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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리 Oct 17. 2022

우울증 집사와 강아지의 엉망진창 동거

생각해보니 남편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너를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단지 강아지가 키우고 싶다던 철없는 시절을 지나, 내가 책임을 지고 살아가겠다는 시절에 도달해서야 널 만날 수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너이기에 나의 결혼으로 너와 함께 하는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엄마, 아빠의 카톡 프사도 매번 백설이다.

엄마와 아빠는 매일 네가 없는 빈자리와 허전함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내가 앓아눕거나 큰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너와 따로 살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남편과는 이미 2017년도부터 결혼까지 생각하며 연애를 했다.

내가 입양 과정에서 딱 한 가지 실수를 한 게 있다면, 남편에게 네 입양 여부를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가족 모두가 선뜻 동의해서 잔뜩 신나 있는 상황이라, 미래의 가족이 될 남편에게 물어보는 걸 깜빡했다.

남편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되었지만, 나는 당연히 결혼을 해도 너를 키울 거라 여겼다.

당연히 남편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네가 지나가던 사람도 좋아하던 시절, 당시 남자친구이던 남편은 매 주말 나와 널 위해 시간을 보내주었다.

함께 동네 산책을 하고 큰 공원까지 안고 가서 산책을 했다.

네가 온 이후로 대부분의 데이트는 당연히 너와 함께 하는 2인 1견의 데이트가 되었다.


남편은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널 챙기는 거에 더욱 정성을 들였다.

만약 내가 반대의 상황에 놓인다면, 남편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남편은 네게 지극정성이었다.


너 역시 남편이 널 얼마나 예뻐하는지를 알기에 남편을 부르는 애칭만 입에서 흘러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장난으로 남편의 애칭을 부르면, 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며 칭얼거렸다.

남편의 애칭은 네게 마법 주문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가족 모두가 놀랄 정도로 남편에 관한 네 애착과 기다림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네 존재에 관해 상의 한 마디 나눠본 적 없는 남편인데, 넌 그저 만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백설이를 찍는 남편의 핸드폰을 찍는 나

남편과 나는 당연히 결혼을 했고 우리는 한 집에 사는 가족이 되었다.

남편은 본인의 의사 여부도 묻지 않고 너와 살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너를 아껴주던 남편은 기꺼이 너를 가족으로 맞아했다.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너를 위해 시작한 적금에서도 남편은 제외됐다.

너를 데려올 당시 의사표현을 한 적이 없고 물어본 적조차 없기에, 양심상 나를 포함한 4명의 가족들이 해결하고 있다.




결혼과 출산의 이유로 버려지는 강아지의 수가 많아졌다.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늘어났지만, 1인 가구에서 2인 가구로 바뀔 때 상당히 많은 아이들이 버려지고 유기된다.

분명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환경적, 상황적 요소가 있을 거다.

결혼할 상대가 털 알레르기가 심하다든지,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지 않아 한다든지 등 상황은 많다.


모두가 내가 겪었던 상황처럼 운 좋게 넘어가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반려동물 유기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나는 원래 살던 가족이 모두 동의를 했기에 백설이와 만날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내가 없어도, 내가 책임지지 못할 상황이 되어도 백설이에게는 같이 살 가족이 있다는 거다.

엄마와 아빠는 매일 백설이를 보고 싶어 하고 안부를 묻는다.

아빠는 둘째를 데리고 오자고 하지만, 행동을 취하진 않는다.


백설이는 나와 남편이라는 가족, 엄마와 아빠라는 가족, 이렇게 두 가족이 있는 것과 다름없다.

어느 가족과 지내든 환영받고 예쁨 받고 누릴 거 다 누리면서 살 거다.


반려라는 말의 무게는 이런 것이다.

내가 피치 못할 상황에 놓였더라도 책임질 방안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해 보험을 들듯이 말이다.

내가 좋을 때만 골라서 옆에 놓고 싶다면, 그건 반려가 아니다.

선택에 따라 가족도 버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어도, 그건 엄연히 사람일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오늘도 누군가는 가족을 버렸고 버릴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그건 명백한 살인과 다름없다.

반려동물은 집에서 사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길 위에서 혼자 사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보호소에 들어가 새로운 보호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안락사 위기에 놓인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 반려동물을 버린다면, 반려동물이 죽길 바라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과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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