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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립 Jan 09. 2024

33. 파리 패션 회사에서의 첫 출근

2018년 5월, 파리


첫 출근.

어느덧 유럽에 살기 시작한 지 6년이나 되었고, 지금껏 계속 불어를 써왔지만, 사실 단 한 번도 내가 회사에 다닐 만큼 충분한 언어 실력이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학교에서도 늘 불어로 수업을 듣고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실수가 용납이 되는 학교라는 공간에서였으니까. 못 알아들으면 현지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되는 거였고, 얼추 눈치껏 과제만 잘 완수해 가면 점수를 얻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나름의 세이프존이 존재하는 환경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회사라는 공간은 다르다. 계속해서 피할 수 없는 디테일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작은 실수가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 해외에서 회사를 다닐 정도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미 아침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파리 2구에 위치하는 마쥬 오피스.

면접 진행과 결과를 안내해 줬던 HR(인사) 팀의 멜리사와 만나 본사 사무실에서 5분 정도 떨어진 '이미지&마케팅' 부서 오피스로 향했다. 가는 동안 멜리사는 회사의 이것저것 기본적인 근황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프레스, 마케팅 등 전반적인 크리에이티브를 담당하는 '이미지&마케팅' 부서는 현재 작은 코워킹 스페이스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올해는 마쥬의 창립 20주년이 되는 해이고, 그 때문에 여러 가지 큰 행사와 캠페인을 기획 중이다. 무엇보다 9월 중순에 훨씬 큰 규모의 오피스에 새롭게 이전하게 될 예정이고, 그곳에서 현재 분산되어 있는 모든 부서가 하나로 합쳐질 계획이라고 한다.


작은 골목가에 위치한 코워킹 오피스에서 나는 부서 팀들을 소개받았다. 크지 않은 오픈 스페이스 사무실에 각각의 팀들이 부서별로 나눠져 있었고, 90%가 넘는 비율이 여성이었다. 멜리사는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직원들의 이름과 직위, 그리고 담당 업무들을 설명해 주었고, 정신없는 분위기 속에 소개받은 이름과 직책 등은 들음과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 바로 사라졌다. 어찌어찌 사무실의 모두와 인사를 나눴고, 마지막으로 나와 면접을 봤었던, 앞으로 내 매니저가 될 그래픽 디자이너 Zak과 이 부서의 디렉터, Yves를 소개받았다. (이 둘이 사무실의 유일한 남성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게이)


내 자리와 업무용 맥북을 배정받았고, IT팀과 소통하며 메일이나 계정, 필수 프로그램 등을 설치했다. 계정에 들어가니 대망의 첫 업무 메일이 날아왔다. 나에게 주어진 첫 미션은 20주년을 맞아 전 세계의 마쥬 매장에 있는 스태프들이 직접 찍어 보낸 셀프샷들을 모아 하나의 사내 이벤트 영상을 만드는 것. 당연하겠지만 인턴인 내가 그리 거창한 프로젝트를 맡을 리가 없다. 그래도 나름 나에게 맡겨진 첫 업무였다. 리테일 담당 팀을 찾아가 미팅을 가지며 필요한 내용들과 자료들을 요청하고, 전 세계 매장에서 보내온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분류하고 보정해 가며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뭐라도 처음부터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이메일에 쓰는 문구 하나, 영상에 들어가는 디테일 하나까지 신경 써가며 작업했다.


그렇게 온신경을 집중해 가며 작업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한국 회사에서는 팀별로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문화지만 여기서는 분위기가 어떤지 몰라 눈치를 보고 있는데, 그때 내 매니저인 Zak이 다가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면접에서도 느꼈지만 그는 다정한 사람이기보다는 무뚝뚝한 이미지였고, 처음 소개를 받은 이후로 오전 내내 단 한 번도 말을 걸어와본 적이 없었다. 점심시간 때도 와서 하는 말이 '나는 따로 먹으니까 너도 나가서 점심 먹고 와'였다. 유럽이 한국과는 달리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고 나름 이것저것 챙겨주는 상사가 있으면 했는데, 뭔가 섭섭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고작 6개월 계약의 인턴에게 크게 맘 붙일 필요가 없는 게 납득이 가기도 했지만.


옆에서 계속 지켜보니 Zak은 나보다 2개월 정도 먼저 들어온 다른 웹디자이너 파트의 인턴과는 꽤 사이가 가까운 듯했다. 그 인턴은 다른 웹디자이너 상사가 있었고, 출산휴가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속부하직원인 나보다 다른 팀 인턴을 더 잘 챙겨주는 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다 내가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이제 단지 1일 차의 인턴에, 프랑스어도 완벽하지 않은 동양인이 이곳에서 받아들여지기엔 어쩔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할 거라는 건 이미 애초에 짐작하고 있었다.


다행히 각 부서의 인턴들은 친절한 편이었고, 우리는 각자가 테이크아웃해 온 음식들, 또는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들고 지하 회의실에 모여 같이 식사를 했다. 팀별이 아닌 직위별로 모여 이렇게 식사를 한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프랑스는 사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은연한 계급사회가 아직 남아있는 편이다.


앞으로 6개월, 

나는 깐깐하다는 파리의 패션 회사에서 큰 실수 없이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작 인턴으로 들어왔지만, 내 능력을 이곳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건 너무 큰 욕심일까?

막막한 불안함으로 리옹에서 불어를 배우던 어학원 시절, 발렁스 보자르 학교를 거쳐 브뤼셀 왕립 예술학교에서의 학사, 석사 과정. 그리고 어느덧 마쥬 사무실에서의 인턴 디자이너. 이렇게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내 주변 환경과 공간들이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새롭게 시작되는 경험 앞에 나 자신이 작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선은 무사히 첫 하루를 마친 나를 응원하며, 내일은 한걸음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매니저에게 퇴근 인사를 건네며, 그렇게 첫날이 끝났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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