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개로 뒤집는 게 전부가 아니다
부엌을 여유롭게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주 쓰지 않는 자잘한 도구들은 전부 치우는 것이다. 중복된 것들은 하나만 두고, 어쩌다가 한 번 쓰는 조리도구들은 비우고, 잘 쓰는 도구들로 그 역할을 대신한다.
예를 들면 계란찜을 잘 하지 않는 우리 집에서는 계란 풀기 전용 거품기 대신 젓가락으로 계란을 풀거나, 볶음밥 또한 자주 하지 않으므로(슬프게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가 아니다ㅡ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럼 뭘 먹이는데요?" 하고 안되었다는 눈길을 보내오기도 한다) 채소는 그냥 칼로 다져서 넣는 것 같이 말이다.
이렇게 적은 살림이 주는 쾌적함을 누리던 중, 작은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바로 둘째 아이의 이유식 시기가 도래한 것. 첫째 아이 이유식도 별다른 준비물 없이 설렁설렁했었는데, 경력직인 둘째 아이 이유식을 위해 이것저것 살 리가? 만무했다.
이유식 용기는 쓰고 있던 사이즈의 반찬통(겸 냉동밥용기)을 추가로 몇 개 더 구매하는 것으로 끝냈다. 마침 반찬통이 살짝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잘 되었다며.
이유식 끝나면 바로 반찬통으로 활용하면 된다. 이유식 전용용기는 너무 작아서 나중에 반찬통으로 활용하기엔 조금 불편하다. 눈금이 없는 문제가 있지만, 눈금 없는 이유식 통이 있던 시절에도 다들 이유식은 잘해 먹였더랬다.
저울은 애초부터 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반은 바닥에 흘리고 반은 턱받이에 묻히는 게 이유식이다. 감자, 청경채, 고구마 같은 재료들은 이유식 책에서 나온 사진을 참고해서 진행했다.(비슷한 사이즈로 재단했다) 어떤 이유식 책에서는 '감자를 사방 2cm로 썰어서 넣습니다'처럼 저울이 없어도 되는 친절한 가이드를 제공한다.
그런데 대체할 수 없는 이유식 도구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스파출라 되시겠다. 미음이나 10배 죽을 만들 때 바닥에 눌지 않도록 저어주는 도구인 동시에 완성된 이유식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그릇에 담아줄 녀석이 필요했던 것이다.
쇼핑창을 켜보니 아기 이유식용 국자, 아기 이유식용 스파출라, 아기 이유식용 알뜰주걱 등으로 구성해서 파는 세트상품만 줄줄이 나왔다.
그러던 중 단연 눈에 띄는 제품이 있었다. 에디슨의 멀티 스파출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유식을 만들 때 냄비 속을 휘휘 저을 수도 있고, 한쪽 면은 알뜰주걱처럼 되어 있어서 싹싹 긁어낼 수도 있다. 가장 획기적인 것은 스파출라 내부가 옴폭하게 되어있어서 계량눈금이 새겨져 있던 것! 이 세상에 나와 비슷한 취향의 누군가가 있다니 정말 감개무량이었다.
이 스파출라 개발자님, 이유식 회사에 근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그 제품을 사서 정말이지 "잘" 사용했고, 그렇게 이유식기간이 끝나고 나니 스파출라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현재 이 스파출라는 단종된 상태이나, 같은 브랜드에서 "멀티 국자 스푼"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미니멀라이프와 이유식을 동시에 진행하고 싶으신 분께 추천한다.
그 이유식 멀티 스파출라를 쓰면서 느낀 점이 있다. 하나의 조리도구는, 하나 이상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 ㅡ그것이 비록 조리도구 제작업체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일단 이유식 스파출라는 비우리라 마음먹었다. 더 이상 요리에 계량은 필요치 아니하였으니. 조리 중에 무언가를 저어야 한다면, 이제는 국자로도 충분할 터였다.
하지만 알뜰주걱이 주방에서 사라지는 건 조금 아쉬웠다. 그렇다고 내가 매일 하는 요리는 무엇을 알뜰하게 긁어내는 행위와는 보통 동떨어져있긴 했다. 어쩌다가 한 번 쓸 까말까 한 것이지만, 그래도 없으면 섭섭한 것이 알뜰주걱인 것이다.
뭐 좋은 방법 없을까?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우리 집에서 몇 년째 활약하고 있는 자주의 '마스터 실리콘 뒤집개'였다.
이 뒤집개로 말할 것 같으면, 신혼 초 사용했던 플라스틱 재질의 뒤집개에서 수많은 스크래치를 발견한 후 "이제 조리도구에 더 이상의 플라스틱은 없다" 선언한 뒤 첫 번째로 우리 집에 들어온 녀석이었다.
뭐... 스텐 프라이팬에 스텐 뒤집개라면 좀 더 내공 있는 주부처럼 보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녀석을 길들이는 데에 실패했다. 수학공식처럼 스텐팬 예열하는 무림 고수들의 방정식들도 전부 사용해 보았지만, 내 성미에 참 맞지 아니하였다.
그냥 프라이팬은 코팅팬으로 딱 하나만 두고 자주 교체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덕분에 뒤집개 역시 '실리콘 제품'으로 확정된 것이다.
자주의 이 뒤집개는 보통 30cm가 넘는 다른 뒤집개들과는 달리, 길이 26.5cm의 크기로 작은 내 손에 아주 딱 맞는다. 뒤집개의 실리콘 부분도 너무 무르지 않아서 볶음 주걱 대신 쓰기에도 좋고, 그렇다고 너무 말랑거리지도 않아서 프라이팬에서 자작한 국물들을 쓸어 모으기에도 좋다. 덕분에 나는 미련 없이 서랍에서 멀티 스파출라를 비워낼 수 있었다. 당근!
이런 일당백 조리도구 덕분에 서랍을 열어도 수많은 물건들이 엉키는 일 없이 부드럽게 슥 열리고 슥 닫힌다.
내가 가진 조리도구를 소개하자면 : 집게, 요리용 젓가락, 뒤집개, 국자가 전부다. 원래는 여기에 플라스틱 밥주걱까지 5개가 있었다. 그런데 서랍을 열 때마다 밥주걱이 자기주장을 하면서 서랍이 스윽~ 닫기는 걸 자꾸 거부하길래 화가 나서 비웠다. 마침 스텐압력밥솥을 쓰고 있던 참이라 밥숟가락으로 냄비를 긁어대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이의 안전을 생각해서 주방가위와 칼, 필러는 상부장에 보관 중이므로 주방 서랍에는 이렇게 정예 4 총사만 있는 것이다.
최근들어서는 요리용 젓가락의 나무 재질 관리나, 요리집게의 스텐 재질이 코팅팬에 흠을 낼까 신경 쓰이는 김에 요리용 집게와 젓가락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 낼 수 있는 제품이 없을까 탐색 중이다. 끝이 가느다란 집게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 손에 착 감기는 제품을 찾아내지 못했다.
하나의 몸뚱이로 두어 개의 역할을 해 내는 녀석을 보면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물건이 당장 내 손에 들려있지 않다고 해도 딱히 슬프거나 섭하진 않다. 덕분에 쇼핑몰에 가서 주방용품코너를 둘러볼 만한 좋은 핑계가 되기 때문이다.
과연 4 총사가 3 총사로 될 수 있을지.
좋은 물건 찾으면 그때 또 소개 올리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