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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e Oct 13. 2024

신피질의 재앙

"스무 살이니까, 서른이라서, 곧 마흔인데.. 시간이라는 걸 그렇게 분초로 나눠서 자신을 가두는 종족은 지구상에 인간 밖에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나이라는 약점을 공략해서 돈을 쓰고, 감정을 소비하게 만들죠. 그게 인간이 진화의 대가로 얻은 신피질의 재앙이에요."


좋아하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대사다. 몇 번이나 돌려보았던 드라마였는데 최근에 다시 정주행을 시작하다 이 대사가 갑자기 콱하고 마음에 박혔다. 요즘 들어 나도 모르게 내 나이에 걸맞은 '성과'에 목이 말라있었다. 꽤 오래 몸 담고 있던 회사와 작별하고 자발적 백수가 된 지 3개월 차. 얄팍한 소속감조차 사라지고 나니 또다시 진로 고민이 시작되었다. 벌써 서른이 훌쩍 넘었는데, 주변 또래들은 한창 일에 몰두하고 있을 텐데 갑자기 나만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충분히 고민하고 선택한 퇴사였는데,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 지 알아보고자 결정한 일이었는데, 벌써 내 안에서 조급증이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보다 한참 어릴 때부터 그랬다. 수능을 대차게 망쳤어도 재수를 선택하지 않고 점수에 맞춰 대학에 갔다. 하루라도 빨리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막상 대학생이 되어서는 빨리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4학년을 꽉 채우지도 못한 채 이른 취업을 했다. 첫 회사에서 퇴사를 했을 때는 바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학원을 다니면서 자격증을 따고, 또다시 바로 취업을 하고 그렇게 몇 번의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며 정신없는 20대를 보냈다. 그때 왜 충분히 내 마음에 귀 기울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를 종종 할 때가 있다. 지나간 일에는 미련을 두지 말자는 주의지만, 왜 그렇게 쫓기듯 살았는지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항상 가슴이 두근 거리는 일,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고민해 볼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지 못했다. 항상 그 나이에 맞는 어떤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고는 자부하지만 충실히 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제라도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마음먹고 퇴사를 했다. 언제부턴가 회사는 그저 나에게 돈 버는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행위는 중요한 의무이지만, 돈 외에는 아무런 가치를 얻지 못하는 곳에서 내 인생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쏟는 게 아깝게 느껴졌다.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남편의 지지가 가장 컸다. 당장 가계 생활에 필요한 비용은 본인이 책임질 수 있으니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보라고 했다. 그 마음이 고맙고 애틋해서,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어서, 뭐라도 빨리 성과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온라인으로 작사수업을 듣고 있는데 일단은 취미처럼 배워보자는 가벼운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몇 번의 수업을 듣고 나니 예상보다 더 재밌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두근거림에 설렜다. 새벽까지 과제를 하면서도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다. 그러면서 벌써 오프라인 학원을 알아보고 상담전화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상담한 곳은 몇 개월 간 수업을 듣고, 마지막 테스트를 통과하면 학원과 연계된 퍼블리싱에서 발매하는 곡으로 데뷔를 보장해 준다는 곳이었다.


데뷔라는 말에 혹해서 바로 학원에 등록까지 할 뻔했다. 사실 나는 뭐든 가볍게 하는 게 잘 안 되는 인간이다. 조금이라도 흥미를 느끼거나 책임감이 드는 순간 진심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 인정욕구가 큰 편이라 주어진 것을 굉장히 열심히 한다. 솔직히 작사 수업을 듣기 시작한 순간부터 하루빨리 작사가로 데뷔하고 싶어 졌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성급하게 몰입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지금 듣고 있는 온라인 수업을 다 듣고 나서 다음 스텝을 선택해도 늦지 않다고.


이번만큼은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신피질의 재앙에서 벗어나보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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