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르게 물든 스무 살, 성년을 맞이하는 큰딸에게
하얀 겨울 아침의 빛들이 따스히 모여
둘이 마주 짓는 두려운 설렘을 포근히 다독였단다.
더는 움직일 수 없이 바닥까지 내려앉은
텅 빈 배가 되어서야
힘껏 타오르는 너의 눈빛이 보이더구나.
작은 속삭임이 점점 더 짙게 물들면서
움켜쥔 연필로 알록달록 이야기를 지었던 거야
때로는 생각이 그림으로 펼쳐져
너무나 고마웠고
때로는 선들이 어긋나게 흩어져
털썩 주저앉았지
그런데 말이야
어느 순간 활짝 피어있더구나
스물의 너가
마치 힘이 다 녹아 내려간 찰나에
해맑게 웃어주었던 그때, 그 겨울처럼 말이야
아마도 너를 마중나가기 위해
유혹의 끈을 내려놓고 정갈히 기도했던
열 달의 성숙한 사랑을 기억했던 것일까?
아니면 남몰래 참아낸 너의 울먹임이
희망의 메아리 되어 반갑게 찾아온 걸까?
갸웃거리며 어색하게 찍은 수많은 점들이
선으로 이어져 곱게 피어올랐던 거야.
10대의 연하게 푸른 골짜기를 지나면
거칠게 우뚝 선 등마루를 찾아가는 여행이
더 오래도록 이어질 수도 있단다.
기억하렴
스물의 아름다운 아이야,
험한 숲속에서 홀로
가시나무에 걸려 아프게 베일 수도 있지만
푸르게 넓은 잎으로 아픔을 감쌀 수도 있고
맑은 바람으로 젖은 땀을 닦을 수도 있고
쌍을 지어 나는 새들의 지저귐에 황홀히 빠져
긴 외로움을 지나올 수도 있을 거란다.
그리고 한껏
바라다 보렴
세월의 더께가 쌓인 묵직한 산줄기들이
풍만히 너를 태우고
또 이어갈테니
하얀 겨울 아침에 보았던
용기 있는
그 사랑을
잊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 2024년 5월 20일 성년의 날에
*** 눈 내리는 하얀
겨울 아침에 태어난 큰 딸에게
성년의 날을 맞이하여 엄마가 보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한껏 느끼면서
오늘을 더 맘껏 사랑하렴
사랑해 아가야
큰 딸과의 추억을 돌아보면,
제 욕심으로만 선택했던 지난날들이 한없이 미안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는 일에 충실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때 저는 고3 담임교사였습니다.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 자율학습,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는 남편의 전화에
걸어서 20분 거리 집까지 달려가 아이를 업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자습감독을 하던 날이 있었습니다.
늦은 밤 피곤하게 집에 들어가면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지요.
그럴 때면 아이를 업고 집 근처 하천길을 걸으며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취오시라…”
정읍사를 읊어주곤 했습니다.
참 외롭고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고3이 된 딸과는 갈등이 극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스물이 넘은 딸은 저를 이해해 주고 도와줍니다.
“엄마 혼자 어려운 문제를 풀게 하지 않을 거야.”
그 말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서툴고 힘들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 사이에는 긴장감 대신 따뜻함이 흐릅니다.
아마 우리 모두 그런 추억 덕분에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겠지요.
오늘의 힘듦 또한 언젠가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딸도, 엄마도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힘을 냅니다.
돌아보니, 우리 사이의 편안함은
아이에게 보낸 편지와 시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글의 힘을 믿습니다.
마음을 담아 적은 글이
사랑을 일으키고, 사랑을 번지게 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