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수처리장 구 씨 (9)
가족들이 자기편이 되어줄 거라 생각해도 구윤학은 장현석과의 관계를 지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구주성이 건넨 봉투에서 반지를 꺼내 화장실로 가 다시금 치약으로 깨끗하고 꼼꼼하게 닦았다. 그러고는 점퍼를 걸치고 대문을 나섰다.
'금은방이 여기 어딘가에 있었던 거 같았는데, '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과 일 외에 다른 일정은 일절 없는 구윤학이기에 한참을 헤매다 금은방을 찾아 들어갔다. 구윤학의 누추한 모습에 금은방 직원 역시 큰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저기... 이거랑 같은 치수의 반지로 좀 더 예쁜 걸 살 수 있을까요?”
구윤학이 말을 먼저 말을 걸고 나서야 종업원은 시큰둥하게 구윤학이 건넨 반지를 확인했다. 초라해 보여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24k 반지를 건네자 종업원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어머, 손님. 요즘에는 이렇게 알 없는 반지보다는 알 박힌 반지를 좋아하죠. 선물하실 분 연령대가 어떻게 되죠?”
갑작스러운 친절에 당황했지만, 구윤학은 침착하게 반지를 골랐다. 구윤학이 고른 건 커플링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소중히 점퍼 안주머니에 넣고 지하 차고로 다시 향했다. 오늘 꽤나 큰 지출이 있었지만 상관없다. 자신은 자연스럽게 암으로 죽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로써 장현석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면 더욱이 좋은 일이다.
차고로 돌아온 구윤학은 점퍼 안주머니에 진통제 통도 챙겨 넣었다. 그리고 갈아입을 옷과 여분의 머플러까지 미리 챙겼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침대에 누워 가족들과 함께 있었을 때 느꼈던 아늑함을 회상하다 잠들었다.
딸을 만나기 2주 동안 구윤학의 삶에 큰 변화는 없었다. 구윤학은 자신이 산 커플링이 든 상자를 장현석의 캐비닛에 넣어놓았지만, 상자는 항상 그 자리에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있었다.
미동 없는 반지 상자처럼 구윤학과 장현석의 관계에도 큰 변화는 없었다. 장현석은 분명 반지를 보았고 구윤학이 주었을 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일그러진 우정이 반듯하게 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현석은 업무적인 얘기 외에는 구윤학과 얘기하지 않았고 그 얘기 수도 별로 없었다. 허나, 구윤학은 딸을 만날 날만을 고대하며, 다른 이들의 장현석과 다툰 것에 대한 호기심에 일관적으로 무관심하게 대했다.
딸을 기다리는 2주 동안 구윤학의 통증은 재발을 반복했다. 때로는 일하는 중에 찾아오는 통증에 다시금 분뇨 속으로 자빠질 뻔도 했고 어색하게 온기가 남아있는 지하 차고에서 기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색함을 구윤학은 느낄 새 없이 줄곧 침대 위로 쓰러졌다. 날이 갈수록 희망의 씨앗이 내린 뿌리는 굵어지고 있고 줄기는 온몸을 누비며 튼튼히 자라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구윤학은 잔혹한 통증 속에서도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이내 곧 내일이면 몇 년 만에 딸 주영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딸은 아마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도와줄 거라 믿으며, 몰려오는 극한의 통증을 버텼다. 며칠은 이불과 침대, 베개 곳곳에 남은 혈흔 자국을 열심히 빨아보았지만, 이내 금방 붉게 물드는 것들을 더 이상 빨 기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하루만 더 버티면 된다는 일념 하나만이 구윤학의 고약한 삶을 이어주고 있었다.
언제 잠든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울리지 않는 알람시계가 오늘이 바로 딸이 오는 쉬는 날이란 걸 알려주었다. 시간은 아침 9시. 구윤학은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몸을 깨끗이 씻고 꼼꼼히 면도했다. 구윤학이 가진 가장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플러도 잊지 않았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더 가다듬고 차고를 나섰다.
