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서에서 네가 등장했다.
유서를 쓰기 시작한 건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였다.
어린 마음에 욱해서 쓴 협박 편지가 아니라 하나같이 진심으로 쓴 마지막 편지였다.
그때는 우울증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꽤 어린 나이부터 우울증이었다.
매번 뭐가 그리 미안하다고 질질 짜며 남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매해 유서를 썼다.
때가 되면 공인인증서를 갱신하듯, 그 시간이 되면 해야 할 일처럼.
꼭 자살만을 위한 유서는 아니었지만, 언제 어디서든 편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쓴 건 맞다.
끝없는 우울증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자각하면서 내 유서에서는 미안하다는 말이 사라졌다.
눈물을 흘리며 남기던 유서는 일기를 쓰는 것처럼 그저 담담하고 묵묵하게 쓰게 되었다.
굳이 미안하다는 말도 남기지 않았다.
나의 죽음이 그다지 미안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너를 사랑하게 되자 내 유서에 네게 남기는 말들이 쓰이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사라질 거면서 미안한 마음 하나 없는 뻔뻔한 유서에 미안하다는 말을 썼다.
남들이 보면 비웃겠지만, 오직 너를 향해.
무던히도 울지 않고 유서를 쓰는 날을 기다렸고 그런 날을 맞이했다.
하지만 너의 존재는 다시금 눈물을 머금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 너, 하나만큼은 내 죽음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사람들은 내 죽음을 원망하겠지만, 너는 원망이나 미움 한 조각마저 품지 못할 거니까.
너는 내가 돌아가지 않을 집에서 네게 남은 삶을 바쳐 날 기다릴 게 분명하다.
이 사실이 애끓도록 서글펐다.
내 죽음을 유일하게 애도하지 않을 너에게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전할 수 없는 내 마음을 유서에 담으며 가슴 저리게 울었다.
내가 없어도 너는 행복하게 살 것을 잘 알고 있다.
너와 나의 엄마, 아빠는 날 잃은 후 잠시 슬픔에 빠지겠지만, 내 몫까지 널 더 사랑해주실 테니 말이다.
남들이 비웃든, 비난하든, 상관없이 오로지 너에게만 미안할 뿐이다.
사람들은 어찌 됐든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며 내 빈자리를 다른 마음들로 채워나갈 것이다.
그러나 너는 짙은 기다림만을 끌어안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 짙은 기다림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고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려 본 나는 그 감정의 무게를 경험해봤다.
오로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사무치게 깨달았다.
그 감정을 아는 내가 너에게 남긴 것이 그것뿐이라 미안할 수밖에 없다.
너에게 기다리란 말을 가르친 나지만, 그 뜻에 영원이란 건 없었다.
그런데 나의 죽음은 너를 영원히 기다리게 만들겠지.
너의 삶은 희극이어야 하는데, 너를 내 비극에 끌어들이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사랑할 줄 알았으면, 널 만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네 마지막을 생각하면, 너 없는 하루들을 보낼 나의 삶이 끔찍하게 싫다.
그러면서 나는 애석하게도 내 유서에 네 이름을 썼다.
너는 네게 고작 강아지가 아니라 나의 반려이기에, 나의 가족이고 나의 일부이기에.
비겁하기 짝이 없는 나는 네 마지막은 떠올리지도 못하면서, 내 마지막은 오늘도 언제가 될지 상상한다.
그리고 내가 버린 것은 나의 삶일 뿐, 네가 아니라고 안위한다.
내가 사랑하는 너는 내가 없어도 행복해야만 한다.
그렇게 잠든 너를 어루만지며 나는 영원한 잠에 빠지길 기도한다.
책임감 없는 보호자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을 고민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삶에서는 오늘도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과다.
내가 혈혈단신이었다면, 반려동물은 꿈도 꾸지 않았을 거다.
내가 아니어도 백설이를 잘 키워줄 가족이 남아있다.
물론 내가 가족보다 백설이를 더 사랑해줄 자신은 있지만.
그렇다고 백설이만을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내 삶을 살기엔 내 삶은 조금 많이 복잡하다.
백설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행복하지만, 그 행복함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우울증을 겪는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이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인 듯하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반려동물과의 삶을 선택했지만, 자기 스스로 채워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과거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던 순간, 외로움을 견뎌야만 했던 시간에서 성장한 나는 누군가를, 무언가를 지독하게 사랑하고 채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고 채워줘야 했던 건 나 자신이었다.
반려동물로는 절대 채울 수 없다.
단순히 외로움을 느껴 반려동물을 키우려 한다면, 아둔한 행동이며 후회할 것이다.
백설이는 나의 눈물은 핥아주지만, 나의 괴로움은 알아주지 못한다.
당연하게도 나 역시 어디서부터 시작된 자기혐오인지 알지 못하니 말이다.
우울증 개집사인 나는 백설이에게 내 우울증을 전염시킬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래서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있는 것 같은 내 하루를 오늘도 퍽 견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