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으로 잠에 들지 못했다. 최근 들어서는 숙면에 효과가 있다는 명상도 하고 있지만,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보다도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생각에 눈을 돌리고 있다. 외눈을 뜨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들에 압도되던 밤이었다.
"떠오르는 생각들은 부드럽게 흘려보내세요."
몇 년 전에 집안에서 요가를 하거나 명상을 할 때도 자주 들었던 멘트. 그때까지만 해도 놓아주는 게 곧잘 됐었는데, 요즘은 놓아준다기보다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느낌이다. 자의로 놓지 않는다기보다는 놓으려고 손을 아무리 뿌리쳐도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에 가깝다. 그저 '내가 지금 이런 감정이구나, 나 지금 불안하구나.' 하고 인정하면 될 것을. '왜?'라는 질문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자꾸만 '왜?'를 찾아 쏘다니니 잠이 달아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기왕 잠이 달아나버렸으니 다가올 아침에는 무언가 새로운 일정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집안에만 있다 보면 똑같은 풍경에 똑같은 공기만 지겹도록 보고 마실 것이 뻔하니까. 눈 안에 새로운 풍경을 담아보자.
좋아하는 것, 먹고 싶은 것, 갈 수 있는 곳, 분위기. 모든 것을 골똘히 생각했다.
'읽던 책만 읽지 말고, 새로운 책을 좀 만나 볼까?'라는 생각에서 떠오른 건 북카페. 인터넷으로 여러 곳을 검색해 보았지만 걸어서 가기엔 멀었다.
'오늘은 많이 춥다던데. 그럼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나?'
두 번째로 떠오른 곳은 프랜차이즈 카페. 걸어서 가기에도 나쁘지 않았지만 상가 주차장 이곳저곳에서 차가 튀어나와 꽤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오전부터 묵직한 디저트를 먹으면 위장이 몸부림칠 것이 뻔했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아주 배가 고팠다.
'꽃집은... 그냥 보고만 나오기에는 왠지 눈치가 보이고, 전시회는... 여기도 걸어서 가기엔 좀 힘들 것 같네.'
고민한 끝에, 일정은 최대한 단순하게 짜 보기로 했다.
집에서 약 10분 거리에 샐러드 가게가 있었다. 작은 가게였지만 양도 푸짐하고 사장님도 친절하다며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가게의 사진을 보았다. 깔끔하고 포근한 느낌.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마음속에 걸어둔 모든 조건을 충족하니 우선 가보기로 했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머리를 감고, 따뜻한 물로 세수와 양치를 해서 마음을 맑게 닦아냈다. 헤어스타일도 단정하게 가다듬고 나니 사람이 달라져 보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아파트 공동현관을 나선 순간부터 얼굴에 와닿는 찬바람에 웃음이 터졌다. 입꼬리와 눈가를 물들이는 미소가 낯설면서도 정말 사람 사는 세상에 초대된 것 같아 기분이 몽글몽글하게 뭉쳐져 떠올랐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거친 길을 걸으면서도 웃음꽃에 푹 파묻힌 채로 걸었다. 아, 사람들이 보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려나? 그래도 뭐 어때, 기분이 좋으면 좋은 거지.
가는 발걸음마다 때 이른 봄꽃이 피었다.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달콤한 사과 향기가 머리맡의 하늘을 물들였다.
샐러드 가게에 들어가서 간단히 인사를 하고 좋아하는 리코타 치즈가 들어간 샐러드를 주문했다. 딱 맞추어 가사가 없는 어느 영화의 ost가 흘러나왔다.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도록 라디오를 켜 두신 듯했다.
음악소리 사이에서 통통통, 하고 채소와 과일을 써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복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샐러드가 눈앞에 있었다. 각종 채소들, 바나나와 귤, 올리브, 키위, 좋아하는 단호박 샐러드와 리코타 치즈. 생각보다도 더 많은 양이 나와서 다 먹을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 될 정도였다. 노릇하게 구워져 보기만 해도 바삭해 보이는 작은 빵과, 붉은색을 띠고 있는 이름 모를 따뜻한 차 한 잔.
테이블에 홀로 앉아 오로지 나를 위한 식사를 만끽했다. 접시 위를 가득 채운 샐러드는 마치 채소와 과일로 만들어진 섬 같았다. 함께 나온 발사믹 드레싱은 심심할 때마다 조금씩 더 곁들여 먹었다. 채소와 과일을 번갈아 가며 열심히 먹다 보니 사장님께서 나직한 목소리로 한 가지 팁을 주셨다.
"단호박, 빵에 발라 드시면 더 맛있어요."
음식에만 눈을 두고 있다 돌연 귀에 들어온 목소리에 조금 놀랐지만, 사장님의 따스한 목소리 속에 담겨 나온 팁을 그대로 따라 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고로'가 된 것만 같다.
바삭한 빵의 틈새에 크림 같은 단호박을 듬뿍 얹어 베어무니 마음 안쪽에서 탄산이 톡톡 터졌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한가득 피어났다. 음식이란 게 사람을 이렇게나 행복하게 할 수 있구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단맛이 입안에 퍼지고 목 안쪽으로 넘어갈 때,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깔끔하게 내려주었다.
이 이름 모를 차는, 아마도 비트를 우린 것 같다. 차 안쪽에 얇게 썬 비트가 한 조각 들어가 있었다. 컵 안쪽에서 피어오르던 김에도 비트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마음이 따스해진다.
내가 거의 다 먹어갈 즈음에는 모든 테이블이 가득 차 있었다. 너무 번잡해지지 않도록 빠르게 접시를 비우고, 음식 값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왔다.
기분 좋게 채워진 배를 두드리고 집으로 돌아가 따스한 이불속에 누웠다. 노곤하게 풀어지는 몸과 마음은 그제야 잠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자꾸만 행복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오늘의 데이트는, 이렇게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