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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립 Nov 30. 2023

30. 파리에서 집 구하기

2018년 12월, 파리


파리.

한창 리옹에서 어학을 하던 2012년 여름, 나는 처음 파리에 가보았다.

그래도 프랑스에 살고 있는데, 한번 정도는 가줘야지라는 생각으로 여행해 본 파리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넓고 큰 세계였다. 활기차고 복잡한 리볼리 길,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했던 에펠탑과, 책에서만 보던 루브르, 퐁피두 미술관, 그리고 개선문과 노트르담 성당 같은 역사적 건축물들이 비현실적으로 내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세계를 경험하고 난 후, 유학생인 나에게 있어 파리는 뭔가 게임의 최종 라운드 같은 존재로 남아있었다. 리옹이나 발렁스 등 다양한 도시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늘 파리였기에, 마치 지방도시에서 경험치를 쌓은 후 언젠가 당도해야 할 마지막 결승점 같았다. 지붕이 전부 빨간색으로 통일되어 있는 리옹이 귀엽고 아늑한 초심자를 위한 마을이라면, 차가운 푸른 회색 지붕의 파리는 무언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고인물들의 도시 같달까... 심지어 지방도시에 비해 집값이나 물가도 훨씬 비쌌기에, 당시 내 기준으로는 감히 살아보고 싶다는 엄두도 못 낼 그런 높은 단계의 도시로 느껴졌다.   


그런 파리로 가게 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왠지 이제는 나도 한 단계 성장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 라운드에 들어설 준비가 되었다는 기분이랄까? 그런 허접한 생각들을 하며 2018년 12월,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다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새 도시에서의 새 출발이었지만, 벨기에로 오기 전 그래도 프랑스에서 9개월 정도 살아봤고, 지금껏 계속 불어를 써왔기에 은행계좌를 열거나 핸드폰을 개통하는 등 도시에 정착하는 과정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을씨년스러운 파리의 겨울을 버티기 위해서는 우선 집이 필요했고, 파리는 전 세계에서 집을 구하기가 가장 어렵기로 악명이 높은 도시 중 하나였다.


도시 자체가 오래되었기에 파리에는 작고 낡은 건물들이 대부분이지만 그에 걸맞지 않게 비싼 집세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그 작은 도시 안에 살고 싶어 하는 수요는 너무도 많기에, 집을 구하려는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 파리에서 사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는 서류들을 열심히 준비해서 집을 방문하면, 이미 나와 똑같이 서류들을 준비해 온 지원자들이 집 앞에 줄을 서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좋은 직장과 급여를 어필하기 위해 정장 차림으로 온 지원자들도 있는가 하면 소득을 뒷받침해 줄 보증인과 동행해 온 사람도 있다. 아무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외국인들이 이런 경쟁을 뚫고 집을 구할 수 있는 확률은 현저히 낮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대해 한동안 모르고 살았을 정도로 나는 기적적 이리만치 운이 좋았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한 집 임대 공고를 보게 되었고, 별다른 생각 없이 집을 방문하러 간 그날 저녁, 집주인에게 바로 계약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 서류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알고 보니 집주인 역시 이민자 출신이었고, 누구보다 집 구하기가 어려운 외국인들의 상황을 잘 이해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나는 부랴부랴 서류들을 가지고 계약을 진행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첫 방문 후에 바로 파리에서 집을 구하게 되었다.


월세 690유로 (한화로 약 80-90만 원), 16 제곱미터 (약 4평) 남짓한 작고 오래된 이 낡은 원룸이 앞으로 파리에서 살아갈 나의 첫 집이었다. 정확히 똑같은 월세로 15평의 현대식 집에서 살 수 있었던 브뤼셀을 생각하면 형편없는 공간이었지만 그래도 파리에 내 보금자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처음 리옹에 도착해 3평 기숙사에서 유학을 시작했을 때처럼, 이 작은 공간에서 시작하는 파리에서의 새로운 생활은 많이 외롭고 쓸쓸했지만 그래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웠다. 낮에는 집이나 카페에 머물며 계속해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회사와 작업을 하고, 일이 끝나면 파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가보고 싶었던 편집샵, 매장, 미술관, 관광지들을 마음껏 즐겼다. 늘 동경으로만 삼던 파리의 여러 공간들을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내 발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설레었다. 그럼에도 가끔 사람이 그리워서 여기저기 밋업 프로그램에 참가해보기도 하고, 주말에는 공원을 산책하며 놀러 온 가족들이나 사람들을 구경하며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렇게 매일 낮에는 파리의 공간들을 마음껏 탐닉하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게임 작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외롭지만 나름 안정적이고 평온한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동안 계속해서 프리랜서로 일을 이어갔던 회사에서 갑자기 계약해지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지금까지 이 일 덕분에 파리에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일이 없어지니 당장 생계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수입이 없이는 파리에서 내야 할 월세, 생활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고 아직은 내 브랜드로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게임 프로젝트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생계가 더 우선이었다.


선택지가 없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나는 파리에서 취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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