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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 철학기행

4화 — 불빛 아래의 그림자

by bonfire

4화 — 불빛 아래의 그림자

밤은 폐허 위에 빠르게 내려앉았다.
무너진 건물 틈새에서 바람이 울부짖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낡은 주차장에 몸을 숨겼다.
낡은 시멘트 벽은 금이 가 있었고, 천장 틈새로는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우리는 작은 불을 피웠다.
불빛은 따뜻했지만, 동시에 위험했다.
이 어둠 속에서는 빛이 곧 신호가 된다.
살아 있는 자가 있음을 알리는 신호.
그리고 살아 있는 자를 노리는 그림자를 부르는 신호.

나는 아이를 재워놓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낮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여럿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고르며 아이 앞으로 몸을 옮겼다.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그곳에 세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들의 옷은 해지고 더러웠으며, 눈빛은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 같았다.

“여기 불빛이 보이더라니.”
앞장선 사내가 피식 웃었다.
“식량 좀 있겠지?”

나는 배낭을 움켜쥐었다.
안에는 통조림 한 개, 물 반 병, 그리고 부스러진 비스킷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원하는 건 단순한 식량이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이 내 옆에 누운 아이에게로 향하는 것을 나는 알아차렸다.

“쓸모 있어 보이는군.”
사내가 아이를 가리키며 낮게 중얼거렸다.
“데려가면 일이라도 시킬 수 있겠지.”

순간 내 안에서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나는 철파이프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쪽은 나 혼자, 저쪽은 셋.
싸운다면 이길 확률은 희박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두 개의 목소리가 맞부딪혔다.
‘아이를 버려라. 네가 살아남아야 한다.’
‘그를 지키지 못한다면, 네 선택은 무엇이었나?’

아이의 작은 손이 내 옷자락을 붙들었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 속에, 어제 내가 건넨 희망이 아직 희미하게 타고 있었다.

앞장선 사내가 다가왔다.
“좋게 말할 때 내놔. 그럼 네 목숨은 살려주지.”

그 순간, 나는 결정을 내렸다.
철파이프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지만, 오히려 두려움보다 분노가 더 뜨겁게 치밀었다.

“건드리지 마.”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사내가 비웃으며 다가왔다.
나는 곧바로 파이프를 휘둘렀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짧은 비명.
싸움은 거칠고 혼란스러웠다.
나는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절박함이 나를 지탱했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가 내 몸을 움직였다.

잠시 후, 사내들은 욕설을 퍼붓고 물러났다.
그들의 뒷모습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물러나는 듯했다.
나는 파이프를 쥔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손바닥은 피로 젖어 있었고, 숨은 거칠게 몰아쉬었다.

아이의 눈이 커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나를 지켜줬어.”
그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믿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몸은 지쳐 있었고, 마음은 무거웠다.
폭력을 택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선택이 또 다른 위험을 불러올 거라는 예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러나 나는 아이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 손은 여전히 작고 따뜻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무엇일까?
타인을 위해 싸우는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피 흘리지 않는 것일까?

답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이제 나 혼자만의 길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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