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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우울 상점 03화

편지

by 이지원

기분이 가라앉을 땐 편지를 썼다.

꾹꾹 눌러쓴 글씨 위에 마음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그제야 마음이 개운해졌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채운 뒤에는 마음에 드는 노트를 샀다. 눈에 확 들어오는 것으로. 어떤 색이든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처음 손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닿을 곳 없는 글씨는 마음 안에서 돌고 돌다 종이 위에 새겨졌다. 종이는 예나 지금이나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고 가만히 들어줄 뿐이다. 파란 잉크를 품은 채로.


답을 알 리 없는 종이 위에 답을 묻는 질문을 쓰기도 하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땐 엎드린 채 울기도 했다. 볼펜의 잉크가 번져 종이 한 군데가 파랗게 물들었다.

왠지 더럽힌 것만 같아 마음속도 파랗게 멍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는 행복한 소식도 전해줘야 하지 않겠냐면서, 더욱 들뜬 마음으로 그날의 행복을 적어두기도 했다. 글씨에는 작은 날개가 돋아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좋았다.


새로운 날이 몇 겹이나 쌓이고 나면 슬픔은 옅어지고 행복도 조금은 옅어진다.

그럴 때 편지가 담긴 노트를 살며시 열어보았다.

내가 던졌던 질문에 답을 하기도 하고, 아팠던 곳을 어루만져주기도 했다. 옅어진 행복 위에서는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았다.


어쩐지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

내가 적었던 편지가 닿을 곳은 내 마음 한가운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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