계절과 다르게 햇살만큼은 눈부시게 따사로웠다. 마치 가족들이 자신을 안아주는 듯 아늑한 느낌을 받으며 맑은 공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구윤학이 지하 차고에서 생활하기 전에는 일상과 같았던 것들이 몇 년 만에 너무 많이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구윤학은 후회하지 않는다. 매일 부딪히며 소중함을 잊는 것보다는 귀하게 여겨 종종 꺼내 보는 보석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
구윤학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인지 모를 정도로 포근히 자신을 감싸는 공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났다. 구윤학은 구주영인가 싶어 얼른 대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몇 년 만에 보는지조차 모르는 구주영이 양손에는 두 명의 딸아이 손을 잡고는 서 있었다.
“주영이구나!”
구윤학은 구주영을 덜컥 안았다. 구주영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구윤학은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이 딸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만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구주영의 양어깨를 붙잡고 구주영의 얼굴을 보며 느껴지는 세월의 흐름에 눈물이 흘렀다. 구윤학의 눈물에 구주영이 큰딸이 먼저 나서서 구윤학의 품에 안겼다.
“울지 마세요, 할아버지. 엄마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구윤학은 눈에 맺힌 눈물을 훔치고 자신의 품에 안긴 손녀딸에게 고맙단 의미로 토닥여주었다.
“오느라 다들 고생 많았구나. 얼른 집으로 들어가자.”
구윤학은 마치 대문을 지나 1층 현관을 열며, 마치 자신의 공간인 듯 자연스럽게 딸 구주영과 갓 성인 티를 내는 두 손녀를 안내했다. 그들이 같이 들어오자 아내는 구주영을 굉장히 반갑게 맞이하였다.
반면, 구주성과 그의 아내는 마지못해 반기는 듯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구주성은 악수를 청했다. 구주영도 떨떠름하게 그 악수에 응했다. 집안 테이블에는 화려한 점심 식사 준비가 모두 끝마쳐져 있었다.
식사 시간엔 그다지 별일이 생기지 않았다. 주로 구주영이 어떻게 살았는지, 살고 있는지가 주된 대화 주제였다. 구주영은 3년 동안 죽어라 공부해서 직업 등급 2급의 연구원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구주영은 구주성한테 공부 좀 하느냐고 물었다가 발끈해버리는 구주성 때문에 잠깐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내의 중재로 아슬아슬한 식사를 이어갔다. 구윤학은 가족들이 모두 함께 하는 순간의 행복에 겨워 가족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관찰하느라 정작 본인은 많이 먹지도 못했다.
식사가 마무리되자 구주성이 먼저 날이 야외 수영장에 따뜻한 물을 채워줄 테니 애들과 아내에게 나가서 놀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거실에는 구윤학, 그의 아내, 구주성과 구주영 넷만이 남았다.
구윤학은 구주영에게 먼저 얘기를 꺼내고 싶었는데 갑작스레 만들어진 자리에 당황스럽긴 했지만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구주영과 둘이서만 얘기를 할 수 있을지 생각을 하는 도중에 구주성이 테이블 위로 사진과 노트를 올려놓았다.
“아버지, 이게 도대체 뭐죠?”
구윤학은 차근히 사진들과 노트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피로 얼룩진 자신의 이불과 베개, 그리고 화장실 세면대의 핏자국부터 자고 있는 자신의 목을 몰래 찍은 사진부터 지난번에 낡은 노트를 꺼내 쓴 것들까지. 구윤학은 미처 눈치 채지 못 한, 어색하게 남아있는 온기의 주인은 구주성이었다. 구윤학은 이 모든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아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태평한 표정이었다. 눈물을 보이는 건 구주영이었다.
“아버지! 말씀 좀 해보세요. 도대체 아버지가 적은 희망이 뭔데요?”
“날 편히 죽게 모른 척해주렴...”
아무 말 못 하고 있던 구윤학이 구주성의 윽박에 처음으로 한 대답이다.
“원래는 건강검진 때 피와 소변을 대신 내주던 동료가 있었어. 근데 지금은 상황이 꼬여서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됐지 뭐람... 부탁한다, 아들아. 그리고 딸아... 제발 날 도와줘...”
구윤학은 힘없이 소파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엎드렸다. 대역 죄인이라도 되는 것 마냥 구윤학은 가족들에게 삶이 아닌 죽음을 구걸해야만 했다.
“아버지, 이러다가 걸리면 그 빚은 다 누가 갚고요?”
“넌 지금 돈이 문제야? 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하잖아!”
