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이 보이면 엄마 뒤로 숨어 버리던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이다.
어릴 적 유난히 좋아했던 책이 있었다. 요즘에는 한 번 완독 한 책을 두 번 세 번 읽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 시절에는 유독 그 책만큼은 최소 수십 번, 어쩌면 백 번은 넘게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책은 하이타니 겐지로의 <태양의 아이>라는 소설이다. '후짱'이라는 주인공 소녀의 눈을 통해, 시대적 아픔을 겪고 살아가는 오키나와 사람들 그리고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오키나와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일본 본토와는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원래 류쿠 왕국이었다가 일본 본토의 침략으로 편입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을 치러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본토의 차별 대우와 참혹한 전쟁의 후유증으로 뿌리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데, 이 책에 나오는 후짱의 주변 사람들 모두 그렇다. 지역감정의 골이 깊은 건 한국과 많이 닮아있어서 공감 가는 부분도 많다.
책을 읽을 당시에 나는 그런 역사적 배경보다는 주인공 '후짱'의 캐릭터에 더 몰입했다. '후짱'은 한창 내가 그 소설에 빠져있을 무렵의 나이와 비슷한 또래로 설정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5-6학년 정도의 나이로 기억한다.) 항상 수줍었던 어린 시절의 나와 다르게 후짱은 굉장히 당돌한 아이다. 후짱의 엄마가 운영하는 오키나와 가정식 식당에는 다양한 성격의 손님들이 찾아오는데, 후짱은 그들을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한다. 씩씩하고 똑똑하고 활발한 성격의 후짱을 나도 모르게 동경했던 것 같다.
지금은 MBTI라는 게 유행하면서 'I'들도 하나의 기질로 당당하게(?) 자리 잡은 분위기인데,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런 내 성격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엄마가 담임선생님을 만나서 애가 너무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니 발표 많이 하게 시켜달라고 부탁하던 모습을 본 적도 있는데, 그때는 정말이지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후짱처럼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었으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발표도 잘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타고난 기질은 어른이 되어서까지 쉽게 바뀌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 성격의 장단점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이런 내가 싫지 않다. 처음에는 낯을 가리지만 한 번 친해지면 깊고 오래 관계를 유지한다. 친한 사람들과 있으면 오히려 리드하는 역할이 되기도 하고 수다스럽기도 하다. 나의 내면세계에 집중하고, 나의 생각이나 감정에 집중할 줄 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지 않고 오히려 에너지를 얻는다. 내향적인 사람으로 30여 년을 살아보니 생각보다 장점이 많았다. 과거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억지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남편은 나와 정반대의 성격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금방 친해질 정도로 사교성이 좋다. 어릴 때는 처음 보는 어른들 앞에서도 재롱을 부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낯선 사람이 보이면 엄마 뒤로 숨어 버리던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이다. 어느 모임에서나 주도적으로 분위기를 이끌고 남들 앞에 나서는 것에 부끄러움이라고는 하나 없어 보이는 그가 신기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고, 그래서 더 끌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보다 보니 외향적이고 말이 많은 그의 성격이 마냥 좋지 만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우리가 연애시절 가장 많이 다투었던 이유가 바로 그의 '실언' 때문이었는데, 말이 많은 만큼 해서는 안될 말도 종종 튀어나오곤 했다. 그의 말에 상처를 받은 나는 치열하게 언쟁을 할 수밖에 없는데 싸울 때는 오히려 그가 뒷걸음질 치고 나는 드세지는 편이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되는 그의 성격 때문에 손해 볼 때도 많고 피곤해지는 경우도 목격하게 되었다. 깊은 사이가 되니 겉으로는 자신감 넘쳐 보이는 성격에 비해 그의 내면 속 자존감은 자주 바닥을 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내가 자존감이 높다며 부러워하곤 한다.
어릴 때는 마냥 수줍은 내가 싫었고 지금도 100% 만족스럽진 않지만 나와 반대인 사람을 만나 서로 부족한 면을 채워주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나의 자신감을 키워주는 존재이고, 나는 그의 자존감을 올려주려 노력한다. 영화 <엘리멘탈>의 주인공 웨이드와 앰버가 서로 너무 다르지만 결국 하나가 되어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