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파리
해외에서의 첫 회사 면접.
지금껏 여러 학교에서 입시를 치르며 면접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회사를 위한 면접은 처음이었기에 조금 더 완벽하게 준비해야 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면접을 준비하며 우선 마쥬라는 브랜드에 대해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마쥬(Maje)는 1998년 주디스 밀그롬 (Judith Milgrom)이라는 디자이너에 의해 탄생한 프랑스 여성 패션 브랜드이며, 산드로 (Sandro), 클로디 피에로 (Claudie Pierlot)와 함께 SMCP 그룹에 속한 브랜드이다. (SMCP 이름 자체가 Sandro, Maje, Claudie Pierlot의 약자이다.) 내가 면접을 봤던 2018년 당시 전 세계에 150여 개의 매장이 있었으니 나름 세계적으로 알려진 브랜드인 셈이다.
마쥬에서 내가 지원한 포지션은 그래픽 디자이너 인턴 과정이었다. 프랑스에서 아무런 연고도, 학력도 없었던 내가 어느 회사의 정직원부터 시작한다는 건 불가능했고, 이 마저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찾아온 이 기회를 꼭 잡고 싶었다.
다행이었던 건 이 전에 프리랜서로 일했던 주얼리 브랜드가 상당히 여성중심의 브랜드였었고, 웨딩이나 패션 액세서리 분야 쪽을 넘나들며 작업했던 포트폴리오가 꽤 쌓여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로서는 이 부분을 최대한 메인으로 어필해야 했고, 그 외에 내가 했던 개인 브랜드 프로젝트나 학교에서 작업했던 프로젝트도 조금씩 추가하며 포트폴리오 PDF를 만들어갔다.
면접을 위해서는 늘 그랬듯이 예상질문에 대한 답변과 작업에 대한 설명, 또 작업에 대해 물어볼 것 같은 내용까지 빼곡히 적어서 전부 외워갔고, 핸드폰에 텍스트를 옮겨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내용들을 확인하며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5월 2일 면접날이 되었다. 내 면접은 아침시간이었기에 이른 시간 파리 2구에 있는 마쥬 오피스로 향했다. 안내 데스크에 이름을 말하고 홀에서 잠시 기다리니 곧 한 남성이 맥북을 든 채 내려왔다. 오늘 면접을 볼 마쥬의 리드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작은 밀폐된 회의실로 옮겼고 비로소 1:1 면접이 시작되었다. 사실 면접에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 그동안 어떤 과정을 밟아왔는지, 왜 프랑스에 왔는지, 왜 이 회사에 지원했는지 등 기본적인 질문들이 이어졌고 곧바로 포트폴리오 작업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면접관이었던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덤덤하고 둔감한 듯한 이미지였고, (내가 지금까지 유럽에서 만나본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모두 예민 보스였다.) 그의 이런 점은 오히려 내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PDF로 정리한 포트폴리오를 하나하나 보여주며 작업에 대해 설명했고, 내 얘기를 들으며 별다른 리액션도 없던 그의 반응은 작업이 마음에 들은 건지 아닌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미적지근했던 면접이 끝나고, 나는 도통 면접을 잘 본 것인지 뭔지 헷갈렸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프랑스는 면접 이후 결과가 나오기까지 최소 한 달 이상은 기다려야 했고, 나는 그 이후에도 구인 사이트를 뒤지며 계속해서 지원서류를 보내봤지만 연락 오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맘때쯤 한국에 있던 친구 한 명이 파리로 놀러 왔다. 어떻게 보면 결과를 기다리며 불안한 시간들을 보냈을 수도 있었겠지만 5월 한 달 동안 같이 지냈던 그 친구 덕분에 잠시 그런 건 잊고 파리를 관광하며,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어느 날 친구는 같이 포르투를 여행하자고 제안했고, 여행을 갈 만큼의 마음의 여유는 없었으나, 우선은 나도 복잡한 것들을 떠나 머리를 식히고 싶었으므로, 함께 포르투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여행을 간다는 것에 설레었지만, 한편에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구석에 둔 채 포르투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들어와 핸드폰을 켜보니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통화가 두 차례 와있었고, 난 그게 마쥬 인사팀에서 온 전화라는 걸 확신했다. 반사적으로 서둘러 전화를 걸었고, 인사팀은 면접 결과 관련해서 연락을 했었으나, 지금 당장 급한 용무가 있으니 10분 뒤에 다시 전화를 주겠다는 무슨 케이블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잔인한 멘트를 날렸다.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이런 상황이라니... 10분 뒤의 전화 내용에 따라 내 여행이 최고의 휴가가 될 수도 있고, 최악의 돈지랄이 될 수도 있었다. 둘 중에 뭐가 됐든 오늘 밤은 포르투 와인을 실컷 마실 예정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전화가 올 때까지 공항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핸드폰이 울렸고, 인사 담당자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좋은 소식을 들고 왔어."
밝은 목소리로 그녀는 마쥬의 인턴 디자이너로 합격한 걸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의 무언가가 싹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이 밝게 보였다. 물론 면접을 진행한 디자이너가 날 뽑은 것이겠지만 몇 번이나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사실 지금 포르투에 막 도착했고, 이제 여행을 시작하기 직전인데 네가 최고의 여행을 선물해 주었다고,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너무 기뻐하며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란다며 자세한 출근 일정은 메일로 보내준다고 말하고 우리는 통화를 마쳤다.
그렇게 파리에 온 지 5개월 만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나는 패션 브랜드의 인턴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심지어 면접을 본 5월 2일은 내가 6년 전 나의 첫 학교가 되었던 발렁스 보자르 시험을 본 날이었다. 큰 의미 없는 우연의 일치겠지만, 학교 합격 발표날 기숙사 침대 위를 방방 뛰며 합격의 기쁨을 소리쳐대던 그때처럼 나는 이곳에서 또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경험들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문턱을 앞두고 있었다. 한국을 떠난 뒤, 단 1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꾸준하고 착실하게 쌓아온 과정들이 만들어 낸 놀라운 결과일 것이다.
아무튼 덕분에 포르투는 나에게 최고의 여행지로서 기억에 남게 되었고, 그날밤 에어비엔비에서 친구와 함께 포르투 와인을 마시며 합격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밤늦게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을 때쯤 술이 떨어져 아쉬워하고 있을 때, 연락을 받은 에어비엔비 주인분이 차를 끌고 와 직접 건네줬던 와인 한병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달콤했던 와인과 포르투의 야경, 그 아름다운 것들을 뒤로한 채 나는 며칠 뒤 파리로 돌아왔고,
5월 23일, 마쥬로 첫 출근을 했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