구주성은 빚이, 구주영은 구윤학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결국, 그 둘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네가 아버지를 저렇게 만든 거야. 안 그래도 가족밖에 모르시던 분을 꼭 지하 차고에서 지내게 만들어야 했어?”
“나는 나가 살겠다고 했고 그걸 말린 건 아버지야! 내가 언제 지하 차고에서 혼자 지내라고 한 적 있어요? 아버지? 네?”
흥분한 구주성이 구윤학을 쳐다봤지만, 구윤학은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바닥을 향해 처박고 있어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넌 항상 너만 잘 났지? 넌 아버지가 암으로 죽는 걸 도와줬다고 해도 28년만 일하면, 장땡이니까 이러지? 니 직업 잘 나서 좋겠어.”
“그렇게 부러우면 너는 1급 받아서 20년만 일하고 끝내면 되잖아. 그리고 애초에 네가 그럴 지능은 있어? 생각은 하고 살아? 하긴 생각이 있는 놈이었으면, 애초에 부모님 사이 찢어놓고 아버지를 지하 차고에서 지내게 하진 않겠지.”
구주성과 구주영의 싸움을 다시금 중재한 건 구윤학의 아내였다.
“다들 뭐 하는 짓이니. 자리에 앉으렴, 당신도 거기 있지 말고 자리에 앉아요.”
아내의 말에 구주성과 구주영은 씩씩거리고 분은 삭이지 못하며 자리에 앉았지만, 구윤학만은 요지부동이었다.
“암이 꽤 커졌어... 내 생각으로는 고작 해봤자 1년일 거야. 그러니 이번 하반기 검사에 쓸 소변과 피만 좀 구해줘... 제발 부탁이야, 얘들아.”
“여보!”
처음으로 구윤학의 아내가 큰소리를 냈지만, 구윤학은 그에 굴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꺽꺽이며 말을 이어갔다.
“건강검진에 사용된 소변이랑 피는 3개월까지만 보관한대...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도와줘. 그리고 모르는 척해줘. 내가 만약 암인 게 걸리더라도, 가족들한테 피해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제발... 날 좀 죽게 해 줘...”
“아버지, 상식적으로... 이거 잘못되면 우리 가족들 아니 저기 밖에 있는 애들까지도 빚만 갚다가 죽어요.”
“주성이 말이 맞아요. 그러게 내가 건강 잘 챙기라고 말했잖아요.”
구주성과 구윤학의 아내에겐 구윤학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자살이 아니라 급성 암으로 죽겠다는 거요... 그게 내가 가족을 지키는 마지막 방법이고...”
구윤학은 처절히 자신의 죽음을 가족에게 빌었다. 제발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이 간절한 외침을 듣는 이는 귀를 닫아 버린 지 오래다.
“어떻게 안 들켜요. 무조건 들키게 되어있어요. 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내가 암으로 죽어도 남은 가족이 상환할 빚은 거의 없을 거야. 이 집을 꽤 비싸게 샀으니 말이야... 그러니 그냥 한 번만 모르는 척 딱 1년만 버텨주면 안 되니?”
“아니, 그러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남은 가족은 어디서 살라고요?”
구주성의 본심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자신은 큰 빚을 지기 싫고 좋은 집에는 살고 싶은 이기심. 이 이기심이 구윤학의 간절히 청하는 죽음을 반대하는 이유였다.
“넌 지금 그게 아버지께 할 말이야? 네 나이가 몇인데, 네 앞가림은 알아서 해!”
참다 참다 결국, 폭발한 구주영이 구주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구주성은 본인의 본심이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게 멋쩍었는지 어버버거렸다.
“아버지, 오랜만에 봬서 정말 반가웠는데, 이런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전 아버지가 빚을 남기든, 뭘 하든 상관없어요. 그냥 다만, 잘 사셨으면,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는 가족들과 함께요.”
구주영은 당연히 뺏어갈 궁리만 하는 구주성도, 그를 제지하지 않는 자신의 엄마도, 모든 걸 빼앗기고도 괜찮다며, 가족은 그럴 수 있다며 이해하던 아버지도 싫었다.
“일단 엄마든 구주성이든 아버지를 살리고 싶다면, 지하 차고부터 정리하고 같이 생활하세요. 아버지는 사는 이유가 가족뿐인데, 그런 사람한테서 가족을 뺏어놓고 아버지께 이러는 거 너무들 하신 거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