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인식에 맞서야만 했다.
엄마와 아빠는 시골에서 개를 키워본 적이 있다.
엄마, 아빠가 어린 시절 시골에서 키우던 개는 가축이었다.
용도는 굉장히 다양했다.
집을 지키고, 잔반을 처리하고, 새끼를 낳아 돈을 벌게 하고, 그 가치가 다하면 음식이 되었다.
흔히 옛날 시골에서 기르던 가축일 뿐, 가족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너를 위해 나는 엄마, 아빠와 싸워야만 했다.
항상 가족들과의 크고 작은 문제에서 상처받았던 나는 성인이 되어 가족과 떨어져 살기를 선택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그저 시에 불과했다.
가족은 내막을 알면 알수록 그들만의 사정으로 전혀 예쁘거나 아름답지 않다.
내가 그러했고 나의 가족이 그러했다.
타인 앞에서 나는 부모를 걱정 없이 웃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딸이자 엄마, 아빠의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딸이었다.
타인 앞에서 엄마, 아빠는 나를 보물 마냥 귀중히 여기고 감싸주는 부모이자 나의 주변 사람들이 선망하는 엄마, 아빠였다.
자세히 보면, 나는 엄마와 아빠의 자랑이 되기 위해 치열한 날들을 보내야만 했고 엄마와 아빠는 성격상 나와 절대적으로 맞지 않았다.
이미 그렇게 살아온 사람을 바꾸는 일은 꽤나 힘든 일이다.
가족이 예쁘고 아름답고 애틋할 수 있게 나는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멀어지길 택했었다.
그런 내가, 너를 대하는 가족들의 잘못된 사랑과 태도를 바꾸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고성을 내질렀다.
처음부터 싸우고 큰소리가 오고 가야 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엄마, 아빠 역시 네 존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방법을 알아야 했을 뿐이었다.
나는 널 위해 내가 아는 것들을 엄마와 아빠에게 알려주었다.
특히 주의할 사항은 곳곳에 큼직하게 써붙였다.
그중 하나는 식탁에 붙여놓은 네게 주면 절대 안 되는 음식 목록이었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식탁은 너로 인해 아빠와 나 사이에 가장 많은 언성이 오고 간 자리다.
아빠는 쫄래쫄래 달라붙는 네가 귀엽다고 어떤 음식이든 주려고 했다.
무지에서 오는 결과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다.
그래서 네가 아무리 먹고 싶어 해도 나는 단호했다.
네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당장에 널 기쁘게 해 줄 음식보다 내 옆에서 건강하게 사는 네가 더 중요했다.
그렇게 주의하고 또 조심하고 언성이 높아지길 반복했다.
나는 상식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아빠에겐 그럴 수도 있는 것들이라 싸움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나는 아빠가 식사를 할 때마다 감시하고 주의를 주었다.
엄마는 희한하게도 다른 건 알았다고 수긍했으면서 쌀밥을 나눠주었다.
다들 사랑이었겠지만, 잘못된 사랑이었기에 난 항상 큰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엄마, 아빠와 생기는 갈등이 고단했음에도 너는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아마 그런 생각과 책임감, 반복되는 갈등에서 오는 무력감이 약물 중독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너를 지키면서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건 아빠였다.
너를 대하는 아빠의 태도에서, 나는 과거 아빠가 나를 대하던 태도를 보았다.
말 잘 듣고 남들이 보기에 예쁜 인형이길 바라는 시선.
어린 나를 스스로 채찍질하고 갉아먹을 수밖에 없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자세히 보면 전혀 아름다울 게 없는 가족.
내막을 알게 되면 퍽 부러울 것 없는 과거.
반복하지 않기 위해, 너만큼은 온전히 올바른 사랑만 받게 하고자, 나는 애써 외면해왔던 것들과 마주했다.
치열하게 싸우고 다시 싸우길 반복했다.
네가 애완견이길 바라는 아빠에게 네가 반려견임을 알려주기 위해.
네가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교육이 아닌 방식으로는 절대 널 대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
이제 와서 말하지만, 나는 그 일이 너무 힘들었다.
네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아빠의 모습을 볼 때면,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다.
네가 겁을 먹고 서있는 자리에 내가 서있었기에, 과거의 나와 아빠를 마주하고 있었기에 나는 아빠와 함께 없어지고 싶었다.
그러면 적어도 불온했던 과거가 없어져 행복할 것 같았다.
내가 지내온 시간을 네게 설명해주고 아빠 대신에 네게 사과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 일이 생길 때면, 나는 그저 널 데리고 많은 시간 동안 너와 산책할 뿐이었다.
산책을 하며 너는 집에서 있었던 일은 잊은 듯 웃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웃음에 진심으로 같이 웃어줄 수 없었다.
사랑하고 지키겠다고 가족들 사이로 널 데려온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일깨워주는 시간들이었다.
방심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아름답지 않은 가족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런 가족에 감히 널 끼워 넣으려고 했으니, 애초에 잘못된 일이었다.
너는 날 하염없이 짓이겨도 되지만, 너는 누구에게도 그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되는데.
내가 널 함부로 짓밟힐 수 곳으로 데려왔구나.
그 사실은 겨우내 쌓여있는 낙엽 같은 내 자기혐오와 자괴감에 불씨가 되었다.
낙화에서 끝난 줄 알았던 내 마음은 마땅히 불타버렸다.
아빠이기에 나에게 그러해도 묵인했던 행동들, 네게도 보이는 아빠의 행위를 묵과할 수 없었다.
아빠는 동물학대범과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낡고 구질구질한 인식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가 바뀌면 되는 문제가 절대 아니기에.
내가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더 어렵다.
아빠는 몇 해동안 내가 우울증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의 외출 혹은 귀가에 아빠는 어디 가느냐, 어디 갔다 왔느냐 물었고 병원이라고 대답할 때면, 어느 병원이냐 물었다.
나는 신경정신과에 다녀왔다고 답하는 일이 왕왕 있었지만, 아빠는 결코 인정하지 못했었다.
자살시도 후 입원한 나를 간호하면서도 뭐가 힘든 건지 물어보지도 못한 아빠였다.
아빠는 이제 백설이의 어떤 해괴망측한 짓에도 화내지 않고 그러려니 넘어간다.
티비에 다른 강아지가 나오면 유독 백설이를 더 보고 싶어 하는 분이 되었다.
낡은 인식과 함께 하던 아빠를 바꾼 건 백설이의 존재였을지, 나의 언쟁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전자라고 생각하지만.
혼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도 힘들지만, 가족 모두가 함께 키우는 일도 힘들다.
가족 전체가 동의한 일임에도 각자의 생각과 가치관, 방식이 모두 다르다.
뱃사공이 많은 배에 탄 것이다.
배는 당연히 산으로 가는 동안 뱃사공들은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될 거다.
나는 다행히 승자가 되어 백설이라는 배를 산으로 가게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과정이다.
나는 백설이를 볼 때면 행복과 불행이란 극단의 감정들을 동시에 떠올렸다.
자기 비하와 혐오에 내 마음은 무수히 난도질당했다.
함께라서 행복하지만, 함께 하기 위해 견뎌야만 하고 싸워야만 했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성취보다는 상처만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삶을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
상처는 가장 마음 약한 사람들만 받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