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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리 Oct 19. 2022

우울증 집사와 강아지의 엉망진창 동거

절대 사랑만으로 키울 수 없다.

내가 너와 만나면서 제일 자신했던 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그러나 사랑만으로 너와 함께 할 수는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나는 너를 위해 너의 보호자와 반려인을 넘어 다시 학생이 되어야 했고 그 뒤로는 선생님, 미용사, 건강관리사가 되어야 했다.

너의 작은 신호 하나 놓치지 않도록 모든 삶의 신경을 쏟아부어야 했다.


너에게 나는 언니라 불리지만, 호칭에 걸맞지 않게 나는 내 인생을 갈아 넣어 너와 함께 하는 중이다.

내가 원했던 건 사랑하는 너와의 시간이었는데, 때로는 너에게 미움과 원망을 받는 시간도 보내야만 했다.

너는 나를 믿고 사랑하는 만큼, 나를 미워하고 원망한다.

그리고 변덕스러운 너는 다시 나를 더 사랑한다.


내가 전문가에게 맡길 수 있는 부분까지 직접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네가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걸 무서워하기에.

네게 미움받더라도, 네가 심술을 부리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직접 하게 되었다.


흰색 슈나우저 같지만, 비숑이었다.

처음 너의 털을 잘라주었을 때는 단순히 네가 털을 충분히 기르면 전문가에게 맡기려고 했다.

전문가에게 맡기려 했을 때 너는 다른 사람들을 싫어했고 슬개골이 안 좋아졌다.

털을 자르는 것조차도 너에게 큰 무리가 될까 봐, 네가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 게 나으니 다른 사람에게 믿고 맡길 수 없게 되었다.


네게 미운 받은 흔적들

하나부터 열까지는 못해도 하나부터 여덟까지는 내가 담당하게 되어도,

한 번 네 털을 잘라주고 나면 병원에 가거나 며칠 앓게 되어도,

뭐 하나 새로운 거 해주려면 온 난리를 부리는 덕에 상처가 나고 멍이 들어도,

우연찮게 하게 된 알레르기 검사에서 개털 알레르기가 심하다는 걸 알게 되어도,

나는 네게 미움받아도 좋으니 네가 아프지만 않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너는 팔자 좋게 늘어진 자세로, 나는 허리가 굽고 비틀고 해괴망측한 자세로 오늘도 네 털을 잘라주었다.

솔직히 네가 내 희생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지만,

너는 날 열심히 미워하겠지.

그래도 내가 사랑하니, 후회하지 않으니 난 좋다.

내가 다치고 아파도 네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다.


내 삶의 기준이 네가 되어버려서 그런 거 같다.


꼭 부모님들은 자식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 네 밥을 먹어보니 진짜 맛이 없다는 걸 알아서 네가 먹는 걸 봐도 배부르지는 않다.

나는 위대한 모성과 부성이 아닌 알량한 책임감과 얄팍한 죄책감으로 오늘도 최선을 다해 널 사랑했다.


네가 아프면, 나의 세상은 무너질 것이다.

아무리 알량한 책임감으로 시작한 사랑일지라도,

나는 죽음의 기로에 서있는 사람일지라도,

나는 울어도 너는 웃으며 행복해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오늘 하루도 죽지 않고 살아낸 이유니 말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도 살아야만 한다는 것만큼은 꼭 알았으면 좋겠다.

이미 너와 나의 시간은 하나로 꼬이고 뒤엉킨 실타래와 같다.

나는 너 없는 하루를, 네가 아플 순간을 견디지 못할  테다.

그러니 내 몸이 힘들어도 널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해주는 거다.


사랑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 시간과 삶을 네게 주었다.

너는 네 존재에 나의 존재도 달려있다는 걸 모를 테지.

네 존재로 인해 내 삶의 무게가 더해진 것이 아니라 네 존재로 인해 내 삶의 무게를 네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밤 꿈에서 네가 모는 썰매를 탔는데, 너는 신나게 달리다가도 힘들어했다.

내 무게를 버티기엔 네가 너무 작긴 하지만, 이미 너에게 나를 의탁해버렸다.

그러니 너 역시도 나를 책임져야 한다.


제발 날 버리고 떠나지 않기를.

네가 없다면 초라해질 나의 삶을 견딜 자신이 없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네가 거대한 몸짓의 나를 견뎌내 주길.


사랑만으로 너와 함께 하기엔, 너무 무겁고 짙어진 마음을 감당하기 힘들어 나는 또 무너질 테지만,

네가 밟고 지나간 나는, 네가 정성스레 핥아주는 나는 다시 이 무거운 마음을 안고 너의 영원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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