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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리 Oct 07. 2022

우울증 집사와 강아지의 엉망진창 동거

우울증 개집사의 강아지로 산다는 건

환장할 일이다.

네가 아닌 내가.

엄마와 아빠는 내게 사랑과 관심을 주었지만, 잘못된 방식이었다.

나는 애정결핍으로 살았던 시간이 길다.

그렇기에 내가 너와 함께 사는 이유는 온전히 너를 사랑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애정 과잉으로 쓸데없이, 필요 이상으로 당당해서, 나는 오늘도 복창 터지는 하루를 살았다.


애정이 과해도 문제가 될 줄 몰랐다.

하지만 문제가 된다는 걸 알게 되었어도 고칠 수가 없다.

숨만 쉬어도 반짝이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나와 가족들은 그저 너를 예뻐하고 사랑하기로 했다.


나는 틀에서 벗어나길 싫어하며 내가 만든 틀 안에서 모든 일이 굴러가야 조금의 평안을 느낀다.

하지만 너는 내 틀 안에서 일렁이는 파도이며 곧 내 틀을 망가뜨리는 폭풍이다.

날 밀어내기 시작하더니 내 자리의 찜질팩을 독점했다.

아침이라고 부르기는 민망한 시간이지만, 눈을 뜨면 네가 날 반긴다.

날 반기기에 너는 이미 일찍부터 내 잠을 망쳐놓았다.

그래도 넌 다 잊고 꼬리를 치며 잘 잤냐는 물음 대신 핥아준다.


나 역시 네게 아침 안부를 물으며 널 쓰다듬어주면 너는 내 손길을 느끼며 끊임없이 예뻐하라고 요구한다.

내가 네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낑낑거리고 얼굴을 손에 갖다 대길 반복하지.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너다.


아침밥을 챙겨줘도 먹지 않은 널 보고 한숨 쉬고 결국 내가 포기한다.

간식을 섞어서 점심 무렵이 다 지나서야 네가 첫 끼를 먹는다.

그렇게 안 먹어놓고도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서 한바탕 침대를 어지럽힌다.

내가 다른   정리해도 침대 정리를   이유는 금방 네가 어지럽힐  알아서 참는 거다.


내가 잠깐 일하는 사이 너는 늘 침대에서 나를 본다.

침대를 좋아하는 너를 위해 나의 작업실은 컴퓨터방이 아닌 화장대 위가 되었다.

아픈 목과 허리를 부여잡고도 굳이 화장대 의자에 앉아 너와 마주 보고 너의 평화로운 시간을 함께 한다.


내 일이 끝나면, 당연히 네가 제일 좋아하는 산책을 하러 간다.

산책을 하는 동안, 넌 온 세상을 헤집어 놓으며 내 속을 뒤집어 놓는다.


길 고양이에게 시비 걸기.

담 위로 올라가기.

그리고 풀숲에서 얼굴 이따위로 만들기.


하나같이 내가 싫어하는 일들을 하는 너인데, 나는 널 혼내면서 웃고 있다.

내가 가진 강박증을 오직 너만이 파괴할 수 있다.

내 규칙이 무너저도 그게 너라면 기꺼이 환영한다.


너와 보내는 저녁도 절대 순탄할 리가 없다.

하루 한 끼만 먹는 나를 눈치 보게 만든다.

꼭 제자리도 있는 것 마냥 군다.

네가 먹을 수 있는 고기나 채소가 테이블에 올라오기라도 하면 서럽게 울어저친다.

네 울음은 내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시련이기에 나는 너에게 질 수밖에 없다.


정작 너의 식탁에서 너는 너무 뻔뻔하다.

시작은 네가 배고프면 밥그릇을 긁고 물이 없으면 물그릇을 긁는 걸로 시작되었다.

네 뜻을 알아주자 너는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밥상이 마음에 안 든다고 엎어버리라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엎을 수 없는 밥그릇을 사주었더니 끌고 다닌다.

저렇게 끌고 다니며 물을 쏟는 건 당연하다.

너는 내가 고생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 말라고 해도 너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지.


너는 내 사랑 속에서 정말이지 요망한 여우가 되어버렸다.

인정한다.

내 팔자 내가 꼰 거다.

그렇다고 네 심사가 그렇게까지 비틀릴 필요는 없었잖아.


자기 전 침대에서도 넌 꼭 일을 만든다.

네가 산 침대도 아니면서 침대를 산 장본인인 남편이 누우려 하면 화를 낸다.

사이는 제일 애틋하면서 소유욕에 불타 화를 낸 너는 당연히 나에게 쫓겨난다.


나는 용서한 적 없지만, 너는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한 나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 관한 용서를 마치고 침대로 다시 파고든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꼬리까지 흔들며 좋아한다.


아무리 내가 키웠어도 넌 대책이란 게 없는 애다.

거기에 일말의 양심도 없는 너에게 날 유기하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할까?


내가 첫눈에 반했던 너와 지금의 너 사이에는 굉장한 간극이 있다.

난 변하는 존재를 싫어했다.

지금도 싫어한다.

그럼에도 변해버린 너를 사랑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나는 그렇게 자유롭게 살지 못했지만, 너만큼은 자유롭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길 바란다.

그렇다고 네 마음대로 반려인을 바꾸는 건 안 된다.


오늘 하루도 너로 인해 벌어진 일들로 지극히 엉망이었다.

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가치관과 상반된다.

너는 분명 오늘도 나의 하루를 온 힘을 다해 망쳐놓았다.

나의 시간과 자유를 빼앗고 나의 공간을 어지럽히고 더럽혔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나는 아스라져 뼛가루만 남았을 테지만, 네 패악질이 난무했던 오늘 하루는 퍽 살만 했다.


내일의 너는 더욱 야심차고 기발하게 날 망가뜨리겠지만, 내일도 기어이 널 사랑할 나다.

너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난 너의 영원한 개집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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