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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형태

by 이지원

있잖아, 나 배가 고파.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에, 명백히 어울리지 않는 말로 마음속에 흐르던 정적을 깨뜨렸다. 뱃속이 텅 비어 있는 느낌. 그리 좋아하지 않는, 께름칙하고 공허한 그 느낌. 오직 창자 안을 나돌아 다니는 공기만이 느껴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불길하다. 저녁으로 먹었던 것을 전부 게워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쓸쓸한 공기와 함께 명치에 걸린 것은 염오감이었다.


있는 대로 뾰족해진 그것이 노리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있는 대로 모든 것을 떠안으려 했던, 책임감으로 위장한 무책임. 이곳저곳에 던져놓은 몸뚱이. 오로지 잘 보이고 싶어 선택했던 것들. 모든 것들이 서슬 퍼런 칼이 되어 내 몸을 베었다. 의식을 놓으려 할 때마다 자꾸만 불길한 꿈에 발이 빠지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처음으로 팀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나는 팀장이 되었다. 마감기한을 한 달 앞두고도 아무런 진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앞장서서 누군가를 이끄는 것에 전혀 내성이 없었던 나는 무거운 짐에 눌려 완전히 짜부라지고 말았다. 그나마 의견을 내고 함께하려 노력하는 팀원도 있었기에 짐을 덜어내고 들썽이는 마음을 잠시 다독일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맡았던 주제가 워낙 어려워서인지, 누구도 먼저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려 가며 간신히 프로젝트의 방향을 정했고 틀을 짰다. 밤을 새워 가며 논문을 찾고, 뉴스 기사와 영상을 꼼꼼히 살피고, 최신 통계 자료를 확인하고, 리포트를 작성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팀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협업이라는 요소를 챙길 수 없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뜻을 하나로 모아야 했으니, 쉽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참여 의사가 있는 팀원은 의지를 갖고 참여했지만, 그렇지 않은 팀원들은 힘겨운 얼굴로 멀찍이 떨어진 채 진행 상황을 지켜보았다. 나는 이상적인 리더와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독려라는 것이 참 어려웠다.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참여를 유도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지만, 그러는 사이 마감기한은 점점 목을 죄어 왔다. 그 날카로운 이빨에 목이 물어 뜯기기 전에 서둘러 결과를 내야 했다.



어찌어찌 결과를 내었고 천만 다행히도 호평을 들었지만, 다른 짐승에게 다른 곳을 물어뜯기고 말았다.

화장실에 들를 적마다 다량의 피가 비쳤고, 뒤바뀐 수면 패턴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자연히 활력이 떨어졌고 우울과 불안이 늘었다. 사람을 볼 때마다 입꼬리를 말아 올려 미소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한다는 것이 괴로웠다.


하늘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 속에 묻혀 있기라도 한다면 참 좋을 텐데. 그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고 상처를 받을 수 없는, 동물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면 좋을 텐데. 물렁한 살이 있고 단단한 뼈가 있는 내가, 영락없이 살아 움직이는 동물인 내가 어떻게 그 외의 것이 될 수 있을까.



보통 사람이었더라면 '다음에 더 보완하면 되지.'하고 넘길 만한 것을, 지저분하게 뒤끝이 긴 나는 꼭 마음에 담아두었다. 협업이라는 중요한 본질을 놓쳤다는 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개인 프로젝트와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단단한 기숙사의 침대에 걸터앉아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자신에게만 적용하던 기가 막히게 견고한 완벽주의였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었을지 몰라도, 과정은 빈틈투성이었다. 모양만 그럴듯한 빛 좋은 개살구였다. 내가 내놓은 살구의 빛이 과연 좋았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다 지난 것을 이제 와 돌아본들 변하는 것은 없었다. 손을 떠난 것이니 그저 보내주는 수밖에.



속이 쓰리다.

뱃속에서부터 무언가, 끔찍한 것이 돋아나는 것만 같다. 여전히 뒤바뀐 수면패턴은 돌아오지 않고, 애써 돌려놓아도 또다시 튕겨 나와 세상에 나를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허기가 몸 안을 기어 다닐 적마다 나는 눈을 뜰 수가 없다. 그저 빨리 잠으로 도망쳐서 모든 것을 잊으려 한다. 그마저도 악몽에 시달리며 지독한 악취가 스며든 물거품으로 변모하지만 말이다.


있지, 난 박쥐가 된 것만 같아. 머리가 있던 곳에 발이 있고 발이 있던 곳에 머리가 있어. 내게 찾아온 밤은 캄캄한 낮이 되었고, 낮은 밝은 밤이 되었어. 감은 눈꺼풀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앙 다물어진 입술 속의 이빨과 혀 위에서 무엇을 뭉개고 있을까. 그것의 맛이 씁쓸할지, 달콤할지, 콧잔등을 구길 정도로 시큼할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어. 그저 받아들일 뿐이야.


내 등을 쓰다듬어 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줘. 그날 코에서 배어 나왔던, 인중을 타고 흘러 입술을 뜨겁게 적시던 찝찔한 피를 훔쳐 줘. 물때가 낀 타일 바닥에 소리 없이 떨어진, 잘 익은 석류알처럼 반질반질하고 검붉은 핏방울을 닦아 줘. 진득하게 말라붙기 전에, 되돌릴 수 없게 되기 전에.


숨을 쉬기가 힘들어. 나에게는 낯선 감각이 아니야. 이렇게 살면, 이렇게 살다 보면 목덜미에서 붉은 아가미가 생겨날까? 은빛 비늘이 돋아난 팔이, 가슴팍이, 허리와 다리가, 정신없이 퍼덕이며 나를 바다로 데려다줄까?


뭐가 되었든, 나는 동물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당분간은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그래도 그냥 살아갈 뿐이야. 저 위쪽,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꼭꼭 감추어진 괘종시계가 울리기 전까지.

그 길고 무거운 소리가 귀에 닿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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