘 내미는 거야.

"와? 이거 뭔데 묵노?"

보니까 가을걷이가 모두 끝나고 서리 맞아 시들은 대파 뿌리야.

"대파다. 하나도 안 맵다. 달다. 묵어 봐라, 내가 니 묵으라고 껍질 깠다 아이가?" 하면서 흙이 조금 달린 하얀 대파 뿌리를 내쪽으로 한번 더 내밀었어.   

"위쪽은 매우니까 하얀 뿌리 쪽만 한번 베어 묵으라"

"어휴… 알았데이~ 어째 이런 걸 묵으라 카노?"

나는 대파를 받아서 하얀 뿌리 쪽을 앙~ 하고 씹었어. 그 머스마 말대로 정말 하나도 안 맵고 맛이 달큼했어.

나는 싱긋하고 웃었고 그 머스마도 나를 보고 따라 웃었어.

겨울이 돼서 들판에 꽃이 없으니 그 머스마는 대파 뿌리라도 나를 위해 주고 싶었던 거야. 어때? 그 머스마 마음이 참 순수하고 예쁘지?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어. 그리고 우리는 이제 5학년이 되었지. 나는 언제나처럼 빨간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고 당연히 그 머스마랑 함께 걸어서 학교를 간다고 생각했지.

모퉁이를 돌아서 두리번두리번하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머스마가 없는 거야.

‘여기쯤에 머스마가 있을낀데… 어데 갔지?’

난 한참을 기다리다가 학교로 갔어. 학교에 도착하니 그 머스마는 벌써 학교에 와서 다른 머스마들이랑 놀고 있었어. 머스마는 안보는 척 나를 흘깃하고 얼른 보더니 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어.

갑자기 하루아침에 머시마의 행동이 변한 거야.

나한테 더 이상 말도 걸지 않았고 더 이상 예쁜 꽃도 꺾어주지 않았고 학교도 같이 안 가고 아는 체도 안 해.

내가 뭘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어.

그 머스마가 무슨 일로 하루아침에 갑자기 변해갖고 저렇게 변절자 행세를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어.

그다음 이야기 궁금하지?


그 머스마는 평소에는 아는 척을 안 했지만 간혹 내가 곤란한 상황이 되면 어느새 슬쩍 와서는 사건을 해결해 주곤 했어.

그 시절 여학생들 사이에는 공깃돌 놀이와 고무줄놀이가 유행이었거든. 그런데 그 놀이를 하고 있으면

다른 깐죽이 머스마들이 와서 공깃돌을 가지고 도망가거나 고무줄을 가지고 약 올리며 달아나곤 했거든.

그러면 그 머스마는 운동장 한쪽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잽싸게 달려가서 그 깐죽이를 잡아서 짧게 한마디 했어.

'야! 고무줄 숙이한테 돌려줘!' 그러면 그 깐죽이는 나에게서 낚아챈 것들을 군말 없이 되돌려 주었어.

왜냐고? 왜냐하면, 그 머스마가 정말 날래다고 했잖아? 싸움의 기술도 굉장했던 거야.

지금은 25명 정도가 한 학급이지만 그 시절은 한 학급당 60명 정도가 한 학급이었어. 그중에서 싸움을 제일 잘했거든.

그래도 그 머스마가 예전처럼 꽃을 꺾어 준다거나 학교를 같이 간다던가 하지는 않았어.

그러다가, 중학생이 될 즈음에 그 머스마는 보이지 않았어.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갔다고 소문으로 들었지.


30년이 흘렀고 동창회에 한번 나오라는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동창회에 나갔지.

그 머스마가 아저씨의 모습이 되어 떡하니 앉아 있는 거야.

"오랜만이다. 잘 있었니? 너, 내가 어릴 때 좋아했었는데 몰랐지?"

"그러면, 그때는 왜 말 안 했어? 네가 갑자기 나를 모른 척했었잖아?"

"자꾸 너랑 다니니까 다른 남자아이들이 여자애랑 다닌다고 놀려서 그랬지"

"아~ 그랬구나. 그래, 와이프는 어디 있어?"

"아직..."


'머스마...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좀 살지! 왜 여태까지 혼자야...'

그렇게 동창회는 끝이 났고 한참 후에 머스마 소식이 들려왔어. 4살 많은 연상을 만나서 결혼해서 잘 산다고.

'그래. 이 머스마야, 늦게라도 결혼해서 잘 살아야지. 진짜 행복하게 잘 살아~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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